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7화 (107/155)

107화 거기서 거기 (3)

6회까지 14개.

압도적인 탈삼진 페이스를 보여 줬던 유현은 7회 이후에도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 50퍼센트, 스플리터 30퍼센트.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는 간간이 섞어 던지면서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대놓고 사용했음에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은 유현을 공략하는 데에 실패했다.

몸쪽과 바깥쪽, 높은 코스와 낮은 코스를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을 찔러 대는 포심 패스트볼과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의 조합에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어쩌다 한번 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노려 쳤다 싶으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들어와서 파울이나 범타가 되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안타 두 개를 때려냈지만 모두 단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은 2루 베이스를 밟지 못했고, 유현은 별다른 위기 없이 경기를 9회 말까지 끌고 갔다.

9회 말 2아웃.

투구 수는 101구에 삼진은 18개.

유현은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기 위해 전력투구를 이어 나갔다.

“스트라이크!”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포심 패스트볼을 지켜보기만 한 타자는,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을 보고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98마일.

무려 98마일이다.

1회 말에 기록했던 구속이 9회 말에도 나오고 있다는 건, 100구를 넘은 시점에서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98마일을 확인한 순간 타자는 의욕을 상실했다. 무슨 짓을 해도 마운드 위에 있는 저 미친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때 포스트시즌에 진출만 했다 하면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할 거 같다던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강팀이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전력보강 실패와 주전 선수들의 기량 하락 및 플라이볼 혁명 적응 실패로 인해서 급격한 추락을 겪었다.

2020시즌.

시즌 초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클럽 하우스 분위기가 최악이 되어 버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진출 후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는 유현을 상대로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했다.

어쩌면 이날 경기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헌납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3번 타자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빨리 퇴근하고 싶다, 트레이닝 마감 시한 전에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은 전의를 상실한 타자를 상대로 한가운데에 9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스윙할 생각이 없는 게 대놓고 보이는 타자를 상대로 힘을 빼고 가볍게 던지며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9탈삼진 무실점.

완벽한 투구로 승리를 따낸 유현은, 침묵으로 가득 찬 AT&T 파크에서, 특유의 어퍼컷 세레모니를 한 뒤 포수 마크 번칠과 주먹을 맞댔다.

“저 요즘 유현과 호흡 맞출 때마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은 거 알아요?”

“프리랜드랑 그레이도 잘 던지잖아.”

“두 사람이랑은 느낌이 달라요. 뭐랄까…… 유현의 공을 받을 때면 반드시 이길 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내 소원 중 하나가 쿠어스 필드 승리의 상징이 되는 거야.”

“유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이날 경기를 계기로 유현은 확신을 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고, KBO리그에서 하던 대로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말이다.

* * *

처음 유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몇몇 구단들은, 특히 포스팅에 참여했으나 계약에 실패한 지구 라이벌 팀들의 지역 언론들은 대놓고 유현을 무시하는 발언을 종종 했다.

한참 수준이 낮은 KBO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이유로 유현이 지나치게 고평가되고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첫 세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줬을 때도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땅볼 유도에는 능력이 있지만 약점이 분명하다, 13탈삼진을 잡은 건 어쩌다 한 번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거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약점이 확실하게 분석될 거다.

하지만…….

유현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을 상대로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9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하자 더이상 비난을 하지 못했다.

비난 대신 경계심을 키웠다.

사실 지구 라이벌 팀들도 유현이 첫 세 경기에서 보여 준 모습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난다 해도 261이닝을 투구하며 방어율 0.10에 300탈삼진을 마크했다면 그 기량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걸, 이미 그 리그의 수준을 벗어난 투수라는 걸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억지로 외면했다.

솔직한 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좋은 투수를 영입했다는 걸, 이번 시즌에도 그들에게 밀려 지구 1위 경쟁에서 밀릴 거라는 걸 말이다.

이제는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유현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고 심층 분석에 돌입했다.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약점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약점을 후벼 판다면 공략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물론 유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즌 다섯 번째 등판을 앞둔 상황에서 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연승은 아쉽게도 17연승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유현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 다음 날에 패배를 하며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후 콜로라도 로키스는 4연패를 하고 말았다.

시즌 초부터 지적됐던 타선의 부진으로 인해 원정 경기에서 승리에 필요한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게 컸다.

첫 3경기에서 20이닝 2실점으로 유현과 더불어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준 카일 프리랜드마저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팀의 연패를 끊어내지 못했다.

8이닝 4피안타 1사사구 9탈삼진 1실점.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 줬지만 타자들이 단 1득점도 올리지 못하며 완투패를 하고 말았다.

17연승 후 4연패.

17승 4패로 여전히 메이저리그 전체 1위이긴 하지만, 4연패를 당하며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팀의 4연패를 끊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딱!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온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받아칩니다. 총알 같은 타구가 2루수와 1루수 사이를 꿰뚫었습니다. 유현 선수가 1아웃 상황에서 출루에 성공합니다.

-정말 깔끔한 안타였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쳤는데 쉬운 게 아닙니다.

-유현 선수는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출루를 해낸 이상 빠른 발을 이용해서 집요하게 상대 배터리를 흔들어놓을 겁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지난 경기에서 영봉패를 당했습니다. 선취점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발 빠른 주자가 출루한 이상 어떻게든 득점을 만들어 내려 할 겁니다.

