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계약 (3)
콜로라도 로키스.
메이저리그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이자 투수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하는 구단이다.
쿠어스 필드의 악명은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큼 유명하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쿠어스 필드가 위치한 덴버의 해발 고도다.
워낙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공기가 건조하면서 밀도가 낮고, 이 낮은 밀도가 투구 시 문제를 야기한다.
좀 더 파고들면 낮은 공기 밀도로 인해 공의 마찰력이 적어지고,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이 투수들의 발목을 잡는 거라나 뭐라나.
게다가 공기 저항이 워낙 적은 구장의 특징으로 인해 평범한 외야 플라이가 홈런이 되기도 할 만큼 타구가 다른 구장들에 비해 멀리 날아간다.
투수들에게는 투구를 할 때도, 투구 이후에도 에로사항이 많은 구장이라고 보면 된다.
더 큰 문제는 높은 해발고도로 인해 호흡이 힘들어져 고산병처럼 피로감이 급증하는 선수들이 많다는 것이다.
LA다저스의 한 선수는 쿠어스 필드에서 원정 경기를 치르며 두 번이나 심장 이상 증세를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다.
여하튼.
중요한 건 쿠어스 필드가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이라는 것이다.
여타의 구장들과 차원이 다른 이 타자 친화형 구장은 통산 타율 2할 6푼 5리를 기록하던 그저 그런 베테랑 타자를 3할 타자로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1억 달러를 주고 데려온 투수가 네 시즌 동안 방어율 5.35를 기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유현은 그 쿠어스 필드에서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껏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으로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왕 도전하는 거,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못한 기록에 도전하고 싶었다.
게다가 성공에 대한 확신 또한 있었다.
-아마 포심 패스트볼은 말을 안 들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망할 구장에서는 패스트볼의 구속이 빨라지는 대신에 회전수가 감소하거든.
‘구속은 빨라지는데 회전수가 감소해? 그럼 그냥 빠른 배팅볼이잖아.’
-맞다. 그래서 패스트볼이 주 무기인 투수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지. 뭐……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는 어느 정도 말을 들을 거다.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철저하게 그라운드 볼러가 되어라, 그 말이네?’
-정답이다. 그 점만 명심하면 쿠어스 필드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거다.
땅의 정령은 유현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듣지 않더라도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힘으로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면서도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란 확신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유현과 땅의 정령이 그토록 원하던 콜로라드 로키스와의 계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댄 러스크.
콜로라도 로키스를 이끌고 있는 40대 초반의 단장은 KBO리그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3개 구단을 거쳐 콜로라도 로키스에 안착해 2년 연속 필승조로 맹활약을 한 오수완이 그 계기였다.
실력이 뛰어난 KBO리그 선수가 메이저리그 현역 선수보다 가성비에서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그는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KBO리그에서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상황을 주시했다.
중요한 건 ‘실력이 뛰어난’이라는 전제가 붙는다는 거였다. 단순히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게 아니라 수준급 활약을 펼쳐 줄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오는 게 목표였다.
강태영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참았다.
강태영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아닌 콜로라도 로키스로 왔다면 시즌 50홈런을 가뿐히 기록할 수 있는 타자였지만,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타자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는 좋은 타자들은 제법 많다. 게다가 2020시즌을 기점으로 트리플A에서 승격될 괴물 신예가 두 명이나 더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좋은 타자를 구매하기 위해 거액을 지불하는 건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선 지극히 비효율적인 소비였다.
댄 러스크는 타자가 아닌 투수에 집중했다.
2019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KBO리그 투수는 총 세 명이었다.
그리고 그 중 댄 러스크의 시선을 집중시킨 건 오로지 유현 한 명뿐이었다. 다른 투수들과 달리 유현은 쿠어스 필드에서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
유현과 함께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드러낸 다른 두 투수는…….
솔직히 기량 미달이었다.
한 시즌 10승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가능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힘든 그저 그런 투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나마도 가능성을 높게 점친 거였다.
여환진이나 오수완이 희귀 케이스고, 유현에 대한 기대가 이례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KBO리그 투수는 메이저리그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한계를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
극소수의 KBO리그 투수들만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유현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대부분의 팀들이 유현을 팀의 2선발급으로 생각하고 영입 의사를 타진할 만큼, 그는 뛰어난 기량을 지닌 가치 있는 투수였다.
“저희는 유현 선수가 투수들의 무덤에서도 좋은 피칭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으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듣기로는 쿠어스 필드에서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네. 정말입니다. 낮은 공기 밀도로 인해 마찰력의 감소로 구속은 높아지는 반면, 회전은 줄어들어서 말을 안 듣게 되는 거죠. 유현 선수라면 100마일을 기록할 수도 있겠네요. 그 공이 위력적일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제가 패스트볼 4종 세트를 던지는 투수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물론이지요.”
“그런데도 로키스에서 저를 원하는 이유가 있나요?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저에게도 통용될 텐데 말이죠.”
댄 러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의 질문이 충분히 이해됐다.
