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맞대결 (1)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은 시범경기 첫 등판에서 코칭스태프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5이닝 1실점.
2루타에 이은 빗맞은 안타로 1실점을 허용한 걸 제외하면 시종일관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땅볼 유도를 한 게 주효했다.
그렇다고 마냥 땅볼 유도만 한 건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던져 삼진을 유도했다. 5이닝 동안 삼진은 고작 네 개 뿐이었지만, 타자들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에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기엔 충분했다.
KBO리그에서 활동할 때부터 유현은 타자의 허를 찌르는 피칭을 즐겨 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중간중간 허를 찌르며 타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 잊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첫 등판만 놓고 본다면 기존의 피칭 스타일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언론에서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유현 영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팬들은 유현의 투구 내용보단 타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유현 공 봤음? 대놓고 투심 패스트볼이랑 커터만 던져도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을 못하던데.]
[투구는 솔직히 눈에 안 들어왔음. 크보 씹어 먹었을 때 대충 예상했잖아. 그보다는 타석에서 기가 막히던데.]
[ㅇㅇ. 나도 타석에서 더 인상 깊더라.]
[2안타 3타점 1득점 2도루 실화냐.]
[ㄹㅇ 야잘잘인 듯. 올스타전 때 맛보기로 보여주긴 했지만 설마 첫 시범경기부터 이렇게 잘 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냐.]
[유현: 2020시즌 목표는 도루왕.]
[안타를 잘 치는 투수는 많지 봤지만, 유현처럼 적극적으로 도루하는 투수는 보기 힘들지. 심지어 홈구장이 쿠어스 필드임.]
[다른 투수들은 체력 관리 때문에 스윙도 제대로 안 하던데, 유현은 한 경기에 도루를 두 개나 해버림. 그래놓고 숨도 거의 안 찬 거 같던데.]
[근데 저려면 체력이 남아나려나 모르겠네.]
[체력 신경 쓰는 투수가 한 시즌 261이닝을 투구할 리가 없지. 이러다가 포스트시즌 포함 300이닝 찍는 거 아니냐.]
[유현이라면 가능함.]
코칭스태프는 유현이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하고 리드 폭을 넓게 잡은 채 도루 시도를 하며 상대 배터리를 흔드는 걸 긍정적으로 봤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2019시즌 클린업 트리오를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타격 지표를 보여 줬다. 그리고 아직까진 그에 대한 뾰족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여차하면 직접 타점을 올릴 수도 있고 상위 타선에 밥상을 차려 주는 게 가능한 투수를 싫어할 팀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홈구장이 고산지대에 있다는 것 또한 유현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으니까.
물론 영원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내려준 축복은 3년짜리였고, 2020시즌이 그 마지막 해다.
2021시즌부터는 땅의 정령의 축복이 사라지고, 순수하게 유현의 능력만으로 체력 관리와 부상 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야. 근데 네가 준 축복은 올해가 끝이야? 더 이상 연장 안 돼?”
-사이영 상 받으면 연장시켜 주지. 근데 이제는 내 축복이 없어도 이젠 딱히 문제없잖아.
“예상 못한 부상이 아니라면 컨디션 관리야 문제없지. 근데 심리적인 안정감이 다르단 말이야. 있는 게 없어지면 좀 그럴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축복이 없으면 타격도 제대로 못 할 거고.”
-확실히 타격은 좀 그렇지. 굳이 남아도는 체력을 갉아먹을 필욘 없으니까.
“축복이 있으면 신경 안 써도 되는 문제잖아.”
-흐음. 뭐, 좋다. 성적만 확실하게 내라. 그럼 네가 은퇴할 때까지 축복을 내려주마.
“조금만 기다려라.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가져다 줄 테니까.”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유현은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컨디션을 관리했다. 2018시즌 유현이 보여 준 괴물 같은 행보는 땅의 정령의 축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좋은 공을 던지는 건 여전했겠지만 체력 관리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테니까.
하지만 2019시즌은 달랐다.
땅의 정령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루틴과 철저한 체력 관리를 통해서 체력적으로 좋아진 모습을 보였고, 결국 땅의 정령으로부터 자신의 축복이 없더라도 체력 관리만큼은 확실하게 해낼 거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덴버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다.
다만 땅의 정령의 축복이 없다면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하고, 상대 배터리의 허를 찌르는 도루 시도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축복 없이 그랬다가는 체력이 쭉쭉 떨어질 테고, 체력 저하가 투구에 영향을 미치고 부상 발생 확률 또한 높이고 말 테니까.
그때.
유현과 땅의 정령의 말을 듣고 있던 암컷 땅의 정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축복은 당신이 콜로라도 로키스를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 유효합니다.
“축복 때문에라도 쉽게 못 떠나겠네.”
-당신이 계속 남아 있다면 커다란 전력 상승 요인이 될 거라고 봅니다만, 현실적으로 계속 남아 있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다음 계약 때 치솟을 몸값을 감당하기엔 로키스는 돈이 남아도는 팀이 아니니까요.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일단은 너희들의 축복을 받아서 로키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만을 목표로 달릴 테니까.”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유현은 암컷 땅의 정령으로부터 자신의 등판 경기에서 동료 야수들의 수비 집중력과 호수비 확률을 상승시켜 주는 축복을 받았다.
좋으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축복이었다.
