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4화 (104/155)

104화 맞대결 (4)

-어느 누구도 덴버의 투수들에게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번트를 대고 전력질주를 하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 빌어먹을 고산지대에서는 타석에서 쓸데없이 힘을 빼느니 마운드에서 1구라도 더 던지는 게 팀을 위한 행동이라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죠.

-네. 다른 구장이라면 모를까 이곳 쿠어스 필드에서는 투수가 타석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가 아웃을 당하거나, 번트를 대고 느긋하게 1루 베이스까지 산책을 하는 게 팀을 위한 행동입니다. 선수들도 팬들도, 투수가 괜히 타석에서 힘을 빼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지난 두 시즌 동안 KBO리그를 제패했던 젊은 투수는 다릅니다. 출루 이후 리드 폭을 넓게 잡고 상대 배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틈이 보인다 싶으면 과감하게 도루를 시도합니다. 상대의 실책을 틈타 2루타를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제가 캐스터를 그만두기 전에 투수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타자였다면 시즌 100도루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빠른 발입니다.

-그만두기는 뭘 그만둡니까.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 우승할 때까지 계속해야죠.

-하하하. 네. 부디 제가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기 전에 로키스가 정상에 서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미국 현지 중계진은 유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운드 위에서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호투한 건 물론이고, 빠른 발을 이용해 팀의 승리에 필요한 귀중한 2득점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 한 번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었다.

투수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만들어 내는 진기한 기록이 나옴과 동시에 콜로라도 로키스가 확실하게 승기를 잡았다.

유현이 6회까지 기록한 투구 수는 81구였다.

KBO리그에서처럼 완벽한 투구 수 관리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효율적인 관리를 했고, 최소 7회까지는 마운드에 오르는 게 가능했다.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스코어는 0대3.

유현이 7회까지만 버텨 준다면 승리할 수 있다 확신했고, 만약을 대비해 필승조를 준비시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리고 유현은······.

“미친 거 아냐! 투수가 타격까지 잘하면 우린 뭐 먹고 살라는 건데!”

“저 자식 달리는 거 봤어? 난 무슨 우사인 볼트가 야구하는 줄 알았잖아!”

“이렇게 된 이상 도루 1위 가즈아!”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들에게 통상적으로 하는 무관심 세레모니 이후, 선수들에게 신나게 머리를 두들겨 맞고 있었다.

유현보다 다른 선수들이 더 신이 난 게 보였다.

투수가 타격을 잘하는 경우는 있지만 빠른 발을 자랑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유현처럼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불가능이 현실로 일어났다.

심지어 개막 3연전 두 번째 경기에서 말이다.

개막 3연전은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지난 2년간 지구 1위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 LA다저스와의 맞대결이니만큼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다.

다저스타디움에서는 LA다저스가, 쿠어스 필드에서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강세였다.

홈에서 압승한 뒤 원정에서 1승이라도 더 쥐어짜며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해 지구 1위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게 콜로라도 로키스의 목표였다.

문제가 있다면 개막전이긴 해도 타자들의 타격 컨디션이 영 별로라는 거였는데······.

그걸 유현이 해결해 줬다.

빠른 발로 만들어 낸 두 번의 득점, 투지가 느껴지는 플레이는 타자들에게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최고의 행동이었다.

-미쳤다! 넌 진짜 미친놈이다!

-빠른 발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놀랍군요. 봉씩 씨의 축복이 없더라도 체력도 수준급이고······. 당신에 대한 평가를 정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스칼렛. 제 말이 맞는 것 같죠?

-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최고의 플레이였다! 오늘 네가 보여 준 간절함이 팀의 분위기를 바꿀 거다! 가서 LA다저스 다 때려 부수고 와라! 끝나고 나서 죽이는 선물을 하나 줄 테니까!

봉식은 이례적으로 유현의 플레이에 감탄했는지 소리를 질러대며 환호했다.

스칼렛 또한 내심 놀란 눈치였다.

하긴, 투수가 쿠어스 필드에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걸 어디서 또 보겠는가.

사실 유현이 기록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은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원래라면 우익수가 손쉽게 처리했어야 할 타구가 쿠어스 필드이다 보니 생각보다 멀리 뻗어 나갔고, 우익수의 다이빙 캐치가 아슬아슬하게 실패하며 타구가 튀고 말았다.

하지만.

유현의 공격적인 베이스 러닝과 적절한 판단, 그리고 빠른 발이 있었기에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만들 수 있었다.

유현은 호흡을 고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투수로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한 것보다도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는 게, 첫 홈 등판에서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관중들로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환호성이 좋았다.

유현이 자신의 투구 수를 확인했다.

투수코치는 실점 위기에 몰리거나 투구 수가 100구가 넘어가면 투수 교체를 할 거라 했고, 유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쿠어스 필드에서 3점 차이는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점수 차이다.

추가 득점이 없다면 실점 위기에 몰리는 순간 교체하는 게 당연하고, 추가 득점이 있다 하더라도 시즌 첫 등판이니만큼 100구 이상은 던지지 않는 게 합당했다.

‘일단 책임질 수 있는 데까지는 책임져 보자고.’

* * *

99구를 투구해서 7과 3분의 2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7탈삼진 무실점.

안타를 많이 허용하긴 했지만 투심 패스트볼을 통한 기가 막힌 위기관리가 돋보였고, 6회에는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으며 땅볼 유도만 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줬다.

