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거기서 거기 (2)
유현은 만족하지 못했다.
더 잘하고 싶었고, 비교 대상조차 없는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옵트 아웃 이후 더 많은 몸값을 받고 싶었다.
투수로서 당연한 욕심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행을 택한 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줄 최고의 구단이라 판단해서였다.
일단 유현의 목표는 옵트 아웃이 되기 전까지 세 시즌 모두 옵션을 충족함과 동시에 방어율 1위를 기록하는 거였다.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는 것과 비슷한 논리로, 투수들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강하다.
패스트볼 제구가 엉망이 되고 평범한 외야 플라이도 종종 홈런이 되는 곳이니 같은 방어율을 기록하더라도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만약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투수가 방어율 1위를 기록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이영 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봐야 한다.
현대 야구는 승수보다는 방어율을 더 높이 평가한다. 승수는 투수가 결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지만, 방어율은 수비의 도움을 받긴 해도 투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표인 게 사실이니까.
거기에 이닝 소화와 탈삼진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아직 시즌 초이긴 해도 유현의 방어율은 0이고, 3경기에서 22이닝을 투구했을 만큼 소화 능력 또한 뛰어나다.
경기당 평균 7과 3분의 1이닝을 소화하면서도 평균 투구 수는 93구에 불과했다.
문제는 6월 이후다.
유현이 좋은 활약을 보일수록 더 철저하게 분석이 들어올 테고,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공략법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KBO리그와 달리 메이저리그라면 유현을 공략할 수 있는 타자들도 있을 테고 말이다.
유현은 어떻게 하면 자신에 대한 분석을 무력화할 수 있는지, 6월 이후에도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KBO리그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기 위해 만족하지 않고 계속 했던 행위를 메이저리그에서도 똑같이 하면 된다.
투구 패턴의 다양화.
투구 패턴을 다양하게 가져가면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공에 익숙해지기 힘들고, 이는 곧 투수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유현은 AT&T 필드로 온 김에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메이저리그 상당수의 구단에서는 유현을 그라운드 볼러라 생각하고, 탈삼진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KBO리그에서 300탈삼진을 기록했음에도, 13탈삼진 경기를 한 차례 보여 줬음에도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로 인한 선입견, 그리고 쿠어스 필드에서 보여 준 철저한 땅볼 유도 위치의 피칭 때문이었다.
13탈삼진을 잡은 경기가 이례적인 거고 유현의 삼진 능력은 리그 평균 수준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예상이었다.
유현은 그 편견을 깨고 싶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는 철저하게 땅볼 위주의 피칭을 하던 투수가, 원정만 갔다 하면 KKK머신이 된다? 그러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땅볼 유도를 하고?
타자들은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에 대한 평가 또한 달라질 것이다.
땅볼 유도가 전매특허인 투수에서, 탈삼진과 땅볼 유도를 원하는 대로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투수로 말이다.
딱 유현이 원하는 스토리다.
팡! 팡! 팡!
유현이 3구 연속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그리고 모두 볼 판정을 받았다.
4구째에야 비로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 유현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흐음. 생각한 것보다 바깥쪽이 훨씬 더 타이트한데? 진짜 박하기는 박하다.’
-너야 딱히 손해 볼 건 없잖아.
‘나는 없지. 상대 투수가 불쌍해서 그래. 바깥쪽이 저렇게 타이트하면 몸쪽 승부를 잘해야 하는데, 내가 알기론 오늘 등판하는 투수가…….’
-바깥쪽 위주의 피칭을 하고 싱커와 투심 패스트볼이 전매특허인 그라운드 볼러지. 너처럼.
‘응. 나랑은 좀 다르지만.’
-많이 다르지. 넌 몸쪽을 어떻게 이용해야 타자들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지 잘 아는 데다, 삼진도 많이 잡으니까.
‘바깥쪽이 타이트하다고 이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유현은 공 3개를 희생해서 바깥쪽을 야박하게 잡아 주기로 유명한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하는 데에 성공했다.
스트라이크 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공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고, KBO리그에서도 스트라이크 존이 야박한 주심이 배정된 경기에 등판할 때 더러 보여준 행동이었다.
바깥쪽이 평소보다 공 1개에서 1개 반 정도 좁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승부를 시작할 차례였다.
팡!
“스트라이크!”
4구 연속으로 스윙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타자가 처음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유리한 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실투가 들어왔다 판단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실투라고 판단되는 공은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졌다. 풀스윙을 한 타자는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당황한 채 유현을 바라보았다.
‘뭐야? 방금 그거 스플리터야? 이런 미친!’
타자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전력분석에 따르면 유현을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은 크게 세 가지였다.
수직 무브먼트만 놓고 따졌을 때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위권인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 포심 패스트볼과 거의 구속차이가 나지 않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빠른 인터벌을 통해 타자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공격적으로 투구하는 거였다.
하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직접 겪어 본 유현은 달랐다.
전력분석에서는 제4의 구종으로 보여 주기 식으로 던진다고 했던 스플리터가 뚝 떨어졌다.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투구 폼에서 말이다.
보여주기 위한 구종이 아닌 수준급 결정구의 무브먼트였다. 어째서 이런 구종이 제대로 전력분석 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탈삼진 13개 중에 10개를 포심 패스트볼으로 잡았다고 해서 경계심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건 포심 패스트볼을 경계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공격적으로 피칭하는 투수는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 타자들 또한 공격적으로 스윙을 해야지,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순간 투구 패턴에 말린다.