유현이 생각하고 있던 최고의 축복은 구장의 영향과 상관없이 베스트 컨디션일 때의 공을 던질 수 있게 해 주는 거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보다 쉽게 타자들과 승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그러면 너무 쉬울 것 같았다.
콜로라도 로키스를 선택한 건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쿠어스 필드 소속으로 최초의 사이영 상을 받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장의 영향이 사라진다?
굳이 콜로라도 로키스를 선택한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수비 집중력과 호수비 확률 상승은 충분히 의미 있는 축복이었다.
유현은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철저하게 그라운드 볼러가 될 예정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료 야수들의 수비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수비 집중력과 호수비 확률이 올라간다는 건, 타구를 그만큼 안전하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니 나쁠 게 없었다.
-아. 그리고 제 이름은 스칼렛입니다. 앞으로는 스칼렛이라고 부르시길 바랍니다.
“그래. 잘 부탁할게, 스칼렛.”
-저녁 맛있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불화산 치킨이라는 것도 먹어 보고 싶군요.
“부모님이 개막전에 맞춰서 덴버로 오실 건데, 그때 몇 마리 가져다달라고 부탁해볼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정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가시죠, 봉식 씨.
땅의 정령과 암컷 땅의 정령, 봉식과 스칼렛이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사라졌다.
동시에 유현은 알리사 메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까지 덴버에 있었지만,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뉴욕에 있는 메켄 코퍼레이션 본사로 향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며칠 후면 다시 돌아올 테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덴버를 떠날 일이 거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거였다.
직접 얼굴은 못 보지만 영상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유현은 만족스러웠다.
“보고 싶어요.”
-이상하다. 우리 어제 보지 않았어요? 제 기억으론 어제까지 덴버에 있었고, 자기랑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요.
“어젠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 시즌 시작하면 되도록 덴버 떠나지 마요. 홈에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알리사가 집에서 절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자길 위해서 요리도 해놓고요.
“알리사.”
-네, 자기.
“배탈만 안 나게 해줘요.”
유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뉴욕에서 머물 당시 음식을 만든 건지 연금술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던 알리사의 요리 실력이 조금은 나아졌기를.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혹시 봉식이나 스칼렛에게 상한 음식 먹고 배탈 안 나는 축복을 받을 수는 없을지에 대해 말이다.
* * *
콜로라도 로키스는 시범경기에서 정확히 5할 승률을 마크했다.
전력을 다하기보단 주요 선수들의 컨디션 체크, 그리고 로스터의 남은 몇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할 선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용도로 시범 경기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선발진의 중심을 잡아 줘야 한 존 그레이와 카일 프리랜드, 그리고 유현은 컨디션이 좋았다.
특히나 유현은 시범 경기에서 한 번 등판한 게 전부였지만 투타 모두에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며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선택한 게 오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존 그레이와 카일 프리랜드는 시범 경기에서 각각 2경기를 등판했고, 컨디션이 베스트가 아니었던 첫 번째 등판과 달리 두 번째 등판에서는 두 선수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지난해 필승조 중에서는 오수완만이 시범 경기에서 합격점을 받았고, 다른 투수들은 시범경기 막바지까지 컨디션을 조율해야 할 걸로 보였다.
아무래도 필승조들이 2018시즌과 2019시즌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보니 컨디션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늦게 올라오는 거지 부상이 있거나 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결국에는 시즌이 시작하고 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다만 문제는 타선이었다.
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는 메이저리그 최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좋았다.
문제는 다른 타자들이 영 애매했다.
지난해에도 타격 지표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올해는 시범 경기부터 단체로 멘도사 라인에 가입할 기세였다.
그나마 고무적이라면 주전 포수로 낙점된 마크 번칠이 시범경기에서 타율 3할 3푼 5리를 기록하며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는 거였다.
나머지 타자들의 부진은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의 고민을 깊게 만들었다.
팬들은 타선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끈한 타격의 팀이었던 로키스가 이제는 투수력에 의존해야 하는 팀이 된 게 안타까웠고, 타자들이 조금 더 분전하지 않으면 지구 1위를 차지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클린업 트리오와 마크 번칠을 제외한 타자들의 시범 경기 타율은 평균 2할 2푼 7리.
오죽하면 1루 수비를 포기하더라도 차라리 유현을 1루수로 내세우는 게 나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타격 지표가 영 별로임에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시범경기에서 5할 승률을 기록했다.
계산이 서는 투수진과 필요한 상황에서 확실하게 득점을 해 주는 클린업 트리오 덕분이었다.
불안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시범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시범경기가 끝났다는 건 162경기의 장기 레이스가 시작될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이 고민에 빠졌다.
LA다저스와 치를 홈 개막 3연전에서 어떤 투수를 기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존 그레이, 카일 프리랜드, 그리고 유현.
세 선수를 기용할 건 확실했지만 순서가 문제였다. 어떻게 순서를 짜야 최고의 조합이 될지에 대해 수없이 플랜을 짜고 또 짰다.
올스타 브레이크 때까지는 개막전 순서대로 선발 로테이션을 유지해야 하기에 고민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개막 이틀 전.
고민 끝에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카일 프리랜드-유현-존 그레이 순으로 개막전 선발 로테이션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LA다저스도 선발 로테이션을 발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이 난리가 났다.
LA다저스 VS 콜로라도 로키스.
쿠어스 필드에서 치러질 개막 3연전의 두 번째 경기에서, 여환진과 유현의 맞대결이 확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