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8화 (108/155)

108화 괴물들 (1)

유현은 4월에 전승 가도를 내달렸다.

48이닝을 투구해 6승 무패 63탈삼진.

방어율은 0.18.

중견수 플라이로 끝날 줄 알았던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며 솔로 홈런이 됐고, 그게 유현이 4월의 마지막 등판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무려 46이닝 만에 허용한 첫 실점이었다.

첫 실점에도 불구하고 유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실점 후에도 2이닝을 추가로 소화하며 8이닝 1실점 호투로 팀의 1대6 승리에 기여한 것이다.

평범한 외야 플라이도 장타로 만들어 버리는 쿠어스 필드에서는 실점을 각오하고 투구해야 한다.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려고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다.

중요한 건 상대 투수보다 1점이라도 더 적게 실점하는 가운데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며 팀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거다.

그것이 선발투수가 해야 할 역할이다.

유현은 그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상대 투수가 더 힘들게 투구할 거라는 걸, 1구 1구 투구할 때마다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느낌일 테니 자신은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는 걸 말이다.

21승 6패.

콜로라도 로키스는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기분 좋게 4월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가온 5월 1일.

-콜로라도 로키스, 랜디 오스틴과 헨리 곤잘레스 콜업.

-로키스의 슈퍼 루키들, 마침내 빅 리그에 입성하다.

-테이블 세터에 배치된 슈퍼 루키들, 득점력 부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까?

-놀란 아레나도 “밥상만 잘 차려라. 배 터지게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2019시즌 트리플A를 초토화시켰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괴물 유망주 두 명이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됐다.

* * *

랜디 오스틴.

2019시즌 트리플A에서 3할 9푼 5리 41홈런을 기록하며 콜로라도 로키스의 거포 1루수가 될 거라며 각광을 받은 키 192cm의 1루수.

헨리 곤잘레스.

야구선수치고 작은 177cm의 키에도 불구하고 2019시즌 트리플A에서 무려 타율 4할 2리 20홈런 51도루를 기록한 2루수.

두 선수는 2020시즌 나란히 트리플A에서 4할 4푼 5리와 4할 5푼 8리를 기록하며 자신들을 빨리 메이저리그에 올려달라고 시위했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두 선수를 4월 내내 트리플A에서 뛰게 놔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서비스 타임 관리를 해야 돼서, 그리고 팀의 성적이 좋기 때문이었다.

유현의 영입과 더불어 월드 시리즈 우승을 천명한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는, 시즌 초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서비스 타임과 무관하게 두 슈퍼 루키를 콜업했을 것이다.

타율이 메이저리그 전체 25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콜로라도 로키스는 21승 6패를 기록하며 시즌 초를 순항했다.

굳이 무리해서 두 슈퍼 루키를 콜업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5월 1일이 돼서야 선의의 라이벌이자 베스트 프렌드인 두 슈퍼 루키는 메이저리그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중…….

“유현! 당신을 정말 보고 싶었어요!”

헨리 곤잘레스는 유현에게 다가와 진심으로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헨리 곤잘레스.

그는 유현과 대전 펠컨스에서 2년간 한솥밥을 먹었던 펠릭스 곤잘레스의 사촌 동생이었다.

유현은 자신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헨리 곤잘레스와 악수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어제 펠릭스에게 전화가 왔어.”

“형이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메이저리그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거 같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서 대한민국행 비행기 화물칸에 실어 보내래.”

“화물칸에 들어가기 싫어서라도 잘해야겠네요.”

“슈퍼 루키 님인데 어련하시겠어.”

“부담 주지 마세요. 빅 리그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줘?”

“네. 가르쳐 주세요.”

“안타를 쳐도 좋고 볼넷을 얻어내도 좋아. 여차하면 몸에 맞아도 괜찮겠지.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으니까 출루해. 그리고 나서 빠른 발을 이용해 끊임없이 상대 배터리를 자극해.”

“트리플A에서 했던 거랑 똑같은데요?”

“어.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이야.”

메이저리그라고 해서 특별하게 다른 건 없다.

선수에 대한 대접과 연봉이 어마어마하게 차이나긴 하지만, 선수로서 해야 할 일은 마이너리그와 똑같다.

투수는 자신이 소화하는 이닝 내에서 최대한 적은 실점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타자는 한 번이라도 더 출루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기량이 충분하다면 성공하고, 기량이 부족하다면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현이 봤을 때, 아니 봉식과 스칼렛의 눈으로 봤을 때…….

두 선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2루수와 1루수를 붙박이로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헨리 곤잘레스-랜디 오스틴-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 순으로 테이블 세터와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했다.

이 라인업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현재 라인업에 있는 타자들 중 두 슈퍼 루키보다 밥상을 잘 차려 줄 선수가 없다, 많은 득점을 위해서는 이 라인업이 최선이다.

기존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코칭스태프 입장에서 봤을 때 최선의 선택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은 1회 초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헨리 곤잘레스는 4구째로 들어온 커터를 받아쳐 3볼 1스트라이크의 카운트에서 중전 안타를, 랜디 오스틴은 9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볼넷을 얻어 내며 무사 1․2루의 찬스를 만들어 냈다.

3번 타자 겸 중견수 찰리 블랙몬이 타석에 들어선 상황에서,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에서는 분주하게 사인이 나왔다.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이 시선을 교환하며 벤치의 사인을 접수했다.

1볼 1스트라이크 상황.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은 투수가 투구를 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다음 베이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제대로 뺏긴 상대 배터리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포수는 3루와 2루 그 어디에도 송구하지 못한 채 헛웃음을 내뱉었다.