해설위원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유현에겐 부담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득점력 강화를 위해 다시 한 번 2번 타자로 출장한 유현은, 욕심을 내지 않고 깔끔한 안타를 만들어내며 출루에 성공했다.

출루를 한 이상 유현은 자신의 장기를 120% 살려 투수를 뒤흔들기로 마음먹었다. 득점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필요 없었다.

많은 점수는 필요하지 않다.

일단 1점이면 충분하다.

일단 한번 득점을 하기 시작하면 타자들이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가라앉은 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살아날 터였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상대 배터리가 3번 타자 찰리 블랙몬과의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였다.

유현은 초구부터 과감하게 뛰었다.

유현의 도루를 예상하고 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포수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2루를 향해 송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드 폭을 크게 잡은 상황에서 빠르게 스타트를 끊은 유현의 발이 베이스를 밟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1사 1루가 1사 2루가 된 상황.

유현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또 다시 리드폭을 크게 잡은 채 투수의 신경을 교란시켰다.

견제구가 몇 차례 날아왔지만 빠르게 귀루하며 아웃되지 않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리드폭을 크게 잡기를 반복했다.

2볼 2스트라이크 상황.

유현은 과감하게 도루를 시도했다.

포수는 3루 송구를 포기할 정도로 타이밍을 제대로 뺏겼고, 스윙을 하지 않은 찰리 블랙몬은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친 포심 패스트볼이 볼 판정을 받으며 승부를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는 데에 성공했다.

동시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투수는 얼굴을 붉힌 채 포수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순간.

유현은 확실했다.

오늘 경기, 이길 수 있다고 말이다.

-잘 흥분하는 투수들은 빠른 발을 이용해서 살살 약 올려주면 페이스를 잃기 마련이지.

‘응. 그래서 일부러 리드 폭 크게 잡고 도루를 시도한 건데 잘 먹히네. 하긴. 발 때문에 1사 1루에서 1사 3루 상황이 되면 열 받을 법도 하지. 심지어 죽어라 견제를 했는데도 막지 못했으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쉽게 도루를 허용한 적은 없었을 거다. 보통은 너처럼 발이 빠르면서도 타이밍을 정확하게 뺏어나지 못하니까.

‘이제 득점만 올리면 되는 건가?’

-찰리 블랙몬은 팀 배팅을 할 줄 아는 선수이니까, 어떻게든 타구를 외야로 보내줄 거다. 그 때 반드시 홈 베이스를 밟아.

‘물론이지.’

유현과 봉식의 예상대로 찰리 블랙몬은 타구를 외야로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예상과 달리 유현은 느긋하게 걸어서 들어오며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과 기분 좋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찰리 블랙몬이 우측 펜스 끝을 통타하는 3루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찰리 블랙몬이 1타점 3루타를 기록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여전히 1사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득점 찬스를 이어가게 됐다.

유현과 맞대결을 하게 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투수는 호투할 때만 놓고 보면 사이영 상을 노려도 될 정도지만, 일단 한 번 흥분하기 시작하면 정면 승부만 하다 보니 난타를 당하는 일도 많은 투수이기도 했다

1사 1루 상황에서 연속 도루에 이은 3루타를 허용하자, 코칭스태프가 투수의 멘탈을 케어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놀란 아레나도에게 2점 홈런까지 허용하며 스코어는 3대0으로 벌어졌다.

이후 투수는 어렵사리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미 실점은 실점대로 한 상황.

그리고 유현이 승리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단 3점이면 충분했다.

유현은 지난 등판에 이어 이번 경기에서도 탈삼진 위주의 피칭을 해나갔고, 시종일관 큰 위기 없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을 압도했다.

9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15탈삼진 무실점.

두 경기 연속 완봉승을 수확하며 유현이 팀의 4연패 탈출에 기여했다.

경기 후.

기자들은 유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쿠어스 필드에서는 전형적인 그라운드 볼러로만 보였던 유현이 원정 경기에서 경이로운 탈삼진 페이스를 보여주는 것과 관련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한 유현의 답은 단순했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최소한의 실점을 위해 투구 패턴을 바꿨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투구 패턴을 바꿨다고요?”

“네. 전 언제든지 삼진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삼진보다 중요한 건, 팀이 이길 수 있도록 매 경기 최고의 투구를 하는 겁니다. 쿠어스 필드에서도 대량의 삼진을 잡으려고 했다면 실점 가능성이 높아졌을 겁니다. 그래서 땅볼 유도의 피칭을 한 거고요.”

“팀을 위한 피칭 스타일의 변화였다는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5경기에서 40이닝을 투구하며 방어율 0을 기록하며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상대 팀들이 유현 선수에 대한 분석을 더 철저하게 할 텐데, 어떻게 극복해나가실 생각이십니까?”

“KBO리그에서 하던 대로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현의 답에 몇몇 기자들의 미간이 일그러졌고, 수군거리는 기자들 또한 있었다.

해석에 따라 논란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유현은 부연 설명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의 수준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 공이 최고의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걸 확인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아직 비장의 무기도 꺼내지 않았고요.”

“비장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6월에 알게 되실 겁니다.”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팀들이 전력분석을 통해 집요한 공략을 하기 시작할 6월.

유현은 그때가 되면 메이저리그 초토화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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