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93화 (93/155)

93화 계약 (2)

사실 메이저리그 진출과 관련해서 유현이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건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현은 자신이 원하는 구단과 조건을 말했고, 메켄 코퍼레이션은 유현이 원하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구단들과 협상을 진행할 것이다.

유현은 그저 메켄 코퍼레이션으로부터 중간보고를 들으며 상황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과 더 챙겨야 할 걸 정해주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2016시즌을 앞두고 10년 3억 2천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킨 후 전면에 나선 적이 없던 데이비드 메켄이 알아서 해주리라.

유현은 데이비드 메켄을 믿었다.

메켄 코퍼레이션과 계약을 한 건 알리사 메켄 때문이 아니라, 선수가 원하는 계약을 반드시 성사시켜준다고 알려진 메켄 코퍼레이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구단들에게는 악마로 통용되지만 뭐 어떠하랴.

자신은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다면 선수 입장에서는 최고의 에이전트 아니겠는가.

데이비드 메켄은 영리한 에이전트다.

포스팅 입찰 구단 발표 후 나흘 동안 그 어떤 구단과도 협상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소문을 퍼트렸다.

유현이 몇몇 구단과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해당 구단들이 유현이 원하는 금액과 조건을 모두 맞춰주려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5일째 되는 시점에서야 유현이 후보로 점찍었던 구단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메켄이 거짓 소문을 퍼트리며 느긋하게 협상에 임하는 건, 느긋할수록 더 좋은 조건에 계약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급한 건 유현이 아닌 구단들이다.

유현을 원하는 구단은 무려 13곳이나 된다.

포스팅 시스템 사상 유례가 없는 경쟁이 붙은 상황에서, 구단들은 메켄 코퍼레이션의 의도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현은 그런 데이비드 메켄의 보고를 매일 저녁 들으며 훈련과 데이트를 병행했다.

계약과 관련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1순위로 원하는 구단과 계약하느냐 2순위로 원하는 구단과 계약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계약 자체는 원하는 조건에 할 수 있다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포스팅 입찰 구단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선배님!”

“보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김정수와 송명현이 메켄 코퍼레이션 본사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했다.

유현과 함께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두 선수는 메켄 코퍼레이션과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두 선수 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KBO리그에서도 에이전트 제도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기에 손해 볼 건 없었다.

무엇보다 메켄 코퍼레이션은 김정수와 송명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에 지사를 설립, KBO리그의 톱클래스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예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김정수와 송명현은 유현과 함께 오프 시즌 동안 함께 훈련하며 겸사겸사 몇몇 구종의 그립을 배우기로 했다.

김정수의 경우 스플리터, 송명현의 경우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전수받았다.

두 사람 중 구종 습득력이 더 뛰어난 건 송명현 쪽이었다. 2019시즌 내내 투심 패스트볼을 꾸준히 던졌었기에, 유현이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확연히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와 동시에 숙제 또한 안았다.

“선배님. 무브먼트가 좋아진 건 희소식이긴 한데, 그만큼 제구가 어려워진 거 같습니다.”

“원래 무브먼트가 지저분한 구종이라 제구가 좀 까다롭긴 하지. 그래서 제구가 안 되는 날엔 난타를 당할 수도 있는 구종이기도 하고.”

“끄응. 결국 제구를 잡는 게 관건이겠군요.”

“내가 작년에 하면서 효과를 본 제구력 강화 훈련이 있는데 너도 한번 해 봐. 꾸준히 하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선배님이 직접 하신 훈련이라니까 완전 신뢰가 됩니다. 믿고 해보겠습니다.”

무브먼트가 지저분한 투심 패스트볼은 제구를 잡는 게 어렵기로 유명한 구종이다. 투심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투수가 적은 건 제구를 잡는 게 타 구종에 비해 유독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구를 잡았을 때 땅볼 유도에 최적화된 위력적인 구종인 것도 사실이다.

2019시즌.

송명현이 투심 패스트볼을 가끔씩 섞어 던지기만 했던 건, 제구가 안 되고 무브먼트가 밋밋하기에 주 무기로 사용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일단 무브먼트는 유현의 도움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결됐다. 이제 남은 건 투심 패스트볼을 원하는 코스로 던질 수 있을 만한 제구력을 갖추는 거였다.

“열심히 해서 2020시즌에는 투심 패스트볼을 서드 피치로 사용하겠습니다.”

“그래. 투심 패스트볼만 제대로 던질 수 있으면 타자들이 골치 좀 아파할 거다. 4년 더 리그 씹어 먹고 메이저리그로 넘어와.”

김정수는 3년 후, 송명현은 4년 후.

1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두 선수 모두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거라고 유현은 확신했다.

강속구를 뻥뻥 뿌리고 변화구 또한 좋은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으면 어떤 투수가 진출하겠는가.

* * *

유현이 김정수와 송명현에게 그립을 가르쳐주고 제구 잡는 훈련법을 전수해주고 있을 때, 데이비드 메켄은 비행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 협상이 급진전됐다.

유현이 가기로 원하는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원하는 조건을 물어보았고, 원하는 조건을 대부분 맞춰 줄 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것이다.

