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5화 (105/155)

105화 거기서 거기 (1)

투수들이 잘 던지고, 타자들이 잘 치고.

흔히 말하는 투타의 조화가 콜로라도 로키스의 16연승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물론 매 경기 그런 건 아니었다.

투수가 잘 던지는 경기에서 타자들이 부진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승리에 필요한 점수만큼은 어떻게든지 뽑아 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투수들이 실점을 많이 내주는 날에는 귀신같이 타선이 폭발해 대량 득점을 안겨 주며 연승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연승의 이유는 명확했다.

부족한 타격 지표를 압도적인 투수력으로 보완한 덕분이었다.

16연승 기간 동안 콜로라도 로키스의 팀 타율은 메이저리그 전체 24위였다. 압도적인 투수력이 아니었다면 16연승이 불가능했다고 봐야 했다.

구장의 영향으로 타격의 팀이었던 콜로라도 로키스가 이렇게 투수의 팀으로 변모한 건, 결국 투수력이 부족하면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수준급 투수를 여럿 데려왔지만 그들 중 쿠어스 필드에 제대로 적응한 투수는 없었다. 잠깐 좋은 모습을 보여 주다가도 부진했고, 대다수들의 투수들은 쿠어스 필드에 끝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몇 년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

콜로라도 로키스 수뇌부는 생각을 바꿨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투수를 평가할 게 아니라, 철저하게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는 걸 기준에 놓고 판단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몇 년이 더 걸렸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마침내 그럴듯한 선발 로테이션을 만들었고, 접전 상황에서 믿고 내보낼 수 있는 필승조 또한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기에 유현의 영입이 쐐기를 박았다.

카일 프래랜드-유현-존 그레이 선발 라인업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전력을 한층 상승시켜 줬다.

2019시즌 쿠어스 필드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여 주며 사이영 상 투표 2위와 4위에 랭크됐던 두 투수 사이에, 2년 연속 KBO리그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와 MVP를 쟁취한 투수가 자리 잡았다.

시너지는 프런트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1~3선발, 상대 팀에게 위압감을 주는 라인업이 완성됐다.

게다가 유현은 타석에서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모습을 보여 줬다.

땅볼을 치고도 전력 질주하며 내야 안타를 더러 만들어 냈다. 출루만 했다 하면 리드 폭을 넓게 잡은 채 상대 배터리의 신경을 교란시켰다.

고산지대는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하고 고작 3분 만에 마운드에 올라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이닝을 틀어막기까지 한 투수다.

체력 안배?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듯이 유현은 매 경기 최선을 다했고, 투타 모두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즌 두 번째와 세 번째 등판에서도 유현은 2번 타자로 출장했고, 두 경기 모두 내야 안타를 포함해 멀티 히트를 기록했고, 거기에 도루 두 개를 추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유현은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다.

자신을 모든 걸 토해 내듯이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했고, 이는 곧 팬들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빠르게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3경기에 등판해 22이닝 무실점.

타석에서는 6안타 3타점 3득점 4도루.

이는 곧 타자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승리에 필요한 득점을 만들어 냈다.

-17연승 가즈아!!!

‘어째 스칼렛보다 네가 더 좋아하는 거 같다?’

-스칼렛 씨의 기쁨이 곧 내 기쁨이니까.

‘어련하시겠어.’

-이 기세면 최다 연승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겠어.

‘흐음. 가능하려나. 너도 알다시피 야구는 워낙 변수가 많은 스포츠잖아.’

-한 번 기세를 탄 팀은 웬만해서는 막기 어려우니까. 게다가 시즌 초라 선수들의 컨디션이 대체로 좋은 편이기도 하고. 운만 어느 정도 따라준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

연습이 시작될 때만 해도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대기록이었다. 잘해야 5~6연승 정도 하다가 패배할 거라 생각하는 게 보통이니까.

하지만.

운 좋게 이기고, 쥐어짜서 이기고, 쉽게 이기고, 상대가 실책해 줘서 이기고, 온갖 방법으로 이기다 보니 어느새 16연승을 했다.

그리고 17연승을 위해 유현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원정 3연정의 첫 선발로 등판한다.

유현은 좋은 투구를 할 자신이 있었다.

홈에서 두 경기, 원정에서 한 경기.

앞선 세 번의 등판에서 모두 무실점 호투를 했지만 차이는 있었다. 홈에서와 달리 원정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사율과 결정구 사용 빈도가 확실하게 높아졌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의 제구와 무브먼트에 문제가 생기지만 원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문제가 없는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은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이상으로 강력한 무기다.

실제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던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했고, 7회까지 탈삼진 13개를 수확하며 무실점 피칭을 선보였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철저한 그라운드 볼러이지만 원정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투수 친화형 구장인 AT&T 파크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선이 제대로 맛이 가기도 했고.’

-어째 타선만 문제라는 말로 들린다.

‘투타 모두 문제지만 타선은 특히 심각하잖아.’

-심각한 수준이라는 말로 부족하지 않으려나. 답도 없다고 봐야지.

개막 후 16경기에서 콜로라도 로키스가 전승 가도를 달리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3승 13패에 그치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시즌 중후반 반등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기력과 전력을 놓고 봤을 때는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부진한 선발진, 승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필승조, 플라이볼 혁명에서 도태됐지만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한 타선까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긍정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일찌감치 시즌을 포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겠는가.

덕분에 땅의 정령 둘은 확신했다.

