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99화 (99/155)

99화 마지막 테스트 (2)

쿠어스 필드에서의 첫 등판을 앞둔 날, 유현은 점심으로 헬튼 버거를 먹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영구결번 선수인 토드 헬튼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헬튼 버거와 어니언 링, 그리고 바나나 쉐이크의 조합은 환상이었다.

칼로리가 높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등판하면 2~3kg이 빠진다고 할 정도로 선발투수의 운동량은 엄청나다. 조금 고칼로리로 먹더라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문제는…….

유현이 1인분이 아니라 4인분을 주문해서 먹고 있다는 거였다.

유현의 어마어마한 점심 식사를 지켜보던 놀란 아레나도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먹고 등판할 수 있겠어? 쿠어스 필드가 싫어서 배탈을 핑계로 등판을 미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요. 제가 소화력 하난 끝내줘서요. 그나저나 헬튼 버거 맛있네요.”

“맛있긴 맛있지. 나도 가끔 먹어. 근데 4인분은 좀 너무했다.”

“원래 맛있는 건 많이 먹어줘야 해요.”

“그러다 살찐다. 뭐, 네 운동량이면 그럴 걱정이 없긴 하겠다만. 맛있게 먹어.”

유현은 4인분을 시킨 건 시범경기 첫 등판이 확정됐을 때부터 계속해서 헬튼 버거를 먹고 싶다 노래를 불러댄 땅의 정령 때문이었다.

헬튼 버거를 맛본 땅의 정령은 만족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맛이다. 뉴욕에서도 햄버거를 많이 먹었지만 헬튼 버거 쪽이 더 맛있는 거 같군.

‘입맛에 맞는다니까 다행이네.’

-아주 만족한다.

‘그래. 많이 먹어라. 난 얼른 먹고 알리사랑 통화해야겠다.’

-빌어먹을 커플 같으니라고.

‘이제 그 말 하는 것도 지겹지 않냐. 나 같으면 슬슬 암컷 땅의 정령을 만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면 암컷 햄스터 입양은 어때?’

-흥. 바빠서 못 만났다. 이제 곧 만날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어째 모태솔로가 일 때문에 바빠서 연애 못 해봤다고 말하는 느낌이네.’

-널 죽일 거다. 너 죽이고 성불할 거다.

유현과 땅의 정령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면서도 식사를 끝마쳤다.

식사 후.

유현이 포수 마크 번칠과 대화를 나눴다.

마크 번칠.

2018시즌 확장 로스터가 적용된 9월에 데뷔, 2019 존 그레이와 카일 프리랜드의 전담 포수로서 꾸준히 출장 기회를 부여받은 만 23세의 포수는 스프링 트레이닝 전부터 2020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의 주전 포수로 낙점됐다.

타격은 2019시즌 타율 2할 3푼 5리 11홈런 48타점을 기록하며 눈에 띄지는 않았다. 힘은 좋지만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초 주전 자리를 꿰찼던 포수보다 타격 지표가 떨어짐에도 주전으로 낙점 받을 수 있었던 건, 부족함을 만회할 만한 뛰어난 수비 덕분이었다.

마크 번칠은 천생 포수였다.

블로킹, 프레이밍, 도루 저지, 볼 배합까지 수비면에서 부족한 게 전혀 없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자리를 잡은 투수들은 대부분 그라운드 볼러였고, 그라운드 볼러에게 있어 내야 수비는 방어율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포수가 가장 중요하다.

수비가 안정적이지 않은 포수가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 있는데 마음껏 공을 던질 수 있는 그라운드 볼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존 그레이와 카일 프리랜드가 2019시즌 홈에서 각각 2.42와 1.95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원정에서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면에는 마크 번칠의 뛰어난 수비가 존재했다.

그리고 마크 번칠은 유현이 클린업 트리오와 오수완 다음으로 빨리 친해진 선수였다.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등판할 때마다 호흡을 맞추면서 금방 친해졌다. 대화가 잘 통하고 야구와 관련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공격적으로 가자.”

“당연하죠. 현의 공은 무조건 공격적으로 투구해야 빛이 나요. 그 좋은 공을 가지고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경기가 시작하기 전.

유현은 최종 점검 차원에서 마운드 위에 서서 연습 투구를 해봤다.

팡! 팡! 팡!

“나이스! 아주 좋아요!”

공이 미트에 시원시원하게 박혔다. 그때마다 마크 번칠은 연신 나이스를 외쳤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평소처럼 볼이 떠오르는 듯한 착시 효과가 거의 없었고, 제구 또한 원하는 코스에 정교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구속은 평소보다 빠른 것 같았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줄어드는 대신 구속이 상승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어떤 의미인지 느낌이 왔다.

구속은 늘고 무브먼트는 줄다 보니 평소의 느낌대로 투구하면 미묘하게 제구가 엇나갔다.

“이래서 쿠어스 필드 쿠어스 필드 하는구나.”

“느낌 되게 이상하죠?”

“공이 평소보다 좀 더 가벼운 느낌이야. 구속이 조금 빠른 거 같긴 한데 무브먼트가 영…….”

“그래서 다들 패스트볼의 제구에 어려움을 겪어요. 구속은 빠른데 무브먼트가 죽어서 원하는 대로 제구가 잘 안 되거든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는?”

