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96화 (96/155)

96화 스프링 트레이닝 (2)

쿠어스 필드에서 대부분의 사이영 상 투수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건, 구장 특성상 패스트볼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곧 타자들을 상대할 대안이 존재한다면 패스트볼에 문제가 있더라도 호투를 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현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의 포심 패스트볼은 쿠어스 필드에서 구속이 높아지는 대신 무브먼트가 감소하면서 컨트롤에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와 스플리터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땅의 정령은 유현에게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갈고 닦는 게 쿠어스 필드에서의 생존법이 될 거라 이야기했다.

-2018시즌부터 2019시즌에 이를 때까지, 콜로라도 로키스는 제법 그럴 듯한 1~4선발진을 꾸렸고 이는 곧 성적으로 이뤄졌어. 쿠어스 필드에서 나름대로의 생존법을 찾아낸 공통점이 뭔지 알아?

“그라운드 볼러라는 거 아냐?”

-맞아. kkk머신들은 쿠어스 필드에서 장기적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지. 대부분 비싼 돈을 주고 데려와도 5점대 이상의 방어율을 기록했고, 원정에서는 그나마 밥값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단 말이야. 그래서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는 생각을 바꿨어. 자신들의 빌어먹을 홈구장에 어울리는 투수를 영입 및 육성하자고.

“그 전략이 두 시즌 연속 어느 정도 먹혀드는 모습인 건 맞지.”

-그리고 또 하나. 선발투수들에게 포심 패스트볼을 완전히 버리라고 요구하는 거였어. 적어도 쿠어스 필드에서는 말이야.

‘완전히 버려? 비율을 낮추는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포심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갔을 때 타자를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구위가 있거나, 혹은 원하는 코스에 완벽하게 제구돼야지 강력한 무기야. 하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 그래서 포심 패스트볼을 완전히 버리라고 요구한 거고.

‘흐음. 그렇다면 나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줄일 필요가 있는 건 맞지.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땅의 정령이 말한 대로 포심 패스트볼은 정확한 제구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높은 무기다.

특히나 패스트볼이 말을 듣지 않는 쿠어스 필드에서라면 말이다.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하기 위한 첫걸음은 포심 패스트볼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 두 번째 걸음은 완벽하게 그라운드 볼러가 되는 거였다.

유현에게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라는 위력적인 구종이 존재한다. 두 구종을 쿠어스 필드에서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콜로라도 로키스의 영입 의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스플리터의 활용법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장타를 허용하기 쉬운 구종이니까. 나라면…….

‘포심 패스트볼은 보여주는 용도나 허를 찌르는 용도로 간간히,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쿠어스 필드에서도 원하는 코스에 제구할 수 있도록 가다듬고, 스플리터는 활용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봉인하겠지?’

-2년 같이 지냈다고 관심법을 배운 건가?

‘관심법은 무슨. 뻔한 대답이니까 그렇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말을 안 듣는 포심 패스트볼 대신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주 무기로 사용하고, 스플리터의 활용법을 고민하는 것.

유현이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물론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또한 패스트볼의 한 종류이긴 하지만, 이미 쿠어스 필드에서 해당 구종들을 주 무기로 사용해 준수한 활약을 한 선발투수들이 존재한다.

그 말인 즉, 유현 또한 두 구종을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목표를 크게 잡지 마. 쿠어스 필드에서는 매 경기 퀄리티 스타트만 꾸준히 해도 충분해. 아. 물론 원정에서는 KBO리그에서처럼 괴물 같은 경기력을 뽐내는 게 좋긴 하겠지만.

“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가 더 좋은데.”

-개막 전에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완벽하게 가다듬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스플리터는?”

-뾰족한 답이 없어. 시즌 들어가서 직접 사용해보며 답을 찾아봐야지.

“흐음. 오케이.”

유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루뭉술하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보다 확실한 목표가 있어 좋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통해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알리사 메켄의 전력 분석을 통해 땅의 정령이 한 말이 사실임이 입증됐다.

“자기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무브먼트라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충분히 통해요.”

“정말요?”

“네. 2018시즌과 2019시즌,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한 투수들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분석해서 자기와 비교해봤어요. 지난 시즌 자기가 던진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평균 회전수가 더 많고, 무브먼트도 더 지저분해요. 원하는 코스에 정확한 제구도 가능하니, 쿠어스 필드에서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기적적인 변화가 있기도 했고요.”

“다행이네요. 쿠어스 필드에서 제 공이 통할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정 불안하면 테스트를 좀 해볼까요?”

“테스트요?”

알리사 메켄이 미소를 지었다.

유현은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며, 짓궂은 장난을 치려는 어린아이 같다고 느꼈다.

“자기를 상대하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싶다는 타자가 한 명 있어서요.”

“그 타자가 지금 같은 건물에서 훈련을 하고 있고, 해가 지면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면서 데이트를 방해하고 있고요?”

“기껏 호텔을 제공해줬더니 저택으로 기어 들어와서 빌붙어 살고 있기까지 하죠.”

“열흘 정도 더 빌붙어 있으면 레드삭스 전에서 선발 등판할 때 빈볼을 던질 것 같아요.”

“스프링 트레이닝이 일주일 남아서 다행이네요.”

강태영.

유현과 함께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하고 있으며, 좋은 호텔 놔두고 데이비드 메켄의 저택에 빌붙어 숙식을 해결하며 유현과 알리사 메켄 커플의 데이트를 허구한 날 방해하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좌익수가 유현과 맞대결을 하고 싶어 했다.