그 와중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가 섞여 들어온다면?
실투가 들어오거나 게스 히팅이 통하지 않는 한 타자의 입장에서는 공략하기가 까다로워진다.
타자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을 수만 있다면 공격적인 투구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
그리고 유현은 그 누구보다 타자의 심리를 잘 꿰뚫는 투수였다.
세 타자 연속으로 1회가 끝났을 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수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오늘 조금 잘 던지는 거 같다고, 차분하게 공략하면 무너트릴 수 있다고, 다른 팀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을 못한 거라고 말이다.
여섯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2회가 끝났을 때.
타자들은 유현의 공이 전력분석으로 파악한 것보다 좋은 거 같다고, 수직 무브먼트가 좋은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하다고 느꼈다.
타순이 한 바퀴 돌 때까지 아홉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고 3이닝 퍼펙트를 기록했을 때.
타자들은 유현에게 공포를 느꼈다.
전력분석과 전혀 달랐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이용한 땅볼 유도를 주의해야 한다고 했던 전력분석은 틀렸다.
유현은 그냥 괴물이었다.
* * *
“젠장…….”
“스플리터가 별거 아니기는 무슨. 저 정도면 거의 마구 아냐?”
“죽어라 공격만 하는데도 공략이 안 돼. 같은 폼에서 세 구종의 구속이 비슷하고 스플리터가 뚝 떨어지는 것도 까다로운데, 예상을 벗어나는 코스와 구종을 계속 쑤셔 넣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노리는 구종이 녀석에게 다 간파 당하고 있어.”
“……힘들 거 같은데.”
10타자 연속 탈삼진의 위기는 1번 타자가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나며 어찌어찌 벗어났지만, 유현의 탈삼진 페이스는 여전이 매서웠다.
4회에 하나, 5회에 둘, 6회에 둘.
6회까지 유현은 도합 14탈삼진을 수확했다.
투구 수는 71구.
유현은 타석에서도 빛이 났다.
스코어 3대0인 상황에서 찾아온 무사 1․2루의 찬스에서 유현이 타석에 섰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던 유현은,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번트를 대라는 벤치의 작전에 응했다.
딱!
배트를 맞고 튀어나간 타구가 3루 방향을 향해 흘러갔다.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3루수가 앞으로 튀어나와 타구를 잡으며 아주 잠깐 고민했다.
1루 주자와 2루에서 승부를 할까, 아니면 정석대로 1루를 노려 안정적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추가하는 게 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3루수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걸, 고민을 해서는 안 됐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주 잠깐.
찰나를 망설였을 뿐이지만 그 사이 유현은 빠른 발을 앞세워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었으니까.
그 의도는 명확했다.
확률은 낮지만 1루에서 싸움을 해보겠다, 보내기 번트를 댔다고 허무하게 아웃으로 물러날 생각은 절대로 없다.
3루수가 다급히 1루를 향해 송구를 했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송구가 옆으로 빠지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사이 모든 주자들이 한 베이스씩 더 진루했다. 3루를 밟았던 주자가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오며 스코어가 4대0으로 벌어졌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여기서 1점을 추가합니다. 치명적인 실책 하나가 경기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2선발이 타석에 섰을 때, 베이스에 나가 있을 때 상대 팀은 절대 망각해선 안 됩니다. 그는 투수이지만 메이저리그 최고의 주력을 지녔다는 걸 말이죠.
-타자였으면 100도루를 기록했을 거란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죠.
-전력질주를 하지 않았다면 송구 실수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발 빠른 주자가 절묘한 번트를 대고 전력질주를 하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해지고 실수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유현 선수의 빠른 발이 만든 득점이라고 봅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장에서 봤을 때 가뜩이나 어려웠던 경기였건만, 유현의 빠른 발이 만들어 낸 실책 하나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빅 이닝을 만들어 냈다.
지난 세 경기에서 평균 3득점에 그쳤던 타선은, 7회 초에만 트레버 스토리의 만루 홈런을 포함해 무려 7득점을 하며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10대0으로 스코어가 벌어진 상황.
7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는 유현을 향해 투수 코치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120구까지다.”
동시에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남은 이닝은 3이닝, 6회까지 유현이 기록한 투구 수는 고작 71에 불과한 상황.
120구까지 투구해도 된다는 건, 유현의 페이스를 감안했을 때 마지막 이닝까지 책임져도 된다는 뜻이었다.
지난 세 경기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유현의 투구 수를 100구 내외로 관리했다.
대부분의 투수들에게 하는 통상적인 투구 수를 유현에게도 요구했고, 그때마다 유현은 팀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투구 수를 기록해도 상관없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세 경기를 지켜본 결과.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확신을 가졌다.
유현이라면 투구 수를 조금 더 늘려도 된다고, 투구 수를 조금 더 늘리더라도 그의 체력이라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드디어 봉인 해제로군!
-유현 씨라면 120구도 거뜬한데 100구 내외로 투구 수 관리를 하는 건 아깝죠.
-맞아요, 스칼렛. 제 축복 덕분에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는 데다, 기본적으로 관리마저 철저한 녀석이니까요.
-그럼 오늘은 완봉승 하는 건가요?
경기를 마지막까지 책임져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상황에서, 유현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땅의 정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은 이닝에 삼진을 몇 개 더 잡으면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날 그라운드 볼러가 아니라 KKK 머신이라고 인식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