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0화 (110/155)

110화 괴물들 (3)

쿠어스 필드의 경우 외야가 넓고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는 특성상 외야 수비가 힘들다.

이는 콜로라도 로키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쿠어스 필드로 원정을 온 팀들 또한 외야 수비를 힘겨워하기에, 팀의 문제가 아닌 구장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쿠어스 필드를 더 작게 지었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다들 고개를 젓는다.

만약 더 작게 지었다면 쿠어스 필드는 탁구장이 됐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중견수 찰리 블랙몬의 수비가 썩 좋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지만, 수비력이 최악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잘하는 것도 아니다.

딱 평범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홈과 원정에서의 수비 지표가 크게 차이나는 거만 봐도 알 수 있다. 찰리 블랙몬의 수비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사실 쿠어스 필드의 중견수가 팬들을 눈높이를 맞추려면 말도 안 되는 수비 범위와 타구 판단력을 지닌 중견수가 필요하다.

그런 중견수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단지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정도로 준수한 타격 실력을 지닌 외야수 중에는 없었을 뿐이다.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전과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트리플A를 초토화시키고 올라온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이 적응기조차 없이 메이저리그에 순조롭게 안착했고, 테이블 세터가 밥상을 차려 주자 득점력의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탄탄한 내야와 달리 외야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의 타격 지표가 영 별로였다. 특히나 좌익수의 경우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해 2할 3푼 5리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2할 6푼 3리 13홈런 45타점의 준수한 활약을 보여 줬던 좌익수는, 2020시즌 31경기에서 2할 1푼 3리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지난해보다 못한 활약을 보여 줬다.

심지어 쿠어스 필드에서마저도 2할 2푼 2리에 홈런 하나만 기록했을 정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오랜 회의 끝에 팀의 승률을 끌어올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찰리 블랙몬의 포지션을 좌익수로 변경하는 대신, 트리플A와 빅리그를 오가며 도합 100경기에 출장했던 만 26세의 이안 세비지라는 선수를 중견수로 기용하기로 말이다.

또한 타격 지표와 상관없이 수비에 문제만 없다면 풀타임을 맡길 예정이기도 했다.

주전 좌익수의 타격 지표가 최악인 상황에서, 새로 기용한 중견수가 아무리 못해도 어차피 득점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수비만 놓고 따지면 팀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수비 하나만으로도 몸값 이상의 활약을 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6회 초.

이안 세비지는 어째서 자신이 수비 하나만으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빗맞은 안타가 돼야 했던 타구지만 정확한 판단과 빠른 발을 이용해서 아웃으로 바꿔 버렸다.

유현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린 채 박수를 친 뒤, 이안 세비지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최고의 수비를 보여준 동료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작 아웃카운트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안 세비지의 호수비는 이번 경기의 향방을 결정지을 최고의 호수비였다.

첫 출루를 허용할 뻔했던 유현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반대로 LA다저스 입장에서는 첫 출루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위기를 벗어난 유현은 두 타자 모두 하이 패스트볼을 이용해 삼진을 유도하면서 가뿐하게 6회를 마무리했다.

18타자 연속 아웃.

쿠어스 필드 역사상 반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대기록에, 유현이 아웃카운트 9개만을 남겨 둔 채로 순항을 하고 있었다.

* * *

-오늘 유현 선수의 포심 패스트볼은 무브먼트가 살아 있습니다. 원정 경기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볼 끝이 떠오르는 듯한 착시 효과를 만들어 내기엔 충분합니다.

-거기에 제구 또한 잘 되고 있고요.

-맞습니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지난 세 차례 등판과 달리, 오늘은 포심 패스트볼을 원하는 코스로 정교하게 제구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앞선 등판들과 달리 포심 패스트볼의 비중을 높일 수 있었던 겁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9개. 저희는 이제 상황 중계 외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겠습니다.

6승 무패 방어율 0.18 63탈삼진.

메이저리그 진출 전의 우려와 달리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은 채 호투하고 있는 유현이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원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타를 많이 허용하는 편이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이용한 발군의 땅볼 유도 능력 덕분에 48이닝 동안 단 1실점을 한 거지, 구장이 구장이다 보니 안타를 허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즌 7번째 등판에서만큼은 뭔가 달랐다.

되는 날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 한다고 보여주기라도 하듯, 6회까지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았다.

쿠어스 필드에서 노히트노런은 몇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게임은 나온 적이 없다.

팬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KBO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적 있는 유현이, 어쩌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대기록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7회 초.

옆 사람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열정적인 덴버의 팬들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혹시나 자신들의 함성이 유현의 피칭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행동했다.

유현은 기에 보답하듯이 땅볼만 세 차례 유도하며 7회 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대머리 감독의 머리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식과 스칼렛이 대화를 나눴다.

-확실히 스칼렛 씨가 걸어 준 축복의 도움을 제대로 보는 거 같습니다.

-유현 씨가 좋은 선수라서 그런 거죠. 다른 선수였다면 이 정도로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축복이 없었다면 대기록에 도전하지도 못했겠죠. 6회 초의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안타로 기록됐을 테니까요.

-음. 확실히 그건 제 축복 덕분인 것 같네요.

스칼렛은 시범경기에서 호투한 유현에게 야수들의 수비 집중력과 호수비 확률이 2배로 상승하는 축복을 걸어줬다.

그리고 오늘.

스칼렛의 축복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수들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인플레이 타구를 깔끔하게 처리해줬다. 이안 세비지의 정신 나간 다이빙 캐치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야수들이 안정적으로 수비로 유현에게 도움을 줬다.

