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00화 (100/155)

100화 마지막 테스트 (3)

2회 초.

유현은 세 타자 모두에게 땅볼을 유도하며 또 다시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 냈다.

포심 패스트볼을 제외한 채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존 구석구석으로 찔러 넣은 게 주효했다.

다행히 포심 패스트볼과 달리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무브먼트는 나쁘지 않았다.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보다는 못해도 타자들과의 승부는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위주로 가죠.”

“그게 좋을 거 같아. 허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으면 과감하게 사인을 내줘.”

“물론이죠. 약점을 보이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물어뜯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이어진 2회 말.

타석에서 유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땅볼-안타-안타-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타자로서의 유현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안타를 치면 정말 좋겠지만 못 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 투수들은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지 않는다. 아예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다 삼진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워낙 고산지대이다 보니 투수들의 체력관리가 어려워, 타석에서 힘을 빼기보단 마운드에서 조금이라도 더 힘을 쥐어짜기 위한 행동이다.

물론 체력에 자신이 있는 몇몇 투수들은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기도 한다.

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구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에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며 큼지막한 파울 홈런을 만들었고, 동시에 쿠어스 필드의 1루 응원석을 가든 채운 팬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유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흐음. 이거 할 만할 거 같은데?’

-타이밍을 맞추는 데에만 집중해라.

‘체인지업만 잘 참아내면 괜찮을 거 같은데. 오늘 투수가 포심이 별로고, 좌타자 상대로 슬라이더를 안 던지는 스타일이니까.’

-가끔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지긴 하지만, 좌타자 상대로는 체인지업이 주 무기인 건 사실이지.

‘타자로서 먼저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보자고.’

유현은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팅 포인트를 최대한 뒤에 놓은 채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에만 스윙하고, 조금이라도 애매한다 싶으면 스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상대 투수의 제구가 썩 좋지 않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2구는 체인지업을 던져 볼, 3구는 다시 체인지업을 던져 볼, 4구는 몸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스트라이크, 5구로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체인지업이었다.

그리고 심판은 체인지업이 존에서 살짝 빠졌다고 판단해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선언했다.

결국 유현은 풀카운트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으드득.

투수가 이를 악물었다.

선발 로테이션이 보장된 유현과 달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는 현재 5선발을 놓고 2명의 선수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시범경기에서 호투를 보여줘야 시즌을 메이저리그에서 시작하는 게 가능했다.

시범경기 첫 등판을 쿠어스 필드에서 하게 된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1회 초 연속 2루타를 허용한 것까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실점을 하는 데에 그치며 삼진으로 위기를 벗어났으니까.

만루를 허용한 건 기분이 나쁘지만 2아웃을 잡아놓았기에 실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투수를 상대로 풀카운트 접전을 치르고 있다.

유현과 마찬가지로 한계 투구 수 80구를 부여받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발투수는, 벌써 44구를 투구하며 투구 수가 제법 늘어났다.

유현이 2회까지 22구를 투구한 데에 그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여기서 추가 실점을 하면 투구 수 관리와 경기 내용 모두 꼬여 버리고 만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못해도 4회까지는 버텨줘야 하는 상황에서, 절대로 투수를 상대로 실점을 할 수는 없었다.

좌타자를 상대로 허를 찌를 때 사용하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과감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딱!

유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백도어 슬라이더를 받아쳐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완벽하게 가르는 총알 같은 타구를 만들어 냈다.

-유현 선수가 백도어 슬라이더를 받아쳤습니다. 타구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가릅니다!

-주자들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스타트를 일찌감치 끊은 주자들이 모두 홈 베이스를 밟기엔 충분할 걸로 보입니다!

-유현 선수가 여유롭게 2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싹쓸이 2루타를 기록하면서 스코어는 0대4, 콜로라도 로키스가 격차를 벌립니다.

-유현 선수 대단하네요. 허를 찌르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이 선수, 공만 잘 던지는 게 아니라 타격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베이스를 채웠던 주자들이 모두 들어왔다.

발이 빠른 유현은 우익수가 송구를 함과 동시에 2루 베이스를 밟았다.

싹쓸이 2루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득점이 나오자 팬들이 유현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유현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초?’

-3…… 2…… 1…… 지금!

유현은 투수에게 싹쓸이 2루타를 맞으며 정신이 없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터리를 상대로 과감한 초구 도루를 시도했다.

포수가 다급히 3루를 향해 송구했다.

송구만 빠르게 하면 타이밍 상 잡을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일까?

송구가 3루수 옆으로 빠져버렸고, 그 사이 유현은 재빨리 뛰어 홈 베이스를 밟았다.

과감한 도루 시도를 통해 상대의 실책을 유도하며 추가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스코어는 0대5.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선발투수의 멘탈이 완전히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 * *

-빠른 배트 스피드와 타고난 덩치에서 오는 파워, 거기에 빠른 발까지 지녔죠. 아마 타자였다면 호타준족이 됐을 겁니다.

-유현 선수가 이도류에 도전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지명타자가 없는 리그이다 보니 인터리그 때가 아니면 그럴 가능성은 낮긴 하겠지만, 준수한 타격 능력을 보여줘서 나쁠 건 없죠. 보세요. 덴버의 열정적인 팬들은 시즌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유현 선수를 새로운 산 사나이로 받아들일 준비를 끝마친 것 같습니다.

