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스프링 트레이닝 (3)
2018시즌.
콜로라도 로키스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통해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진출했다.
2019시즌.
마침내 창단 첫 지구 우승을 거머쥔 콜로라도 로키스는 기세 좋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2년 연속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름대로 안정적인 1~4선발을 구축한 덕분이었다.
쿠어스 필드에서 퀄리티 스타트를 기대해도 좋을 만한 선발 라인업 덕분에 경기를 계산하기가 수월해졌고, KBO리그 출신 최고의 마무리투수 오수완을 비롯한 탄탄한 필승조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확실하게 잡아낸 것이다.
선발투수 방어율은 내셔널리그 전체 8위, 불펜투수 방어율은 내셔널리그 전체 7위를 기록했다. 쿠어스 필드가 홈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매우 훌륭한 기록임이 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18시즌과 2019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은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여줬다. 2017시즌까지는 불방망이를 휘둘렀던 것과 달리 몇몇 타자들을 제외하면 좀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2019시즌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의 핵심은 세 선수로 요약이 가능했다.
먼저 놀란 아레나도.
2015시즌과 2016시즌에 내셔널리그 홈런왕이었던 그는, 그리고 2019시즌 55홈런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홈런왕을 차지했다.
심지어 2019시즌에는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 타자들에게 늘 따라붙는 홈과 원정의 타격지표 차이로 인한 논란마저도 그에게는 따라다니지 않았다.
홈에서는 3할 3푼 2리에 29홈런, 원정에서는 3할 2푼 4리에 26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2020시즌.
구단 역사상 최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놀란 아레나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가 팀의 4번 타자이자 클럽 하우스의 리더로서 중심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결국 2019시즌 시즌이 끝난 뒤 콜로라도 로키스와 놀란 아레나도는 8년 2억 2천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옵션을 충족했을 경우 4시즌을 소화한 이후 옵트아웃 선언을 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됐다.
포스트시즌에 대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내비췄기에 빅 마켓 구단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왔지만, 결국 놀란 아레나도의 콜로라도 로키스였다.
이왕이면 자신이 데뷔하고 전성기를 맞이한 친정 팀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구단이 전력 강화를 위해 계약 당시 약속을 한 부분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두 번째는 트레버 스토리.
선구안이 뛰어난 스타일은 아니지만 뛰어난 운동 신경과 파워, 그리고 스피드로 부족한 선구안을 대체하는 스타일의 선수다.
트로이 툴로위츠키의 계보를 잇는 수준급 유격수이자, 2019시즌에는 30-30클럽에 가입하며 잠재력을 꽃피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찰리 블랙몬.
2019시즌부터 3번 타자를 맡은 그는 타율은 다소 떨어지지만, 타율에 비해 높은 출루율과 빠른 발, 매 시즌 20홈런 이상을 기록할 수 있는 준수한 장타력을 겸비한 중견수다.
실제로 2019시즌에는 타율 2할 7푼 7리, 출루율 3할 9푼 4리, 27홈런 111타점 105득점 45도루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2018시즌까지는 리드오프로서 밥상을 차리는 데에 주력했지만, 마침내 2019시즌에는 원하는 대로 3번 타순에 자리하며 클린업 트리오로서 맹활약을 하게 됐다.
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
콜로라도 로키스의 막강 클린업 트리오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유현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2018시즌 트레이드를 통해 산 사나이가 된 오수완이 유현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고, 유현의 피칭 영상도 더러 보여 줬기에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첫 대면을 하는 것임에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놀란 아레나도는 유현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온 선수였다.
“그거 알아? 내가 로키스와 계약한 게 너 때문이야.”
“정말요? 농담하는 거 아니죠, 아레나도?”
“정말이야. 구단이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해 1억 달러 이상 몸값의 선발투수를 보강할 거라고 했거든. 그게 바로 너였고.”
“혹시 제가 와서 실망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수완이 네가 등판하는 경기 하이라이트를 자주 보여 줘서 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하던데? 리그의 수준 차이를 제외하고 봐도 네 공은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거야.”
“칭찬 고마워요. 아레나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죠.”
메이저리그에 첫 스프링 트레이닝을 치르는 것임에도 유현은 여유가 넘쳤다.
첫 시즌이긴 하지만 유현의 몸값은 4년간 최대 1억 3200만 달러다. 거기에 2000만 달러의 포스팅 입찰액이 추가로 지불됐다.
신인에게 지불할 수 없는 규모의 금액이다.
신인이라고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수완이 유현에 대한 칭찬을 워낙 많이 해놓은 덕분인지, 대부분의 선수들이 유현에게 먼저 다가오며 친근하게 대해줬다.
오수완이 2018시즌과 2019시즌 보여 준 맹활약으로 인해 KBO리그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것도 한 몫 했다.
유현에 대한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의 이미지는 KBO리그를 초토화시킨 괴물이었다.
리그의 수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이로운 수준의 활약을 보여 줬기에, 메이저리그에서도 적응만 잘하면 준수한 활약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유현은 빠르게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강태영처럼 친화력이 좋은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주다 보니 쉽게 친해지는 게 가능했다.
