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9화 (109/155)

109화 괴물들 (2)

24승 7패.

여전히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현이 시즌 7번째 등판을 쿠어스 필드에서 치르게 됐다.

상대는 LA다저스.

선발 투수는 워커 뷸러.

2019시즌 15승 8패 방어율 2.51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활짝 연 인버티드W 투구 폼의 이 투수는, 2020시즌에도 5승 2패 방어율 2.45 51탈삼진을 기록하며 클레이튼 커쇼와 여환진과 함께 LA다저스 선발진의 중심이 되어주고 있었다.

통산 쿠어스 필드 성적은 2승 2패 방어율 4.55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기록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홈에서 LA 다저스를 상대하기에 앞서 헨리 곤잘레스-랜디 오스틴-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마크 번칠-유현 순으로 타순을 꾸렸다.

데뷔 후 첫 네 경기에서 연속으로 멀티 히트를 때려내고 있는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은 부상이나 갑작스러운 기량 하락이 없는 한 시즌이 끝날 때까지 테이블 세터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클린업 트리오야 시즌이 시작한 이후 꾸준히 잘해 주고 있으니 긴 말이 필요 없다.

중요한 건 6번과 7번이었다.

타율 2할 6푼 4리를 기록하며 수비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마크 번칠과, 투수임에도 준수한 타격 실력과 출루만 했다 하면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 배터리를 뒤흔드는 유현을 나란히 배치했다는 건 한 가지 의도로밖에 볼 수 없었다.

1~7번 타순에서 최대한 많은 득점을 만든다.

8번과 9번 타순을 포기하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콜로라도 로키스는 이날 경기를 앞두고 찰리 블랙몬의 포지션을 중견수에서 좌익수로 변경했고, 중견수 자리에는 트리플A에서 수비만큼은 메이저리그 수준이지만 타격이 기대 이하라고 평가받는 선수를 배치했다. 우익수 또한 타격보다는 수비 지표를 보고서 선택했다.

구장이 넓으면서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다 보니 쿠어스 필드에서는 외야 수비가 쉽지 않다.

실제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경우 탄탄한 내야 수비와 달리 외야 수비 지표는 수년 동안 메이저리그 최하위권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견수 찰리 블랙몬의 수비력이 좋지 않은 편이기도 하지만, 구장 자체의 문제도 있어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외야로 타구가 뜨면 항상 불안에 떨며 지켜봐야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9번 타순에서의 득점을 포기하며 중견수와 우익수 포지션의 수비력 강화를 도모한 것이다.

1회 초.

유현은 초구로 바깥쪽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타자가 적극적으로 스윙을 해보았지만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으면 헛스윙이 되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초구 포심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황에서, 유현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연습 투구 때도 느꼈지만 오늘따라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은 거 같아. 제구도 평소보다 잘 되는 느낌이고.’

평소보다 포심 패스트볼이 좋았다.

무브먼트도 살짝 볼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살아 있었고, 제구 또한 쿠어스 필드에서의 이전 등판들과 달리 수월하게 잘 됐다.

일단 1회 초에는 외야 수비를 강화한 효과를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유현이 세 타자 모두 땅볼로 깔끔하게 처리하며 공 8개로 이닝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손쉽게 승부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봉식과 스칼렛이 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흠. 오늘따라 공이 좋다?

-확실히 평소보다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아 보이네요.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멀쩡한 상황은 보기 드문데 말이죠.

-원정에서처럼 과감하게 승부해도 되려나요?

-괜찮아요. 타구가 다른 구장보다 멀리 뻗는다는 걸 기억하기만 한다면요.

-들었지? 장타만 조심하면 된다고 하니까 마음 편하게 승부해 봐.

‘……너희 그냥 더그아웃에 있으면 안 될까?’

봉식이 혼자 있을 때는 적당히 약을 올리거나 놀리면 발끈하다가 이내 조용해졌는데, 스칼렛이 온 뒤로는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두 땅의 정령은 유현이 등판할 때면 호흡이 척척 맞는 만담 콤비가 됐다.

그러다가 유현이 짜증을 내거나 집중이 안 된다고 하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감독의 머리 위에 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곤 했다.

이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현이 삼자범퇴로 1회 초를 틀어막고 내려오자, 머리 위에서 신나게 떠들던 두 땅의 정령은 유현의 푸념을 듣고서 재빨리 감독의 머리 위로 보금자리를 갈아탔다.

동시에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 좀 조용하겠네.’

땅의 정령 둘이서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듣는 유현의 입장에서는 투구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다.

봉식 혼자 있을 때야 대화할 땅의 정령이 없으니 중간중간 자기 할 말만 하고 말았지만, 스칼렛이 온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다행히 두 땅의 정령은 자신들의 대화가 유현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다는 걸 알고 있기에, 대부분 1회까지만 유현의 투구를 지켜보고서 할 말을 한 다음 더그아웃으로 이동하곤 했다.

유현에게 말하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였다.

경기와 관련된 조언을 하거나, 혹은 감상평을 하며 잡담을 하거나.

후자의 경우 유현의 컨디션이 좋아서 가만 놔둬도 호투할 거라고 판단한 거였다.

이날 등판이 딱 그러했다.