이닝 소화도 좋았고 팀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네 개.

유현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동료들에게 남은 경기를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8회 초 2아웃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건 2019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의 마무리투수로 자리 잡은 오수완이었다.

오수완은 15구를 투구해 1과 3분의 1이닝을 깔끔하게 책임지고서 팀의 0대3 승리를 이끌었다.

승리투수 유현, 패전투수 여환진, 세이브 오수완.

시즌 첫 등판에서 첫 승을 수확한 유현은 기분 좋게 언론들과의 인터뷰에 임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영어로 질의응답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유현 선수, 시즌 첫 승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6회 말에 발생했던 상황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세상에. 투수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쿠어스 필드에서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고 있습니까?”

“네. 여러분이 메이저리그 역사를 샅샅이 뒤져 제가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을 해냈는지 알려 줄 거 같긴 하네요.”

“홈에서 확실히 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까?”

“네. 우익수가 다이빙 캐치를 하는 순간 살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결과는 다들 보셨다시피 제가 해냈고요.”

“코칭스태프로부터 그린 라이트를 부여받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다음 경기에서도 2번 타자로 출장할 것 같습니까?”

“그건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결정하실 문제지 제가 고민할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전 어느 타순에서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타자로서 목표가 있습니까?”

“홈런은 오늘 하나 쳤으니 끝난 거 같고, 도루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투수 중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워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기자들은 유현에게 투수가 아닌 타자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만큼 유현이 6회 말에 보여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은 임팩트가 컸다.

유현은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론에서 자신의 투구가 아니라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에 집중하면 할수록, 상대 팀들이 자신을 분석하는 시간이 늦어질 것이다.

그럼 그만큼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 시기 또한 늦출 수 있다.

메이저리그 생존을 위해 준비한 무기이지만, 이왕이면 늦게 공개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경기가 끝난 뒤.

알리사 메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봉식이 유현의 머리 위에 올라타며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약속한 선물을 받은 시간이다.

‘맞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친 기념으로 죽이는 선물 준다고 했지. 뭐 줄 건데?’

-네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줄 것이다.

[위대한 땅의 정령님께서 당신의 열정에 감동받아 최고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12시간 동안 스태미나가 2배로 상승합니다.]

“······.”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이 황당한 선물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봉식이 유현의 머리 위에서 내려오며 조수석에 앉아 있는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난 오늘 스칼렛 씨와 함께 저녁을 보낼 거다. 좋은 밤 보내라고 주는 선물이다.

“음. 그래. 죽이는 선물이긴 하네.”

-난 아들보다 딸이 좋더라.

그날 밤.

유현은 늦은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 * *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열광했다.

투수 한 명이 보여 준 정신 나간 허슬 플레이에, 환상적인 퍼포먼스에 환호했다.

하지만 흥분은 잠시였다.

경기가 끝난 뒤 냉정함을 되찾은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지금도 기사가 쏟아지고 있는 퍼포먼스가 아닌 그 투수가 보여 준 등판 내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7과 3분의 2이닝 무실점.

최고의 호투를 했지만 투수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다는 임팩트가 워낙 크다 보니 비교적 관심을 덜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 언론도 비교적 조용했다.

허구한 날 유현이 밥 먹듯이 완봉승을 하는 걸 보다 보니 7과 3분의 2이닝은 비교적 못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있지만, 대한민국 또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의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그나마 빨리 벗어난 콜로라도 로키스의 코어 팬들은 진지하게 팀의 2020시즌 성적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카일 프리랜드․유현․존 그레이 조합이면 우리도 월드 시리즈 우승할 수 있다.

-근데 타격은 좀 심각하더라.

-타격이 좀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당장 쓸 돈이 없으니까. 트레이드 마감 전에 데려올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은 클린업 트리오를 믿을 수밖에. 마크 번칠도 1차전에서 보니까 나쁘지 않아 보였고.

-젠장. 근데 그 네 명 빼고는 다들 심각하잖아. 타자 친화형 구장에서 타격 지표가 최하위권인 게 말이 되는 거냐고.

-트리플A 박살 낸 괴물들은 도대체 언제 올라오는 거야?

-5월 초에 올라올 거라고 하던데. 서비스 타임 때문에 바로 올리지 않을 분위기야. 전에도 그런 적 있었잖아.

-5월 전에 반타작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홈에서 이 정도면 원정에서는 타격이 바닥을 칠거야. 젠장. 투수들이 잘해 주고 클린업 트리오가 홈런을 치길 바라야 하는 건가?

-그게 최선이지.

-제발 올해는 좀 쉽게 지구 우승하게 해주세요. 2년 연속 피 말려서 머리가 다 빠졌어.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진지하게 말했다.

투수진 보강은 잘 됐으니 이제 타격만 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타격만 조금 더 좋아지면 정말로 월드 시리즈 우승도 노려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관건은 4월 성적이다.

구단에서는 트리플A를 초토화시킨 괴물 신예 둘을 5월 초에 콜업할 거라 예고했다.

그들이 올라오면 기회가 주어질 거고, 적응을 잘할 수 있다면 타격에서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높다.

4월만 잘 버텨 낼 수 있다면 5월 이후 좋은 성적을 기대해 볼 법했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화제의 중심에 섰다.

2020시즌 초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16승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전체 승률 1위를 내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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