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마지막 테스트 (1)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이 차분한 표정으로 코칭스태프들과 자료를 검토했다.
스프링 트레이닝 종료까지 나흘을 남겨 둔 상황.
이후 이틀 동안의 휴식을 취한 뒤 시범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때에 대비해 라인업을 꾸려야 했다.
시범경기의 라인업은 주전이 확정된 선수들에게는 컨디션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선수들에게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짜야 한다.
그리고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스프링 트레이닝 중반부에 일찌감치 라인업이 확정됐다.
스프링 트레이닝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타자들 쪽에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오랜 시간 콜로라도 로키스의 골칫거리였던 투수진이 이제는 확실히 안정을 찾은 모양새였다.
존 그레이와 카일 프리랜드를 비롯해 쿠어스 필드에서의 방어율이 원정에서의 방어율보다 좋은 선발진들, 지난해 계산이 서는 야구의 원동력이 됐던 필승조의 컨디션이 모두 좋았다.
덕분에 회의 분위기는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코칭스태프들의 입가에는 간간이 미소가 맺혔다.
“선발진은 큰 문제가 없겠군. 불펜도 필승조의 컨디션은 대체적으로 괜찮은 편이고.”
“거기에 유현이 합류하면서 지난해보다 더 안정적으로 선발진을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문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타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클린업 트리오를 제외하면서 확실하게 계산이 서지를 않아서…….”
“흐음. 우리의 슈퍼 루키들은 언제쯤 콜업 될 수 있을 거라고 하던가.”
지난 두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건 구장의 특색과 어울리지 않게 투수진이 안정화된 덕분이었다. 홈 방어율이 원정 방어율보다 좋거나 비슷한 선발투수들, 그리고 확실한 필승조를 갖춘 덕분에 계산이 서는 야구를 할 수 있었다.
반면 타선은 지난 2년 동안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함에도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2019시즌만 놓고 봤을 때 팀 타율 메이저리그 전체 22위, 팀 홈런 메이저리그 전체 18위를 기록할 정도로 타격 지표가 기대 이하였다.
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 클린업 트리오가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음에도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오죽하면 클린업 트리오가 터지면 이기고 안 터지면 진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문제는 지속적으로 투수진을 보강하고 클린업 트리오와의 재계약을 추진하며 많은 돈을 쓴 탓에, 외부 영입을 통해 수준급 타자를 데려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결국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기존 타자들이 좋은 타격을 보여 주거나, 혹은 마이너리그에서 새 얼굴이 올라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가 바라고 있는 건 후자였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슈퍼 루키 듀오.
1루수와 2루수 포지션인 그들은 2019시즌 유망주 랭킹 3위와 11위에 랭크된 이들로, 2020시즌 메이저리그 데뷔가 유력한 상황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언제 데뷔하느냐는 거였다.
선수 본인들은 개막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기를 간절히 바랐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맹타를 휘두르며 그 자격을 증명해 보였다.
아마 시범경기에서도 좋은 타격 컨디션을 보여 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두 선수는 수비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기존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타격과 수비 모두 몇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두 선수가 하루 빨리 메이저리그에 콜업 되기를 바라는 게 당연했다.
허나 개막전부터 올라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구단에서는 서비스 타임을 고려해 5월 초부터 두 선수를 올릴 예정이었고, 두 선수의 에이전트가 격렬히 반대하고 있긴 하지만 구단의 결정을 뒤집을 만한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따라서 두 선수의 메이저리그 데뷔 시점은 5월 초가 유력했다.
그전까지는 기존 선수들로 버티며, 이길 수 있는 경기에서는 필승조를 총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잡는 운용으로 승수를 착실하게 쌓아 나갈 계획이었다.
“선수들이 트리플A에서 한 번 더 기량을 증명하면 바로 올릴 거라고 하던데, 사실 서비스 타임 때문에 바로 안 올리는 거죠. 아마 5월 초에는 확실하게 올라올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 부분은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도 5월 이후에는 숨통이 좀 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녀석들이 제대로 적응해 주기만 한다면 한시름 덜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어떤 팀도 완벽할 순 없다.
아무리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팀이라 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굳이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팀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투타의 밸런스가 좋았다는 점이다.
미친 선수도 중요하고 확실한 에이스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투타의 밸런스가 좋은 팀들이 월드 시리즈 우승에 가까워진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2019시즌 투수력의 강화에 힘입어 지구 1위를 할 수 있었지만, 득점력 부족으로 인해 결국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시고야 말았다.
유현이라는 수준급 투수를 데려오긴 했지만 득점력에 대한 고민은 여전했다.
아직까지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지난해 기대 이하였던 선수들이 잘해 주고, 슈퍼 루키들이 콜업 돼서 좋은 활약을 보여 주길 바라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그래도 유현을 데려와서 다행입니다.”
“연습 경기 때 피칭을 하는 걸 보니 홈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면서 사이영 상을 받으려고 로키스와 계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그런 자신감을 드러낼 만도 하더군요.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커터, 스플리터,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이 완벽합니다.”
“게다가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더 강화했더군요. 야구 지능마저 뛰어난 투수입니다.”