트리플A에 있을 때도 더러 시도하며 재미를 봤던 더블 스틸이 제대로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 * *

콜로라도 로키스의 클린업 트리오는 첫 27경기를 치르는 동안 타율 3할 2리, 출루율 4할 2푼 2리, 장타율 5할 1푼 7리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문제는 클린업 트리오를 제외하면 타율이 2할 2푼 5리로 확 떨어진다는 거였다.

득점의 상당 부분을 클린업 트리오에 의존하는 구조이다 보니, 클린업 트리오가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경기를 패배하곤 했다.

그나마 유현이 선발 등판하는 경기는 조금 더 나았다. 어떻게든 출루하기만 하면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 배터리를 뒤흔드는 투수 덕분에 득점 루트를 조금 더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선발투수인 유현이 매 경기 타자로 출장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도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상황에서, 콜로라도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한 발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정적인 득점 루트를 다양화할 방법을 찾는 게 필수였다.

홈과 원정에서의 타율 차이를 제쳐 두고서라도 타격 지표 자체가 지난해보다 더 떨어졌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지구 1위를 위해서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 줘도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승리를 위해 득점 루트의 다양화는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시즌 초, 상대 팀들은 상황에 따라 콜로라도 로키스의 클린업 트리오를 고의사구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나오는 타자들이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였다.

만약 테이블 세터가 밥상을 차려 주고, 6번에 타율 2할 7푼 1리에 5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마크 번칠을 기용하면?

함부로 고의사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일단, 두 괴물 루키는 메이저리그 데뷔 첫 경기 첫 타석에서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완벽하게 입증해 내고 있었다.

더블 스틸 이후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의 연속 2루타, 트레버 스토리의 시즌 7호 홈런이 폭발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1회 초부터 무려 5득점을 만들어 냈다.

테이블 세터가 밥상을 제대로 차려 줬을 때 콜로라도 로키스의 클린업 트리오가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 줬다.

이날.

콜로라도 로키스는 존 그레이의 시즌 첫 완투승과 타선의 대폭발에 힘입어 15대1로 압승을 거뒀다.

그리고 이슈의 중심에는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이 존재했다.

헨리 곤잘레스 5타수 4안타 4득점 2도루를, 랜디 오스틴은 4타수 4안타 1홈런 2타점 5득점을 기록하며 펄펄 난 것이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너희들 루키 맞아?”

“지금껏 메이저리그에 안 올라오고 뭐했어! 작년 확장 엔트리 때 올라와서 같이 포스트시즌에 갔어야 할 거 아냐!”

“젠장. 많은 거 바라지 않으니까 하루에 네 번씩만 출루해. 그때마다 내가 2루타나 홈런을 쳐서 한 시즌 200타점을 기록할 테니까!”

두 사람은 어째서 자신들이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는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가뜩이나 팀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기존 1루수와 2루수 입장에서는 두 선수의 맹활약에 불안함을 느꼈지만, 그 외에 모든 구성원들은 두 선수의 맹활약을 진심으로 반겼다.

모든 투수가 매 경기 호투할 수는 없다.

특히나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투수라 해도 상황에 따라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타선의 힘이다.

투수가 무너진 경기에서 타선의 힘으로 판세를 뒤집고, 이길 수 있는 경기는 득점력을 바탕으로 확실하게 잡는 게 강팀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지난 2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연속으로 탈락하며 고배를 마셨을 때, 어느 누구도 콜로라도 로키스를 강팀이라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팀의 약점에 대해서 힐난했다.

산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바보가 되는 타선, 클린업 트리오를 봉쇄하면 득점 루트가 없는 타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2020시즌에는 이전과 같은 성적을 기록할 거라고 말했다.

시즌 21승 6패로 순항하고 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투수들이 지치는 순간부터 성적이 하락할 거라고, 부족한 득점력을 보완해야 지구 우승을 노릴 수 있다고 말이다.

슈퍼 루키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알 수 없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기엔 차고 남는 맹활약을 보여줬다.

더그아웃에서 유현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채 해바라기 씨를 갉아 먹으며 경기를 지켜보던 봉식과 스칼렛 또한 두 선수의 맹활약을 보며 시종일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쿠어스 필드가 아닌데도 잘하네. 쟤들이 테이블 세터 맡으면 득점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아마 두 선수는 계속 잘해 줄 거예요. 로키스 소속 선수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홈과 원정에서의 타율 편차도 없을 거고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시즌에도 지구 1위는 확정적이겠네요.

-월드 시리즈까지 노려봐야죠.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결국 모든 팀들의 최종 목표는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는 것이다.

탱킹을 하는 팀도, 시즌을 포기하고 셀러가 되는 팀도, 사치세를 무시하고 과도한 전력 보강을 하는 팀도 모두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린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는 상황 속, 콜로라도 로키스가 빈곤한 득점력을 해결할 만한 방법을 찾아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타자 두 명이 바뀌었다고, 테이블 세터가 그럴듯하게 갖춰졌다고 하위 타순에서는 빈곤한 득점력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해 로키스 코칭스태프가 대놓은 해답은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가자.

모든 팀이 완벽한 전력을 구축할 순 없다.

사치세를 초과하면서까지 전력 보강을 하는 팀들도 빈틈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 빈틈을 가지고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곤 한다.

야구는 상대적인 스포츠다.

약점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상대보다 점수만 더 내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빛난 장점들이 약점을 가려 주곤 한다.

하위 타순에서의 빈타?

테이블 세터와 클린업 트리오가 승리에 필요한 최소한의 득점을 만들어 주고, 지난 몇 년 동안 전력 보강을 하며 만들어 낸 투수력으로 찍어 누른다.

그것이 콜로라도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리기 위해 내놓은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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