‘분위기 좋네.’
-이제 투수로서만 제대로 적응하면 되겠군. 자신 있지?
‘당연한 걸 물어보고 그래. 태영이 상대해보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 내 공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는 걸.’
-쿠어스 필드에서도 충분히 먹힐 거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 *
지난해 지구 1위를 한 덕분일까?
콜로라도 로키스 스프링 트레이닝 현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다들 월드 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하며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훈련에 임했다.
선수들은 훈련과 자체 청백전을 반복하며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데에 주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건 단연 유현이었다.
자체 청백전에서 4경기에 등판해 7이닝 연속 무실점 호투를 한 것이다.
특히나 놀란 아레나도와 트레버 스토리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을 때, 모든 선수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유현의 공이 좋았다.
오수완이 보여 준 동영상을 통해 유현의 공을 보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인 선수들은, 어째서 그가 KBO리그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는지 몸소 깨달아가고 있었다.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벌써부터 최고 96마일이 찍혔다. 거기에 같은 궤적으로 날아오다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의 조합은 패스트볼만 네 구종을 던진다는 사실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유현은 오프 시즌 동안 지난해보다 한층 더 발전해 있었다.
“아직 베스트가 아니라 확신할 순 없지만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지난해보다 좋아진 거 같아. 포심 패스트볼과의 구속 차이가 1마일 내외고, 무브먼트도 더 좋아졌는데? 커터는 거의 슬라이더라고 봐도 될 거 같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죽어라 노력했죠.”
“투심 패스트볼은 무브먼트가 말도 안 되게 지저분한데 제구할 수 있겠어? 아니지. 이미 완벽하게 제구하고 있구나. 너 같은 투수가 왜 지금껏 KBO리그에 있었던 거지 이해를 못하겠네.”
“원래는 좀 더 있었어야 해요. 포스팅 규정이 바뀌면서 진출할 수 있었던 거죠.”
“KBO리그 타자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군.”
“그러겠죠. 작년에도 진즉에 특별 규정 만들어서 메이저리그로 보냈어야 한다는 헛소리가 심심하면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충분히 이해돼. 널 상대하는 타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억지를 부려서라도 널 메이저리그로 쫓아내고 싶었겠지. 넌 KBO리그 수준에서 공략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니까.”
투수코치는 유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현이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하기 전부터 전력 분석 자료를 통해 좋은 선수라는 걸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한 유현은 그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른 투수였다.
지난해보다 한층 더 발전해 있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무브먼트가 좋아진 데다,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 차이는 KBO리그에서보다 더 줄어 있었다.
KBO리그에서는 평균 1.5마일에서 2마일 정도의 차이를 보였지만, 스프링 트레이닝 자체 청백전에서 1마일 정도만의 차이를 보여 줬다.
고작 0.5마일에서 1마일 정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차이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사실상 타자들이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차이를 육안으로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유현의 구속 또한 빠르다.
최고 98마일.
안 그래도 빨라서 대처하기 어려운 공에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들어오면 타자들은 골치가 아파진다.
그리고 이것이 유현이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찾아낸 자신만의 생존 비법이었다.
“이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릴 수만 있다면 덴버에서도 통하겠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너처럼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투수가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냥 홈구장을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게 나을지도?”
유현은 투수코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투수코치는 유현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지만, 투구와 관련해서가 아닌 지구 라이벌 팀들의 상대법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투구에 대해서는 일절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의 기량만 유지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통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투수코치의 반응은 유현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쿠어스 필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위축될 필요 없다. 내 공만 제대로 던질 수 있다면 된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리고 유현은 투수코치가 아닌 타격코치와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현. 내일은 홈런 하나 쳐야지?”
“좋아요. 코치님께 그라운드 홈런을 선물로 드릴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하하. 네 입장에서는 그게 펜스를 넘기는 것보다 쉬울 수도 있겠네.”
유현은 타격에서도 제법 괜찮은 재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체 청백전에서 네 차례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 세 개를 때려냈고, 도루를 네 번 시도해서 네 번 모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당초 콜로라도 로키스는 투수로서의 유현만 보고 거액을 배팅한 거지만, 타자로서도 예상 외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즌이 시작돼야 정확한 걸 알 수 있지만, 지금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타격에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유현은 타격 훈련 또한 제법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왕이면 투타 모두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타자들이 점수를 못 뽑아 주면 그냥 내가 쳐서 뽑겠다, 뭐 그런 건가?
‘요즘 트렌드는 타격에 재능 있는 투수를 꼭 9번에 배치하지도 않더라고. 어떤 이도류 투수가 생각보다 좋은 활약을 해줘서 말이야.’
-뭐, 만능으로 잘하면 좋긴 하지.
‘퍼펙트게임하면서 히트 포 더 사이클도 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풉. 만약 해낸다면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뭐든지?’
-뭐든지 다.
‘오케이. 내가 꼭 해내고 만다.’
그렇게 유현은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 선수로서 빠르게 적응을 해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