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맞대결 (3)
여환진을 잘 아는 이들은 말한다.
여환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전 펠컨스 암흑기의 에이스로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멘탈을 강화한 덕분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여환진의 멘탈은 수준급이었다.
한 차례 수술 이후 구속이 떨어지며 더 이상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없게 됐음에도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다. 2019시즌에는 16승 5패 방어율 2.85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데뷔 후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위기에 몰리더라도 원하는 코스에 원하는 구종을 정교하게 투구할 수 있는 강인한 멘탈의 영항이 컸다.
실제로 여환진은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은 1회에 실점을 한 이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귀신같이 안정감을 되찾는 패턴이 꽤나 자주 보이곤 했다.
이날 경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1회 초.
유현의 과감한 베이스러닝으로 인한 실점과 놀란 아레나도에게 피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여환진을 끝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놀란 아레나도에게 피홈런을 허용한 이후 10타자 연속 범타를 유도하며 4회까지 투구 수 71개로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투심 패스트볼, 커터,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를 적절하게 섞어 던졌다. 구위보다는 제구와 수싸움을 앞세워 타자들과의 승부에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였다.
봉식과 스칼렛은 유현의 머리 위에서 신나게 떠들다가 더그아웃으로 이동해서 경기를 구경했다. 선수들을 위해 준비된 해바라기 씨를 몰래 훔쳐 먹으며 관중 모드로 경기를 즐겼다.
그 와중에 스칼렛의 표정은 심각했다.
1회 말의 좋았던 분위기와 달리 이후로는 줄곧 여환진을 공략하지 못하자 경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환진의 공이 좋네요. 놀란 아레나도에게 홈런을 허용한 공을 제외하면 실투가 없어요. 오늘 경기 힘들 수도 있겠어요.
-확실히 잘 던지기는 하네요.
-봉식 씨는 걱정 안 돼요? 이 분위기면 역전 당할 가능성이 높은데.
-뭐······ 다른 투수였다면 걱정했겠지만 저 녀석이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2득점이면 충분하거든요. 여환진이 괴물이긴 한데, 저 녀석은 그보다 더 미친놈이거든요.
-흐음. 봉식 씨 말대로 되면 좋겠네요. 다저스만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면 이번 시즌도 지구 1위를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녀석이 스칼렛 씨의 소원을 이뤄 줄 테니까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스칼렛과 달리 봉식은 여유가 넘겼다.
대만 2군 캠프에서 만난 이후 근 2년.
봉식은 유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걸 가르쳐 줬다. 입 야구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그가, 지식을 현실화해 줄 피지컬을 지닌 유현을 성장시켰다.
쿠어스 필드?
힘들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호투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유현과 땅의 정령의 행보는 쿠어스 필드에서의 해답을 찾기 위한 거였으니까.
이 자신감은 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5회 초.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며 유현은 투수코치에게 슬쩍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늘 저희가 이길 거 같아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환진의 쿠어스 필드 성적이 썩 좋진 않아서 쉽게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보다 공이 좋아.”
“애초에 쿠어스 필드에서 성적이 좋은 투수를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홈으로 쓰는 우리들도 어려운데, 가끔씩 원정 오는 선수들은 오죽하겠어.”
“그쵸. 오늘 환진 선배가 잘 던지기는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더 잘 던지니까요.”
여환진이 1회 말 2실점 이후 10타자 연속 범타를 처리한 건 사실이지만, 유현이 부족한 피칭을 보여 준 건 아니었다.
4이닝 4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매 이닝 출루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병살타를 유도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LA다저스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지저분한 무브먼트를 보여 주는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만약 유현이 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했더라면 어떻게든지 공략해 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마구가 아닌 한, 눈에 익으면 공략이 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유현은 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하면서도 커터보다 더 낮은 사용 비율을 보여 줬다.
거기에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로 적절하게 사용하며 상대 타자의 성향에 따른 맞춤형 볼 배합으로 승부를 봤다.
4회까지 도합 52구.
매 이닝 안타를 허용하면서도 실점 없이 투구 수 관리까지 하는 완벽한 피칭을 보여 줬다.
-아무래도 유현 선수는 메이저리그에 제대로 적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스프링 트레이닝만 하더라도 유현 선수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지난 시범 경기 등판에서도 1경기뿐이긴 했지만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비중이 80퍼센트가 넘었죠.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로 삼진을 잡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과는 볼 배합이 사뭇 다르군요.
-맞습니다. 오늘은 커터가 40퍼센트, 투심 패스트볼이 20퍼센트,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도 20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투구하고 있습니다. 커터를 제외하면 다른 구종들의 구사 비율은 비슷하게 가져가고 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비중을 늘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계산이 끝난 거죠. 설사 실점 위기에 몰리더라도 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구사, 땅볼을 유도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해설위원의 말이 맞았다.
지난 경기에서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비중을 늘려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포심 패스트볼의 제구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보여 주는 구종으로 못 쓸 정도는 아니었고, 스플리터는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는 게 예술이었다.
커터 위주로 땅볼을 유도하며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적절하게 섞어 던지고, 주요 승부처에서는 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하는 볼 배합은 LA다저스 타자들에게 제대로 먹혔다.
여환진은 분명 좋은 투수였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통산 방어율 5.71을 기록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긴 했지만, 사실 겉보기와 달리 특별히 나쁜 기록은 아니었다.
LA다저스의 상징 클레이튼 커쇼도 쿠어스 필드에서의 통산 방어율이 5점대이며, 사이영 상을 수상한 상당수의 투수들도 쿠어스 필드만 오면 고전을 면치 못하곤 했으니까.
