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스프링 트레이닝 (1)
사실 유현의 선택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고 많은 구단 중에 콜로라도 로키스다.
극단적 타자 친화 구장에 KBO리그 산 최고의 홈런 타자인 강태영이 갔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투수들의 무덤에 KBO리그를 초토화시킨 투수가 입성한다는 게 논란거리가 됐다.
일부 언론들은 유현이 KBO리그에서의 성적에 도취되어 오만한 선택을 했다고 힐난했다.
수많은 사이영 상 수상자들도 쿠어스 필드만 왔다 하면 기이할 정도로 난조를 보였다. 패스트볼에 생긴 문제가 투수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과연 유현이 쿠어스 필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뤘다.
콜로라도 지역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들이 유현이 선택을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98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던지고 패스트볼 4종 세트가 주 무기인 투수가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한다는 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거라는 게 외부의 시선이었다.
게다가 유현과 콜로라도 로키스가 체결한 옵션 또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시즌 15승 이상 달성, 200이닝 이상 소화, 2점대 방어율과 200탈삼진 이상을 기록해야지 매년 1100만 달러의 옵션이 충족된다.
셋 중 하나라도 달성하지 못하면 옵션은 충족되지 않고, 유현은 1100만 달러를 받을 수 없다.
이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아닌 유현 측에서 직접 제시한 옵션이었고, 부상만 없다면 옵션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기에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유현 측이 제안한 옵션은 자신감이 아닌 오만으로 비춰졌다.
수준 차이가 한참 나는 KBO리그를 초토화시켜놓고 자만에 취해 메이저리그를 무시하고 쿠어스 필드를 정복할 수 있다 허언을 하는 걸로 보였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유현이 단 한 시즌도 옵션을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고 내다보았다.
200이닝이야 부상이 없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15승과 200탈삼진도 얼마든지 가능한 수치다.
그러나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이상 방어율에서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높다는 게 대부분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공통된 예상이었다.
반대 의견 또한 일부 존재하긴 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범타 유도에 최적화된 두 구종을 지닌 유현이라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줄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거기에 원정 경기에서의 호투가 동반된다면 옵션을 충족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다만 반대 의견을 내는 이들조차도 유현이 매 시즌 옵션을 달성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정도로 유현이 내건 옵션은 달성하기 힘든 옵션이었다. 심지어 홈구장이 쿠어스 필드이니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당사자인 유현, 그리고 땅의 정령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슬슬 귀국해야지?
‘어. 귀국했다가 집에서 좀 쉬고, 선수들 좀 만나고 하면 시간 금방 가겠네.’
-가는 김에 불화산 치킨 좀 왕창 먹고 오면 안 될까? 여기 음식이 맛없는 건 아닌데, 솔직히 너무 느끼해서 입맛에 안 맞아.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맘껏 먹고 오자.’
둘은 언론의 목소리에 흔들리지도, 일일이 반응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귀국을 준비하며 언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쿠어스 필드에서도 성공할 수 잇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계약 후 3일 째 되는 날.
유현은 대한민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당분간 커플들의 염장질을 보지 않을 수 있겠군. 아주 바람직해.
‘뭐…… 알리사도 알리사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 모처럼 헤어졌다.
아직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이 아님에도 알리사 메켄과 헤어진 이유는, 그녀가 결국 시애틀 매리너스 전담 기자를 그만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알리사 메켄은 때가 되면 메켄 코퍼레이션의 일을 배울 거라 했고,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확정되자 순리대로 기자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입 사원으로서 일을 배우느라 유현과 떨어져 있었다.
일을 배운 뒤에는 알리사 메켄이 유현을 전담해서 케어할 예정이었다.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 함께 귀국하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일을 배우고 난 뒤에는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 예정이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한 시즌 내내 떨어져 지내며 장거리 연애를 하기도 했는데, 잠깐 떨어져 지내는 걸로 아쉬워 할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유현은 12월까지만 한국에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전에 몸 상태를 끌어올리려면 한국에 있는 것보단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 본사에서 훈련하는 게 더 편하니까.
그때가 되면 다시 알리사 메켄을 만날 테고, 시간이 날 때마다 데이트도 즐길 터였다.
지금은 그보다…….
-이야. 많이도 왔네.
‘으음. 그러게. 이 정도로 많이 올 거라고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만큼 너한테 관심이 많은 거지. 자. 이제 딴에는 팩트 폭력이랍시고 되도 않는 질문들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상대할 시간인가?
‘얼른 끝내고 가자. 피곤하다.’
-공항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 시켜줬잖아?
‘몸이 말고 정신적으로 피곤하다고. 기자들 상대할 때마다 피 빨리는 거 같거든.’
-좀 귀찮기는 하지.
공항에 몰려 있는 엄청난 수의 기자들을 상대하는 게 급선무였다.