-맹활약을 하는 것만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좋은 방법도 없죠.

유현의 득점 이후 1번 타자가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콜로라도 로키스의 빅 이닝이 끝이 났다.

3회 초.

유현은 또 다시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었다.

허를 찌르는 하이 패스트볼로 삼구삼진, 커터를 던져서 유격수 앞 땅볼, 1볼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뚝 떨어트린 스플리터로 헛스윙 삼진.

3회까지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의 피칭은 완벽에 가까웠다. 원하는 코스에 자유자재로 제구하며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위주의 피칭을 하는데 타자들의 입장에선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중간 중간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섞어 던지며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는 3회 말 3연속 안타로 추가 실점을 한 뒤 빌어먹을 쿠어스 필드에서의 등판을 일찌감치 끝마쳤다.

4회 초.

0대7로 승기가 넘어온 상황에서,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한 유현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투구 수는 39구.

당초 유현은 80구 내에 5회까지 1~2실점을 하는 걸 목표로 한 채 마운드에 올랐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쿠어스 필드에서의 첫 등판 치고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3회까지는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5이닝 무실점 피칭에 욕심이 생겼다. 여차하면 투구 수 관리를 잘해서 6회에도 마운드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그런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경고를 했다.

-신중하게 투구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가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걸 잊지 마. 네 예상과 다른 상황이 자주 벌어질 거거든.

땅의 정령의 경고가 곧 현실로 이뤄졌다.

유현은 2아웃까지 잘 잡아냈지만, 3번 타자를 상대로 외야 플라이를 허용하고 말았다.

아니, 분명히 외야 플라이가 될 것 같은 먹힌 타구였는데 예상과 다르게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며 중견수 키를 넘겨버렸다.

제구에는 문제가 없었다.

투심 패스트볼이 몸쪽 낮은 코스를 정확히 찔렀고, 타자가 억지로 띄우긴 했지만 타구는 정타가 되지 않았다.

평범한 외야 플라이가 됐어야 할 타구였다.

문제는 공기 저항이 적은 쿠어스 필드에서는 타구가 다른 구장보다 더 뻗어나간다는 거였다.

방금 전처럼 말이다.

결국 외야 플라이라 예상했던 타구는 결과적으로 2루타가 됐다.

그 다음은 더 기가 막혔다.

내야 플라이로 처리될 줄 알았던 타구가 좀 더 뻗어나가며 빗맞은 안타고 되고 말았다.

2사 상황이다 보니 타구가 뜨는 순간 2루 주자는 홈 베이스를 향해 전력 질주했고, 빗맞은 안타로 인해 유현은 이날 첫 실점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재밌네.’

유현은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KBO리그에서 뛸 때도 중요한 경기에서는 승부욕이 들끓었지만, 그때와는 승부욕의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유현이 앞으로 지겹도록 등판해야 할 홈 구장은 투수에게 있어 좋은 점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이다.

평범한 외야 플라이가 될 것 같았던 타구로 2루타로 만들어버리는 정신 나간 구장.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남고 싶었다.

-흐음. 아무래도 선물을 받고 싶으면 좀 더 분발해야겠는데요? 쿠어스 필드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대량 실점을 할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해요.

‘걱정하지 마. 오늘 경기의 피안타는 방금 그게 마지막일 테니까.’

-자신감이 넘치네요. 기대해보겠어요.

‘선물이나 확실하게 준비해 놔.’

유현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이 날.

유현이 허용한 안타는 1실점을 허용하게 된 빗맞은 안타가 전부였다.

이후에는 단 한 번도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고, 삼진 또한 두 개를 추가했다.

72구를 투구해서 5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4탈삼진 1실점 호투.

거기에 두 번의 타석에서 2타수 2안타 3타점 1득점 2도루까지.

투타 모두에서 완벽한 활약을 보여준 유현은, 더그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암컷 땅의 정령으로부터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흐음. 나쁘지는 않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으로 첫 사이영 상 수상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 같은데요? 투구 패턴이 너무 단조로워요. 허를 찌르는 삼진 유도가 좋긴 했지만 항상 먹히는 것도 아니고, 투구 패턴에 대해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잔소리꾼이 둘로 늘어난 거 같긴 하지만 괜찮았다. 어쨌거나 유현은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고, 약속을 지켰으니 선물을 받을 일만 남았다.

땅의 정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축복을 받을 수 있는데 그깟 잔소리가 문제겠는가.

축복을 받기 전.

유현이 암컷 땅의 정령을 보자마자 품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너도 대식가야?’

-전 많이 안 먹습니다.

‘그래? 다행…….’

-한 끼에 10인분 정도 먹습니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 소식합니다.

‘…….’

아무래도 식비가 왕창 늘어날 것 같았다.

어찌 됐던…….

암컷 땅의 정령은 약속을 지켰다. 호투의 대가로 유현에게 선물을 지급했다.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땅의 정령님께서 당신에게 선물을 지급합니다. 투수들의 무덤에 쌓인 투수들의 울분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동료 야수들의 수비 집중력이 2배로 상승합니다. 호수비 확률이 2배로 상승합니다.]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쩌면 쿠어스 필드와 어울리는,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고의 축복이 유현에게 주어졌다.

-투수들의 무덤에 온 걸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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