이에 데이비드 메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하는 조건을 대부분 수용해 주겠다고 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해당 구단에서 고민을 해보자고 한 조건 또한 해결법이 존재했다.

늦은 저녁.

데이비드 메켄이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홀로 기다리고 있던 사내와 악수를 했다.

“2014시즌 이후 처음 뵙는군요.”

“그때는 메켄 씨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죠. 덕분에 지구 우승을 이끌 수 있었고, 그때의 실적을 인정받아 이렇게 단장으로 스카우트까지 됐죠.”

“단장직이 제법 잘 어울리시는 거 같습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지구 우승을 했는데도 팬들은 만족하지를 못하더군요. 결국에는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가 필요합니다.”

“절 일선에 복귀하게 한 고객님께서 단장님과 팬들의 염원을 이뤄 줄 겁니다.”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군요.”

커피를 마시며 대화가 이어진 지 30여 분이 지났을 때, 데이비드 메켄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계약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금액 부분만 제외하면 다른 조건은 모두 수용할 거라는 거죠?”

“네. 수용할 생각입니다.”

“그럼 금액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20퍼센트 정도만 낮췄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면 큰 문제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럼…….”

“조건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금액은 말씀드린 대로 맞춰 주셔야 합니다. 단. 저희 고객이 보장으로 받길 원하는 금액은 6년 6천만 달러입니다.”

데이비드 메켄의 말에 사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데이비드 메켄이 어떤 의도로 말을 하고 있는지 대번에 간파한 것이다.

더불어 어째서 예상보다 더 높은 규모의 금액을 자신감 있게 제시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머지는 옵션으로 하겠다는 겁니까?”

“네. 저희 고객께서는 금액의 상당 부분을 옵션으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너무 쉬운 옵션은 곤란합니다.”

“시즌 200이닝 이상 소화, 15승에 2점대 방어율과 200탈삼진 이상을 기록, 이 정도면 쉽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부상만 없다면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서로 윈윈 아닐까 싶습니다만.”

보장 금액은 6년 6천만 달러, 즉 매 시즌 1천만 달러의 규모다. 그나마도 첫 세 시즌은 도합 1800만 달러만 받는다.

나머지 금액은 매 시즌 200이닝을 소화하며 15승에 2점대 방어율과 200탈삼진 이상을 기록해야지 받는 게 가능하다.

구단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옵션을 모두 챙길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는 투수라면, 1선발 수준의 맹활약을 하는 투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들의 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월드 시리즈 도전에 번번이 실패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에이스 말이다.

어차피 선발진은 보강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투수들을 사오는 데에는 유현을 데려오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든다.

전액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옵션이 반 이상인 데다, 3년 동안 6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면 옵트아웃이 되는 조항 또한 넣을 예정이다.

그 3년 안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면?

거액을 투자하긴 했지만 가성비로 봤을 때 매우 만족스러운 계약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원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고객님께서 아주 기뻐할 만한 소식이군요. 계약은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다.”

“제가 직접 뉴욕으로 가겠습니다.”

사내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덧붙였다.

“계약을 하기 전에 두 눈으로 유현 선수의 진가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유현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가 다가왔다.

* * *

한참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유현은 갑작스러운 데이비드 메켄의 전화를 받고서 훈련을 중단했다.

그리고 알리사 메켄과 김정수와 송명현과 함께 저택에서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데이비드 메켄은 좋은 소식을 전해줬다.

유현이 원하는 구단의 단장과 협상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유현 선수를 직접 보고 싶다 해서 뉴욕으로 함께 넘어갈 예정이다.

사실상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라는 거였다.

-결국 그 팀으로 가는 거냐?

‘그렇다고 봐야지. 단장을 직접 데려온다는 건 계약과 관련된 조율이 모두 끝났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협상이 끝났는데 수정사항이 없다는 건, 내가 원하는 조건을 그 구단에서 모두 수용해 주겠다고 한 걸로 봐야 하고.’

-흐음. 재밌는 선택이야.

‘맞아. 재밌는 선택이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 재밌는 선택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선택이라면 보스턴 레드삭스나 뉴욕 양키스처럼 빅 마켓인데다 전력마저 탄탄한, 월드 시리즈 우승에 당장 도전이 가능한 팀과 접촉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유현이 원하는 구단으로 가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데이비드 메켄이 제대로 협상을 진행한 건 유현이 원하는 구단뿐이었다. 다른 구단들과는 형식적인 접촉을 하는 데에 그쳤다.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선택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대기록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전하는 거라지만, 도전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대형 투수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은 투수들이 기피하는 구단이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유현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구종이라면 그 구단에서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예상했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오후 7시 즈음.

데이비드 메켄의 차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수석에서 한 사내가 미소를 지은 채 데이비드 메켄과 함께 내렸다.

이내 사내가 유현을 향해 다가왔다.

유현은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해당 구단에 대해 정보를 수집할 때 사진과 영상을 통해 수십 차례 본 사람이었다.

사내가 미소를 지은 채 유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덩달아 미소를 지은 유현이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유현 선수. 콜로라도 로키스의 단장, 댄 러스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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