그리고 이어진 7회 말.

1사 1․2루 상황에서 유현이 타석에 섰다. 동시에 LA다저스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워커 뷸러와 대화를 나눴다.

“유현까지 상대할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결과가 어떻건 간에 유현이 마지막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투수한테 세 번 연속 안타를 맞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2회 이후 실점을 하용하지 않으며 마운드에서 버틴 워커 뷸러의 투구 수는 105구, 100구를 넘기 시점이기에 유현까지 상대한 뒤 교체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워커 뷸러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잡고 내려간다. 세 번은 안 돼.’

앞선 두 타석에서 유현은 워커 뷸러를 상대로 3루타와 안타를 기록했다. 안타를 기록한 이후에는 2루와 3루 베이스를 훔치며 도루 두 개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세 번째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주자를 남겨놓고 내려가더라도 같은 투수인 유현만큼은 잡고 내려가겠다고 다짐하며, 워커 뷸러가 신중한 투구를 이어나갔다.

초구는 바깥쪽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슬라이더였다.

“스트라이크!”

유현은 슬라이더에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지켜봤다.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오는 슬라이더에 감탄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야. 슬라이더 죽이네.’

워커 뷸러의 슬라이더는 예술이었다.

구속이 최고 147km가 나올 정도로 빨랐고, 꺾이는 각 또한 예리해서 제아무리 좋은 타자라 하더라도 쉽게 공략하기 힘든 타구였다.

2구는 몸쪽으로 바짝 붙는 하이 패스트볼.

딱!

유현이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원정 팀 더그아웃 쪽으로 향하는 파울이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가 됐다.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서 워커 뷸러는 포심 패스트볼 두 개를 높은 코스로 던지며 헛스윙을 유도했다.

유현은 하이 패스트볼에 속지 않았다.

헛스윙을 유도한다고 치기에는 제구가 말을 안 듣는지 존에서 눈에 띄게 빠졌고, 구분이 확실하게 되는 볼에 성급하게 배트를 휘두를 정도로 유현은 공격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2스트라이크 2볼 상황.

몸쪽으로 붙는 포심 패스트볼이 파고들자 유현이 다시 한 번 파울을 만들어 냈다.

6구째.

워커 뷸러는 다시 한 번 슬라이더를 꺼내들었다. 초구와 마찬가지로 바깥쪽 낮은 코스에 걸치게 할 생각이었다.

4구 연속으로 패스트볼을 던졌다.

몸쪽 위주로 승부를 했으니 바깥쪽으로 슬라이더가 날카롭게 파고들면 헛스윙을 하거나 아예 대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아…….’

워커 뷸러는 간절하게 바랐다.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나온 슬라이더 실투를 유현이 놓쳐 주기를 말이다.

워커 뷸러의 슬라이더는 분명 최고였다.

하지만…….

아무리 투수라고 해도 제대로 꺾이지 않은 밋밋한 슬라이더가 한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데 놓쳐서야 되겠는가.

딱!

유현이 슬라이더를 정확한 타이밍에 받아쳤다.

힘이 실린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갔다.

중견수가 끝까지 따라가 봤지만 펜스를 통타하고 말았다. 다행히 타구가 워낙 빨라 유현이 3루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사이 주자 두 명이 모두 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깔끔한 2타점 2루타였다.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2루타! 유현 선수의 회심의 일격이 워커 뷸러 선수를 무너트립니다!

-아아. 워커 뷸러 선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울 거 같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슬라이더 실투를 던졌는데 그게 2루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워커 뷸러 선수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7회 말 1사 2루 상황에서 LA다저스가 투수교체를 단행합니다. 스코어는 6대0입니다.

-유현 선수는 히트 포 더 사이클에 홈런 하나만을 남겨두게 됐습니다. 과연 경기가 끝나기 전에 유현 선수가 홈런을 칠 수 있을까요?

-하하하. 히트 포 더 사이클 같은 대기록은 선수가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천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이 흔히 말하는 되는 날이라면 기록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투수가 투타 양쪽에서 대기록을 동시에 세운 적이 있었던가요?

-이건 굳이 기록을 찾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단언컨대, 만약 유현 선수가 두 가지 기록 모두에 성공한다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이며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대기록을 세우게 되는 겁니다.

유현이 2루 베이스를 밟은 상황에서 LA다저스의 투수교체가 진행됐다.

그 즈음.

유현은 자신이 히트 포 더 사이클에 홈런 하나를 남겨두고 있음을 알게 됐다.

더그아웃에 있는 봉식이가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탓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히트 포 더 사이클이라…….’

애초에 유현은 타격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저 팀의 승리에, 그리고 자신이 승리투수가 되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는 거였다.

오늘 같은 경우는 운도 따랐다.

첫 번째 승부에서는 워커 뷸러가 투수인 유현에게 너무 쉽게 승부를 건 것이 주효했고, 세 번째 승부에서는 슬라이더가 실투로 들어온 덕분에 2타점 2루타를 기록할 수 있었다.

투수교체가 단행된 상황에서 1스트라이크 2볼.

유현이 3루 베이스를 훔치며 한 경기에서 세 번의 도루를 기록하게 됐다.

‘히트 포 더 사이클은 사이클이고 이건 이거지.’

희생 플라이를 통해 유현이 홈 베이스를 밟으며 스코어는 0대7까지 벌어졌다.

8회 초.

7회까지 81구를 투구한 유현이 다시 한 번 마운드를 올랐다.

대기록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여섯 개.

그리고 홈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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