강속구 투수를 상대하며 스프링 트레이닝 합류 전 마지막으로 컨디션 점검을 하고 싶다나 뭐라나.

유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강태영이라면 컨디션을 점검하기에 최고의 상대라 생각했으니까.

“컨디션 많이 올라왔어? 난 컨디션 안 올라온 투수 상대하는 거 별론데.”

“94~95마일 정도는 나올 걸?”

“이야. 컨디션 관리 잘했네.”

“근데 난 오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만 계속해서 던질 거야.”

“쿠어스 필드 스타일로 투구하시겠다?”

“그런 거지.”

“재밌겠네. 해봐. 내가 직접 확인해 줄 테니까.”

“사양하진 않을게.”

맞대결을 시작하기 전.

유현이 불펜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고용한 불펜 포수가 유현의 공을 받아줬다.

그리고 공을 받을 때마다 나이스를 외쳤다.

“역시 소문대로 공이 좋네요.”

“그런가요?”

“네. 미트를 가져다대는 곳에 정확히 투구하는 투수는 흔치 않으니까요. 특히나 투심 패스트볼은 제구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정확히 원하는 코스에 집어넣는 거 보면 신기합니다. 다른 투수들 공도 많이 받아봤지만 투심 패스트볼을 이렇게 정확하게 제구하는 분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제구하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죠.”

확실히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특별했다.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면서 무브먼트가 말도 안 되게 지저분한데, 그러면서도 또 제구가 정확했다. 포수가 미트를 대는 곳에서 정확히 찔러 넣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제구를 보여줬다.

처음 배웠을 때부터 제구가 좋긴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2019시즌을 치르며, 그리고 2020시즌을 준비하며 제구력을 갈고 닦은 게 주효했다.

불펜 투수의 도움으로 몸을 푼 이후, 유현이 타석에 선 강태영을 마운드 위에 선 채로 바라보았다. 메켄 코퍼레이션에서 선수들의 실전 연습을 위해 불펜 옆에 만들어놓은 간이 그라운드였다.

‘초구는 몸쪽.’

유현이 선택한 초구는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한가운데로 몰리는 거 같다가 몸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어갔다.

딱!

강태영이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투심 패스트볼은 강태영의 배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배트 안쪽을 파고든 투심 패스트볼을 정타로 만드는 건 제아무리 강태영이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투수라면 모를까, 유현의 경우는 힘으로 구위를 이겨내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유격수 정면으로 향한 땅볼 타구를 만들어낸 강태영이 피식 웃었다.

“병살타 치기 딱 좋은 코스네.”

“그래서 내가 탈삼진 300개 넘게 잡으면서 병살타 1위를 할 수 있었던 거지.”

“야. 근데 어째 작년에 상대할 때보다 공이 더 좋아진 거 같다? 기분 탓인가?”

“기분 탓 아닐 걸.”

“…… 진짜 더 좋아졌다고?”

“밥줄이라서 정확히는 말 못해주겠지만,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으려고 강화하긴 했지.”

“진짜 미쳤다, 미쳤어.”

강태영이 혀를 내둘렀다.

안 그래도 좋은 공을 던지는 유현인데 투심 패스트볼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유현의 발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현이 2구째로 던진 커터의 궤적은 투심 패스트볼과 정반대였다.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거 같다가 바깥쪽으로 쓱 빠져나갔다.

문제는…….

“야. 이거 진짜 커터 맞냐?”

“맞아.”

“이걸 어떻게 치라고…….”

“좋네. 네가 못 칠 정도면 대부분의 타자들이 쉽게 공략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 뭐, 작정하고 공략하면 칠 수 있긴 하겠지. 열에 한두 번?”

“그 정도면 충분해.”

“근데 진짜 장난 아니네. 투심 패스트볼도 엄청났지만, 커터는 그냥 초고속 슬라이더 같아.”

유현의 커터 또한 변화했다는 거였다.

휘어지는 각이 흡사 커터가 아니라 슬라이더 같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거의 비슷한 구속이 나오는 정신 나간 슬라이더 말이다.

강태영은 비시즌 내내 유현과 함께 훈련했다.

그래서 유현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주 무기로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하려 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맞대결을 해 본 결과.

강태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쿠어스 필드에서 사이영 상 경쟁할 수도 있겠는데?”

“경쟁이 아니라 사이영 상을 받을 건데? 내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이렇게 가다듬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근데 진짜 엄청나긴 하다. 이 공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선수 거의 없을 거 같은데.”

“더 엄청난 거 말해줄까?”

“뭔데?”

유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리사 메켄을 비롯해 메켄 코퍼레이션의 몇몇 직원들만이 알고 있는 특급 비밀을 알려주자, 강태영은 넋을 놓아버렸다.

그 정도로 유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미친…… 농담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전력분석을 통해 확인한 거라서 확실하다고 보면 돼.”

“그냥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응. 그러려고 준비한 거야. 이 정도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생존할 수 있겠지?”

“이러다가 쿠어스 필드에서 퍼펙트게임이 나올수도 있을 것 같다만.”

“최고의 대답이네.”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테스트는 충분했다. 강태영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줬으니 됐다.

이제 남은 건 스프링 트레이닝 참여 전까지 휴식과 훈련을 병행하는 것, 그리고 허구한 날 들러붙는 강태영을 떼어놓고 알리사 메켄과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유현이 콜로라도 로키스의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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