대전 펠컨스 측과 이야기해서 기자회견장을 따로 마련하긴 했지만, 공항이 미어터질 정도로 팬과 기자들이 몰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유현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유현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스포츠 전문 기자들을 다 모아놓은 것처럼 많은 인파가 몰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유현이 도착하기 전부터 기자회견 준비는 끝난 지 오래인 상황,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자회견을 빨리 끝내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유현 선수. 타 구단에서 더 큰 규모의 계약을 제시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구단명과 계약 규모에 대해 밝힐 수는 없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보다 더 좋은 조건의 계약을 제시한 구단들이 있었습니다.”
“한데 어째서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계약을 결정하신 겁니까?”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계약도 충분히 큰 규모고, 무엇보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결정했을 때부터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투수들의 무덤을 홈으로 원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왕 도전하는 거 메이저리그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을 정복하고 싶었습니다.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면서 사이영 상을 받는 것만큼 의미 있는 행보는 없을 테니까요.”
“쿠어스 필드에서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설마 모르고 쿠어스 필드 행을 결정했을까요.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들어도 생존할 자신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영업기밀이니만큼 시즌이 시작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다, 역대 사이영 상 수상자들도 모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째서 더 좋은 조건을 거절했냐.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한 뒤 유현이 지겹도록 들은 질문들이었다.
그때마다 유현은 답했다.
자신은 성공할 거라고, 쿠어스 필드를 정복하고 사이영 상 수상자가 될 거라고.
대답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유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더 이야기해 봐야 기삿거리밖에 안 되고 논란은 계속될 거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개막 전까지 계속 이어질 거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쿠어스 필드를 정복할 수 있다는 걸 실력으로 보여 주는 것.
* * *
고향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현의 일과를 정리하자면 크게 세 가지였다.
먹방, 휴식, 그리고 운동.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차고 넘치지만,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집밥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모처럼 맛보는 집밥에 유현은 행복함을 느꼈다.
게다가 유현의 어머니는 음식 솜씨 또한 좋은 편이었기에, 땅의 정령 또한 식사를 하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뭐, 가끔씩은 뉴욕에서 머무는 내내 땅의 정령이 지겹게 노래를 부르던 불화산 치킨을 시켜먹기도 했지만 말이다.
또한 유현은 집에서 푹 쉬었다.
마당에 설치해놓은 해먹에 드러누워 해가 질 때까지 잔 적도 있고, 소파에 드러누운 채 드라마 한 작품을 종일 정주행하기도 했다.
시즌 중에는 마음 편하게 쉴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시간이 날 때 푹 쉬어둘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도 운동을 빼먹지는 않았다.
스프링 트레이닝을 준비하기 위해 몸 상태를 끌어 올리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는 필수였다.
날이 추워 많은 훈련을 하진 못했지만, 매일 같이 읍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근력 운동과 체력 관리에 힘썼다.
12월 말까지 휴식을 취한 뒤.
유현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스프링 트레이닝 참여를 위해 본격적으로 컨디션을 끌어 올릴 시기가 다가왔다.
“우린 개막전 맞춰서 가면 되는 거지?”
“네. 메켄 코퍼레이션 한국 지사 직원한테서 따로 연락이 갈 거예요. 그쪽에서 출국 준비 도와줄 거니까 어려울 건 없을 거예요.”
“그래. 그래도 개막전은 직접 봐줘야지.”
“하하하. 열심히 준비해야겠네요.”
유현은 부모님을 개막전에 초대했다.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로.
이는 유현과 콜로라도 로키스 간의 계약에 포함되어 있는 조건 중 하나였다.
부모님에게 한 달에 한 번 퍼스트 클래스를 제공하고, 덴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을 제공하며, VIP석에서 경기를 볼 수 있도록 최선의 편의를 보장할 것.
개막전에 부모님을 초대한 유현은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가는 내내 땅의 정령과 스프링 트레이닝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메이저리그의 스프링 트레이닝은 KBO리그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다르지. 음. 아마 컨디션 조절을 제외하면 나한테 별 이야기를 안 하지 않을까?’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딱히 먼저 물어볼 일도 없을 거 같고. 아. 타격 연습이나 번트 연습, 주루 연습 같은 건 도움을 받겠지만 말이야.’
-투수로서는 딱히…….
‘애매하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유현은 타격과 관련된 훈련을 하며 컨디션 조절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았다. 대형 계약을 한 투수에게 먼저 조언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유현은 조언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먹성 좋고 잔소리는 심하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투수코치가 머리 위에 있는데 굳이 도움을 청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스프링 트레이닝 전에 확실하게 목표를 정해 놓고 훈련하자.
‘역시 목표라면 그거겠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두 구종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면 쿠어스 필드에서 생존하지 못할 테니까.’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도 고민해야겠지만, 일단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먼저지.
메이저리그 데뷔를 앞둔 유현과 땅의 정령의 목표는 확고했다. 어떻게 해야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 투수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철저한 그라운드 볼러가 되자.
명확한 목표를 지닌 채 유현이 시즌 준비를 위한 담금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