“이제부터 테스트해봐야죠.”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유현은 무덤덤했다.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들을 거라는 걸 일찌감치 예상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죽어라 강화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는 무브먼트가 살짝 죽긴 했지만 말을 안 듣지는 않았다. 원하는 코스로 잘 제구됐고, 무브먼트 또한 타자들과 승부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마크 번칠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통할 것 같습니다.”

“좋아. 쿠어스 필드에서의 첫 등판을 잘 마무리하고 2선발 자리를 꿰차보자고.”

“감독님이 잘 던지면 2선발 시켜준다고 약속했어요?”

“80구내로 4이닝 2실점 이상 하면.”

“거뜬할 거 같은데요?”

“당연하지.”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가 쿠어스 필드에서의 첫 등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땅의 정령이 유현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더그아웃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

‘어딜 가려고?’

-금방 온다. 1회가 끝나기 전에는 올 테니까 등판 준비나 잘하고 있어라.

‘딱히 잘하고 말고 할 게 없긴 한데…….’

이미 준비는 끝이 났다.

몸이 식지 않게 조금씩 움직이며 경기가 시작하기만을 바랄 뿐.

몇 분 후.

콜로라도 로키스의 2020시즌 첫 시범경기가 시작됐고, 유현이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올랐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였다.

포심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바짝 붙이려 했지만 살짝 가운데로 몰렸고, 타자가 스윙을 하지 않으면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하이 패스트볼은 위험하겠어.’

유현은 타자의 몸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하이 패스트볼을 선호한다. 그 코스가 타자에게 위협적이고 승부를 쉽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던졌다.

포심 패스트볼을 정확히 원하는 코스에 제구할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쿠어스 필드는 달랐다.

원하는 대로 정확히 제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보다 무브먼트가 죽은 상태다 보니 살짝만 몰려도 장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유현과 마크 번칠은 곧장 전략을 수정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존 구석구석으로 찔러 넣으며 철저하게 땅볼 유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유격수 앞 땅볼, 2루수 라인드라이브, 다시 유격수 앞 땅볼.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원하는 코스로 유도하며 손쉽게 잡아낸 것이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며 유현은 리드를 잘해준 마크 번칠, 그리고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깔금하게 처리해준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와 주먹을 가볍게 맞댔다.

“나이스 피칭. 공 좋았어요.”

“포심은 안 되겠더라. 너무 가볍고 미묘하게 제구가 안 되는 게 못 쓰겠어.”

“네. 저도 그래서 바로 볼 배합 바꿨어요. 포심은 보여주는 용도로만 가끔씩 쓰게요. 아니면 허를 찌를 때나.”

“응. 부탁할게.”

유현이 두 시즌 동안 호흡을 맞췄던 차영석과 지석한은 분명 좋은 포수였다.

차영석은 볼 배합에 있어서만큼은 KBO리그 최고였고, 지석한은 그런 차영석에게 포수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며 2019시즌 수비에서도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수비 능력만큼은 타고난 천재라고 평가받는 마크 번칠에 비할 바는 못 됐다.

특히나 마크 번칠은 투수의 컨디션과 사용 구종에 따라 어떻게 리드해야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투수의 컨디션을 120% 끌어내는 포수.

유현과 땅의 정령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코스로 투구를 요구하는 마크 번칠을 보며, 유현은 자신이 메이저리그에 왔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차영석이나 지석한과 호흡을 맞출 때는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 정립했던 코스를, 마크 번칠은 스스로 요구했으니까.

‘확실히 메이저리그가 다르긴 달라. 마음 편하게 투구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을 상대로 1회 초를 삼자범퇴로 마감한 그 순간.

유현은 확신했다.

마크 번칠과 함께라면 볼 배합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 없다. 사인대로 투구하기만 하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말이다.

1회 말.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의 연속 2루타가 터지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1점을 앞서갔다.

이어진 2회 초.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유현의 눈앞에 땅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고 유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상황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어…… 그러니까…….’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냐. 땅의 정령 처음 보냐.

‘너 말고 다른 정령은 처음보지? 난 너 진짜 못 먹어서 굶어 죽은 귀신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의심했었다니까 그러네.’

-흥. 인사 드려라. 덴버 일대를 관리하고 있는 고귀한 분이시다.

‘음…… 그래. 반가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덴버에 KBO리그 최고의 투수가 온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1회는 삼자범퇴로 끝냈군요? 기대해봐도 좋으려나요.

잠깐 나갔다 돌아온다고 했던 땅의 정령이 동료 땅의 정령을 데리고 왔다.

하얀색 햄스터였지만, 귀쪽에 붉은색 꽃을 꽂고 있었고 몸집이 땅의 정령보다 작았다.

그랬다.

땅의 정령이 데려온 덴버 일대를 관리하는 땅의 정령은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던 암컷 땅의 정령이었다.

허구한 날 커플 커플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로 암컷 땅의 정령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유현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사이, 암컷 땅의 정령은 유현을 향해 질문을 던져댔다.

-당신은 좋은 투수인가요?

‘감독님에게 선발 로테이션을 보장받았으니까 좋은 투수라고 할 수 있으려나.’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죠. 시범경기니까 투구 수 제한은 있겠죠? 몇 구인가요?

‘80구.’

-좋아요. 80구로 5이닝 1실점 이하 피칭을 하면 제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도록 하죠.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암컷 땅의 정령이 준다는 선물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땅의 정령이 자신에게 줬던 축복과 비슷한 형태이리라.

받아서 절대 손해 볼 일 없는 바로 그 축복 말이다.

‘약속 꼭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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