“심지어 타격도 잘하고 발도 빠르죠. 어쩌면 쿠어스 필드 역사상 최고의 투수를 영입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유현이 잘하기는 하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치른 자체 청백전과 연습 경기를 통해 유현은 코칭스태프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받았다.
투수로서는 도합 12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합격점을 받았고, 심지어 타자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유현을 이도류로 기용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내셔널리그의 특성상, 좋은 타격을 보여 주는 투수가 있다면 계산이 쉬워지는 게 사실이다.
상황에 따라 9번이 아닌 다른 타순에 배치할 수도 있고 말이다.
실제로 지난해 내셔널리그에서는 타격에 재능이 있는 몇몇 투수들이 상위 타순이나 6~7번 타순에 배치되는 전략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인터 리그 때 등판이 없는 날에 지명타자로 출장한 투수마저 있을 정도였다.
투수가 좋은 타격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면 그 능력을 썩히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바람직했다.
체력이 허용해 주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첫 시범경기를 홈에서 치르지?”
“네. 그렇습니다.”
“그 경기에서 유현을 선발투수로 등판시켜 보자고. 마지막 테스트라 생각하고.”
“알겠습니다.”
유현은 좋은 투수다.
구속, 제구, 체력, 수비, 심리전 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투수라는 걸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제대로 보여 줬다.
코칭스태프들 또한 유현이 선발 라인업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였다.
2선발이냐, 3선발이냐, 혹은 1선발이냐.
코칭스태프는 유현의 선발 로테이션 순서를 놓고 쿠어스 필드에서 열릴 2020시즌 첫 번째 시범경기에서 테스트를 할 예정이었다.
만약 쿠어스 필드에서도 좋은 피칭을 보여 준다면 2선발로 시즌을 시작할 테고,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3선발로 시즌을 시작할 터였다.
“KBO리그 산 괴물이 투수들의 무덤에서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한 번 지켜보자고.”
* * *
콜로라도 로키스의 감독은 유현을 직접 불러서 테스트와 관련된 내용을 전달했다.
유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무덤덤하군.”
“제 몸값을 감안했을 때 불펜으로 기용할 가능성은 낮고, 직전 등판까지 무실점 피칭을 했으니 기량은 증명해 보였고, 선발 로테이션은 확정이지만 마지막으로 쿠어스 필드에서도 잘 던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거 아닌가요?”
“맞아. 정확해. 자신은 있고?”
“자신이 없다면 더 좋은 조건들을 뿌리치고 로키스와 계약하지 않았겠죠.”
“기준치만 충족시키면 2선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될 거야.”
“기준치가 어느 정도입니까?”
“투구 수 80개로 4이닝 2실점.”
“거뜬하네요.”
KBO리그에서는 겸손이 미덕이고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선수가 조금만 못하면 깎아내리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달랐다.
몸값은 곧 투수의 가치고 실력이 동반된다는 가정하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선수를 더 선호한다.
그리고 유현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자신감을 드러낼 만한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 줬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테스트를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스프링 트레이닝을 치르며 확신을 가지게 됐다.
메이저리그가 KBO리그보다 수준이 더 높긴 하지만 자신의 공은 이곳에서도 통한다는 걸, 구장의 스타일에 맞는 피칭 스타일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자네가 첫 시즌부터 옵션을 충족할 수 있기를 바라지.”
“시즌이 끝난 뒤, 언론들은 제가 사이영 상 수상과 관련된 옵션을 추가하지 않았던 게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비난하게 될 겁니다.”
“그럼 난 그 옆에서 헬튼 버거 먹으면서 자네를 잡고 싶으면 10년 4억 달러 정도는 준비해 놔야 한다고 신나게 떠들어 주지.”
* * *
-드디어 쿠어스 필드로군.
‘재밌겠네.’
유현은 쿠어스 필드에서의 등판을 예고 받았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긴장은커녕 하루 빨리 등판일이 다가오길 바랐다.
준비는 완벽했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이 쿠어스 필드에서도 호투할 수 있는 투수라는 걸 직접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몸이 달아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쿠어스 필드에서의 등판이 기대됐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유현을 바라보았다.
-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어떤 스타일로 피칭할 거냐고?’
-뭐래. 그걸 내가 왜 신경 쓰냐.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쳐 줬는데, 양심이 있으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럼 뭐가 궁금한데?’
-쿠어스 필드에서 등판할 때마다 헬튼 버거 먹을 수 있냐?
‘……하나 사줄게.’
-이 몸의 위장 크기를 어떻게 보고! 하나로 성에 찰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럼 너 먹고 싶은 대로 먹어.’
-그 대답을 원했다.
피칭 스타일?
땅의 정령은 이미 유현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쳐 줬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생존을 위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무브먼트 강화와 구속 상승을 도와줬다.
게다가 KBO리그에서 함께한 2년 동안 어떻게 하면 타자와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는지, 타자의 허를 찌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줬다.
이제 더 이상의 조언이나 도움은 무의미했다.
땅의 정령은 유현이 가진 무기를 120% 활용하며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길 바랐다.
그리고 헬튼 버거가 맛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