여환진도 다른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쿠어스 필드에서의 등판을 힘겨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오늘은 그동안 쿠어스 필드에서 보여 준 부진을 만회하고 호투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유현 또한 좋은 투수라는 거였다.
시범경기에서 한 번 등판을 해보고 쿠어스 필드에서의 적응을 끝마친 유현은 확신했다.
제구에 신경 쓴다는 느낌으로 투구한다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KBO리그에서처럼 하던 것처럼 하되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신중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어도 시즌 첫 등판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6회 초.
유현이 첫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 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것도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말이다.
바깥쪽으로 꽉 차는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루킹 삼진, 몸쪽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스플리터로 루킹 삼진, 몸쪽 높은 코스로 하이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헛스윙 삼진까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고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순간, 유현은 LA다저스 선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안 맞아서 다행이야.’
6회 초에 갑자기 피칭 스타일을 변경한 건 일종의 승부수였다.
시종일관 땅볼 유도만 하다가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면 타자들이 혼란스러워할 테고, 그만큼 자신은 편하게 투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KBO리그에서 뛸 때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경기 중에 피칭 스타일의 변화를 줬고, 그때마다 톡톡히 효과를 봤다.
메이저리그라고 해서 다를 건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달랐다면 5회까지 매 이닝 출루를 허용하면서 병살타를 다섯 차례나 유도하지도 못하지 않았겠는가.
메이저리그가 수준이 높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유현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모인 리그에서도 통하기에 충분한 기량을 지닌 선수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유현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승부수를 제대로 적응시켰다.
[와아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홈 팬들은 유현의 환상적인 피칭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유현은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가볍게 손을 흔드는 걸로 팬들을 향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이어진 6회 말 2아웃 상황.
두 번째 타선에서는 6구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면서 물러났던 유현이 다시 타석에 섰다.
유현이 14타자 연속 범타로 처리하며 안정감을 되찾은 상황에서 맞이한 세 번째 대결, 유현은 타석에 들어서며 고민에 빠졌다.
‘볼 카운트가 몰리면 체인지업 때문에 내가 불리해. 결국에는 적극적인 승부를 하는 게 최선인데, 문제는 환진 선배도 그걸 알 거라는 거야. 흐음······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해.’
유현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스윙하며 득점의 물꼬를 틀 생각을 했다. 설사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여환진의 공은 좋았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모든 타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유현의 발과 놀란 아레나도의 장타력으로 만들어 낸 2득점 이후로는 안타조차 없을 정도였다.
즉, 팀이 만들어 낸 2득점 중 절반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밥값은 충분히 했다는 게 유현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투수로서 호투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긴 고민 따윈 필요 없었다. 딱 한 가지 구종만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스윙하기로 했다.
만약 그러다가 수가 들통나면?
다른 구종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삼진을 당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말이다.
유현이 초구부터 거침없이 풀스윙을 했다.
그가 노린 구종은 여환진의 전매특허인 체인지업이었고, 여환진은 유현이 예상한 대로 초구에 체인지업을 던졌다.
딱!
그리고 유현은 몸쪽 낮은 코스로 들어온 체인지업을 놓치지 않고 타구를 퍼 올렸다.
타구가 우익수 방면으로 쭉쭉 날아갔다.
다저스타디움이었다면 외야 플라이로 잡혔을 테지만, 문제는 현재 여환진이 투구하고 있는 구장이 쿠어스 필드라는 거였다.
공기 저항이 적어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는데, 심지어 구장까지 넓어서 외야수들이 수비하기 어려워하는 투수들의 무덤 말이다.
예상보다 더 뻗어 나간 타구에 우익수는 당황했다. 전력 질주를 했지만 타구가 생각보다 빨라서 거리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타구가 거의 추락할 즈음, 우익수는 어렵사리 타구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서서 잡기에는 거리가 살짝 부족했다.
결국 우익수가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다이빙 캐치로 타구를 잡아낼 생각이었지만······.
-다이빙 캐치!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지만······ 공이 글러브를 맞고 뒤로 튀고 말았습니다!
-백업을 온 중견수가 다급히 송구를 시도해 보지만······ 그사이 유현 선수는 3루를 돌아 홈 베이스를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총알 같은 송구! 홈에서 접전이 예상됩니다!
우익수의 글러브에 맞은 타구가 뒤로 빠지고 말았다. 동시에 중견수가 백업을 하는 걸 확인한 유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감하게 내달렸다.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홈에서 살 수 있다면, 상대 야수의 수비 실책으로 인해 2루타나 3루타가 아닌 빠른 발을 이용해 홈런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뛰어! 뛰어! 죽어라 뛰어! 숨이 막혀 죽을 거 같아도 뛰어! 안 죽으니까 뛰어!
머릿속에서 죽어라 뛰라고 외치는 봉식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유현은 죽어라 뛰고 있었다.
2019시즌 대전 펠컨스 스프링캠프 참가를 위해 테스트를 할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빨리 뛰어본 게 언제일까 싶을 정도로, 이러다 나중에 육상선수를 해도 되겠다는 헛생각을 잠깐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베이스 러닝을 했다.
중견수의 총알 같은 송구가 포수의 미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유현은 1회 초에 이어 다시 한 번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이프!”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유현의 손이 홈 베이스에 닿는 게 태그보다 빨랐다.
포수가 비교적 정확한 송구를 받아 태그를 시도하려 했을 때, 유현은 이미 세이프 판정을 받고 더그아웃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으니까.
관중석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들이 유현을 무시하는 전통적인 세레모니를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아아!]
쿠어스 필드가 들썩였다.
메이저리그 데뷔 무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유현은 팬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