메이저리그 연습 기록까진 몰라도, 최소한 유현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17연승까지는 기록을 늘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 * *

사실 유현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만 하더라도 어울리지 않게 제법 긴장을 했었다.

더블A에서 트리플A 수준이라는 KBO리그를 초토화시키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형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괴물들이 모인 리그 아니던가.

긴장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시범경기 때도, 개막전 때도 유현은 어느 정도 긴장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세 차례 등판을 하고 호투하면서 유현은 한 가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KBO리그나 메이저리그나 거기서 거기라는 걸.

리그의 수준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유현의 기량이 KBO리그는 물론이거니와 메이저리그의 괴물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 뛰어날 뿐이었다.

주의할 건 한 가지였다.

좀 더 신중하게 투구할 것.

실투만 줄인다면, 원하는 코스에 확실하게 제구할 수만 있다면 KBO리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사이영 상을 노려볼 수 있을 만큼 좋은 투구를 꾸준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봉식과 스칼렛의 말은 그런 유현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 줬다.

-지난 세 번의 등판을 통해 깨달았겠지만 네 공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확실하게 통해. 쿠어스 필드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을 신중하게 던지고, 제구에 좀 더 집중해. 투수 친화형 구장에서는…… 너 꼴리는 대로 던져도 돼. 그래도 웬만하면 이겨.

-확실히 당신의 공은 뛰어납니다. 구속 차가 거의 없는 패스트볼 3종 세트로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까지 던지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합니다. 투수 친화형 구장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을 정확히 제구할 수만 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갈 정도입니다. 거기에 봉식 씨가 말하기로는 비장의 무기까지 있다고 하던데요.

-아직은 쓸 때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정밀 분석이 들어간 이후에 써야겠죠. 5월 이후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로키스에 이런 투수가 오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몸값 못하는 투수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치가 떨렸는지 모릅니다.

땅의 정령들은 모두 그런 걸까, 아니면 이 둘이 특이한 걸까?

스칼렛은 봉식과 마찬가지로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다. 모르는 게 거의 없을 정도였고, 가끔가다가 봉식처럼 유현에게 진지한 조언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유현이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한 걸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드디어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려볼 수 있다고 말이다.

와일드카드 진출 5회, 지구 우승 1회, 그중 한 번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두 번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셨다.

고무적인 건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한 게 최근 두 시즌이라는 거였다.

시즌을 치를수록 전력이 좋아지고 있다.

이번 시즌 전력 보강은 유현이 전부이긴 하지만, 5월이 되면 시위라도 하듯 마이너리그에서 나란히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 괴물 신예들이 콜업이 될 예정이다.

애초에 투수진은 탄탄하다.

침체된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신예들의 활약이 더해진다면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려보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현은 그 중심에 있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팀들이 늘어날 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분석한다고 쉽게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살아남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메이저리그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써먹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20승 정도 하면 내셔널리그 1위에 도움이 좀 되려나?’

-20승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누가 보면 개나 소나 다 20승 하는 줄 알겠다.’

-넌 개도 소도 아니잖아. 이 몸이 가르쳐 줬으면 20승 정도는 가뿐해야 해야지!

‘말이야 쉽지. 뭐…… 이제 좀 자신감이 붙어서 네 말대로 20승 정도는 정말로 가뿐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경기를 준비하는 내내 유현은 여유가 넘쳤다.

더 이상은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세계 최고들과 경쟁한다는 것에 긴장하지 않았다. 그 어떤 선수와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팡! 팡! 팡!

“나이스 피칭! 오늘 공 아주 죽여요!”

“오늘은 공격적으로 가 보자.”

“누가 보면 지금껏 공격적으로 안 던진 줄 알겠는데요?”

“평소보다 더 공격적으로 하자는 거지. 타자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말이야. 인터벌도 조금 더 짧게 가져갈 거야.”

“흐흐흐. 재밌겠네요. 안 그래도 인터벌이 짧은데 거기에 극단적인 공격적 피칭이면 타자들이 제대로 정신 못 차릴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사실을 증명하듯 유현의 공은 좋았다.

쿠어스 필드에서와 달리 포심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가 확실히 살아 있었다. 99마일을 기록한 적도 있는 쿠어스 필드에서보단 구속이 느리겠지만, 수직 무브먼트가 살아 있고 제구가 더 안정적인 원정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원정에서는 유현이 원하는 스타일로 피칭을 하는 게 가능했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의식적으로 제구에 신경 쓰며 땅볼 유도를 주 무기로 삼아야 한다. 삼진은 간간이 허를 찌르는 정도로만 그쳐야지, 작정하고 삼진을 잡으려 했다가는 언제 큰 거 한 방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원정 경기는 다르다.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도 괜찮다.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살아 있는 이상 어떤 스타일로 피칭해도 타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1회 말.

연습 투구를 끝낸 유현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두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마크 번칠의 사인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그 순간.

스칼렛과 함께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탄 땅의 정령이 정수리를 꾹국 누르며 물어보았다.

-오늘의 목표는?

‘알면서 왜 물어? 오랜만에 작정하고 타자들 선풍기 돌리게 만들어 줘야지.’

-재밌겠네. 이런 경기는 투수의 머리 위에서 직관해 줘야 제맛이지.

작정하고 삼진을 잡는 것.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7이닝 13탈삼진 무실점 호투를 하면서도 얼핏 보여 주긴 했지만, 이번에는 보다 확실하게 작정하고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신을 그라운드 볼러라고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칠 거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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