1회 초 세 타자 모두 땅볼로 처리하면서 유현은 초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서 과감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지금껏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을 보여 주기 식으로만 던지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평소보다 무브먼트가 살아 있었고 제구 또한 나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1회 말.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턴의 연속 안타에 이은 더블 스틸로 무사 2․3루 찬스를 잡은 상황에서, 찰리 블랙몬의 희생 플라이와 놀란 아레나도의 홈런이 폭발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0대3으로 앞서나가게 됐다.

LA다저스의 차세대 에이스이자 강력한 사이영 상 후보로 평가받는 워커 뷸러이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의 제구가 말을 듣지 않으며 고전하는 모양새였다.

2회 초.

마운드에 오르기 전 유현은 포수 마크 번칠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다.

“투구 패턴 한번 바꿔 볼까?”

“1회 초에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고 제구도 정확하던데, 그래서 그러시는 거죠?”

“응. 이런 날이 흔히 오는 건 아니잖아.”

“네. 비중을 살짝 높여 볼게요.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패턴 바꿀 거예요. 아시죠?”

“당연하지.”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와 제구가 평소보다 좋다는 걸 확인한 상황에서, 유현과 마크 번칠은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승부를 하지는 않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평소보다 공에 힘이 있고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 날.

유현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컨디션이 절정에 가까운 날일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건 타자를 정면 승부를 해주는 것이다.

유현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긴 했지만 여전히 타자들과의 정면 승부를 하진 않았다.

타자들의 약점을 후벼 파는 방식이,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땅볼 일변도에서 삼진과 땅볼의 비율이 1대1 수준으로 말이다.

유현이 헛스윙 삼진, 유격수 앞 땅볼, 다시 한 번 헛스윙 삼진으로 2회 초 또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2회 말.

딱!

1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유현이 초구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3루타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받아친 것이다.

‘투수라고 쉽게 승부하려고 생각했다면 나야 고맙지.’

유현은 매 경기 타석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내야 안타 외에 안타를 못 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출루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으니까.

안타를 치는 경기에서의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 투수가 유현을 쉽게 생각한다는 거였다.

안타를 더러 치긴 했지만 내야 안타가 많았고, 타격 실력보다는 빠른 발이 많은 주목을 받다 보니 타격 실력 자체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유현의 타격 실력은 투수치고는 좋은 편이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좋다고 평가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제구가 안 되는 포심 패스트볼을 초구부터 존 안에 찔러 넣는데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구속은 96마일이 기록됐지만 무브먼트가 밋밋해서 공략을 하는 게 쉬웠다.

결국 유현은 8번 타자가 큼지막한 중견수 플라이를 날려준 덕분에 홈 베이스를 밟았고, 1득점을 기여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0대4로 앞서 나가게 됐다.

1회에 3실점, 2회에 1실점.

첫 2이닝 동안 연속으로 실점을 한 하긴 하지만, 워커 뷸러는 5회까지 85구를 투구하며 3회부터 5회까지는 실점을 하지 않았다.

5회 말에 유현을 상대로 또 다시 안타를 허용한 게 유일한 흠이긴 했다.

다행히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유현에게 2루와 3루 베이스를 연속으로 뺏기긴 했어도, 모든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어진 6회 초.

유현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LA다저스 타자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 * *

타순이 한 바퀴 돌 때만 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쿠어스 필드에서 투구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다 보니 고생을 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15타자 연속, 5회까지 단 한 명도 1루 베이스를 밟지 못하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다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번 이닝에는 1점이라도 뽑자. 지금 못 따라가면 오늘 경기 힘들어.”

“저 자식 투구 수도 55구밖에 안 돼. 이대로 놔두면 완봉인데 그래도 괜찮겠어?”

“완봉이면 그나마 양반이지. 최악의 경우도 가정해야 할 만큼 상황이 안 좋아. 포심 패스트볼이 살아나니까 공략하는 게 너무 까다로워. 예상을 벗어난 구종들을 자꾸 존 구석구석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니까 답이 안 나와.”

“일단 출루부터 하고 보자고.”

5이닝 퍼펙트.

유현에게 꽁꽁 묶이며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 해본 상황에서 시작된 6회 초.

딱!

LA다저스의 7번 타자 키케 에르난데스가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커터를 공략해서 중견수 방향으로 뜨는 타구를 만들었다.

문제는 타구의 방향과 속도가 애매하단 거였다.

타구가 빠르기는 하지만 크지 않았고, 2루와 외야 사이에서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빗맞은 안타가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

유현이 오늘 경기의 첫 안타를 허용할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 LA다저스와의 홈 4연전을 앞두고 트리플A에서 올라온 중견수가 미친 듯이 내달리며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다.

정상적인 수비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빗맞은 안타가 될 타구였지만, 타구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앞으로 내달린 덕분에 거리가 꽤나 좁혀진 상황.

다이빙 캐치의 결과…….

-와우! 이안 세비지가 잡았습니다! 키케 에르난데스의 안타를 빼앗는 정신 나간 다이빙 캐치! 자신이 왜 메이저리그에 수비 하나로 올라올 수 있었는지 제대로 보여 줍니다!

-타구가 맞는 순간 보여 준 판단이 좋았습니다. 거의 동시에 전력질주를 시작했기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빗맞은 안타가 될 타구였습니다.

-쿠어스 필드에서 보기 드문 외야에서의 호수비가 나오며 유현 선수가 16타자 연속으로 아웃카운트를 잡는 데에 성공합니다.

와아아아아아!

환상적인 호수비가 펼쳐지는 순간 쿠어스 필드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동시에 LA다저스 타자들은 직감했다.

아. 오늘 경기 힘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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