투수의 입장에서, 특히나 패스트볼 4종 세트가 주 무기인 유현 입장에선 쿠어스 필드의 특징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으리라.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패스트볼이 말이 안 듣는 쿠어스 필드에서 유현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에도 댄 러스크는 유현을 원했다.
아니, 정확히는 유현이 몸값 이상의 맹활약을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월드 시리즈 진출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답 전에 저도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로키스와의 계약을 결정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분명 저희와 비슷하거나, 더 좋은 조건을 부른 구단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면서 사이영 상을 받는 최초의 투수가 되고 싶어서요.”
“사이영 상이라…….”
댄 러스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쁜 대답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은 목표네요. 질문에 대답을 드리자면, 적어도 투심과 커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기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유현 선수가 매 시즌 15승 이상을 책임져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만약 포심과 스플리터도 문제가 없다면요?”
“그럼 저희는 유현 선수와 옵트아웃을 행사하지 않기를, 하더라도 저희와 최우선으로 협상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되겠죠.”
빌어먹을 투수들의 무덤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다. 패스트볼이 말을 듣지 않으니 강력한 무기 하나를 빼앗기고 마운드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실제로 상당수의 사이영 상 수상자들이 쿠어스 필드에만 오면 난조를 보이곤 했다.
유현은 쿠어스 필드에서 성공한 투수와 실패한 투수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는 투수다.
적어도 KBO리그의 최고의 회전수를 자랑하며 라이징성 무브먼트를 보여주던 98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은 맛이 갈 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다른 무기들은 유현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댄 러스크가 유현을 선택한 이유였다.
-저 단장, 아무래도 너에 대해 제대로 조사한 것 같다. 네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야.
‘네가 나에게 해줬던 말이랑 비슷한 뉘앙스인 걸 보니 그런 것 같네.’
-쿠어스 필드가 투수들의 무덤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투수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실제로 로키스는 2018시즌에는 그럴 듯한 선발 라인업을 완성하기도 했고.
‘덕분에 이번 시즌 지구 1위를 할 수 있었지.’
-아무튼, 넌 투수들의 무덤에서도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 거다. KBO리그에서처럼은 아니지만.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KBO리그에서처럼 정신 나간 성적을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투수들의 무덤에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것 같지도 않았다.
댄 러스크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는 KBO리그에 대해 아는 게 많았고, 특히나 유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한 게 티가 날 정도로 아는 정보가 많았다.
덕분에 유현은 댄 러스크와 늦은 저녁까지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댄 러스크는 뉴욕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메켄 코퍼레이션 측에서 제공한 유현의 메디컬 테스트 결과를 검토하고, 자체적으로도 메디컬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메디컬 테스트 결과.
“놀랍군요. 작은 부상조차 없다니, 도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해야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까?”
유현의 몸 상태는 신기할 정도로 건강했다.
2018시즌 전까지 수술과 재활을 반복했던 투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완벽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달고 사는 자잘한 부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15승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기량을 지닌 투수가 부상까지 없다.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메디컬 테스트 결과까지 확인한 마당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곧장 계약이 진행됐다.
유현이 데이비드 메켄과 함께 계약서의 모든 조항을 꼼꼼히 확인한 뒤 사인을 하는 그 순간, 댄 러스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은 채 유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산 사나이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유현 선수.”
* * *
[유현, 콜로라드 로키스와 옵션 포함 총액 1억 3600만 달러에 계약.]
[KBO리그의 지배자, 투수들의 무덤 입성!]
[유현이 로키스 행을 결정한 이유.]
[콜로라스 로키스 공식 SNS, 유니폼 입은 유현 사진 공개!]
[유현의 로키스 행, 위대한 도전인가 무모한 시도인가.]
포스팅 입찰액 2000만 달러.
계약금 1000만 달러.
6년 동안 보장 금액 6000만 달러, 첫 세 시즌 동안은 보장 금액 1800만 달러.
거기에 매 시즌 옵션 1100만 달러가 책정되어 총액 1억 3600만 달러의 계약이 체결됐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도, 유현의 입장에서도 이득인 계약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 봤을 땐 보장 금액은 계약금까지 해서 7천만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 6600만 달러는 옵션이다. 게다가 첫 세 시즌까지는 옵션을 모두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포스팅 입찰액을 포함해 도합 8100만 달러를 지불하면 된다.
갈수록 투수들의 몸값이 과도하게 비싸지고 있는 상황에서, 매 시즌 15승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이 높은 투수를 3년 8100만 달러에 사용한다는 건 구단 입장에서는 손해볼 게 없는 장사다.
옵트 아웃을 행사하던 행사하지 않던 말이다.
반면 유현 입장에서는 3년 동안 6100만 달러를 받으며 활약한 뒤 옵트 아웃으로 대박 계약을 노려볼 수 있으니 마찬가지로 남는 장사였다.
물론 이는 유현이 15승․2점대 방어율․200탈삼진이라는 옵션을 모두 충족시킬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유현의 계약 이후.
상당수의 현지 언론에서 유현과 콜로라도 로키스의 계약을 질투하기라도 하듯이 그와 관련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언론들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유현의 오만한 선택이, 겁 없는 도전이 그의 커리어를 망칠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