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계약 (1)
뉴욕에 도착한 유현과 알리사 메켄 커플이 향한 곳은 맨해튼 외각에 위치한 데이비드 메켄의 초호화 저택이었다.
“사위 왔습니까.”
“아하하. 오랜만입니다, 데이비드 씨.”
“음. 한국말을 좀 더 연습해야겠습니다. 아직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메켄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자 알리사 메켄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메켄은 유현을 사위 대하듯이 대했다. 알리사 메켄으로부터 2020시즌이 끝난 뒤 결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슬쩍 전해 들었고, 유현 정도라면 최고의 사윗감이라고 생각했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유현은 데이비드 메켄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쪽에서 바비큐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고, 한 병에 무려 10만 달러나 하는 와인도 유현과 함께 마시기 위해 와인 창고에서 흔쾌히 꺼내 올 정도였다.
그리고 알리사 메켄은 술잔을 기울이려는 유현을 근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으음. 시차 때문에 쉬는 게 나을 텐데.”
“괜찮습니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대한민국에서 뉴욕으로 왔으면 시차 때문에 못해도 하루 이틀은 고생해야 하건만, 유현은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것 치고는 너무 쌩쌩했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알리사 메켄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식사 대신 저택 한쪽에 위치한 스파를 즐기러 간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땅의 정령님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10초 만에 시차 적응이 끝났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땅의 정령님께 바비큐 풀코스를 진상하시길 바랍니다!]
땅의 정령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축복을 통해 유현의 시차 적응을 10초 만에 끝내줬다.
덕분에 유현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데이비드 메켄이 정성들여 준비한 바비큐를 땅의 정령과 함께 배부르게 먹었고, 이후에는 와인을 마시며 데이비드 메켄과 대화를 나눴다.
“알리사가 말하기로 2020시즌을 끝내고 결혼할 예정이라고 하던데요.”
“안 그래도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알리사가 먼저 말을 했나 보네요. 네. 알리사와 2020시즌을 끝내고 결혼할 생각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장거리 연애를 결심할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알리사와 평생을 약속하고 싶습니다.”
“흐흐. 유현 선수 정도면 사윗감으로서 최고죠. 우리 사위가 술을 얼마나 잘 마시나 볼까요?”
“오늘 와인 창고 텅 빌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원 없이 마셔도 됩니다.”
유현은 허언을 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술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운동에 방해가 되니 오프 시즌에 가끔 마시는 걸 제외하면 입에 대지 않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데이비드 메켄과 술잔을 기울이며 유현은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술 잘 마시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데이비드 메켄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취기가 오르기 전, 데이비드 메켄이 적절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며 입을 열었다.
“유현 선수. 아시는 대로 4일 후에 최종 입찰 구단 리스트가 KBO에 전달되고, 이후 KBO에서 대전 펠컨스 프런트에 전달할 겁니다. 그리고 유현 선수는 2000만 달러를 적어낸 다수의 구단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됩니다.”
“협상 기간은 한 달이고요.”
“맞습니다. 뭐…… 제 생각으로는 한 달을 다 채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3억 달러를 달라는 수준의 요구만 아니라면 유현 선수가 원하는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제가 원하는 팀에게요?”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발 빠르게 움직인 거 아니겠습니까.”
메켄 코퍼레이션은 유현의 성공적인 계약을 위해 일찌감치 현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우호적인 언론사들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KBO리그를 폭격하는 괴물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보다 많은 구단이 유현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수요가 넘쳐나는데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올라가는 게 당연한 이치이니까.
한국시리즈 1차전에 13구단, 한국시리즈 4차전에 15구단.
유현을 직접 보기 위해 스카우터를 파견한 메이저리그 구단의 수다.
그리고 그중 6구단은 아예 스카우터를 상주시켜 놓고 유현의 모든 등판 경기를 직관하고 데이터를 남겼다.
메켄 코퍼레이션이 바라던 경쟁 구도를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 물론.
데이비드 메켄은 유현에게 그가 원하는 구단과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유현이 해당 구단을 원한 이상, 애초에 다른 구단은 몸값을 올리기 위한 들러리이며 협상 대상으로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고객이 원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지 계약을 성사 시켜준다.
구단에게는 악마이지만 선수에게는 천사인 메켄 코퍼레이션의 신조다.
실제로 메켄 코퍼레이션은 메이저리그 역사를 좌우한 대형 계약을 수차례 성사시켰을 정도로 구단들의 머리 위에서 놀았다.
이번 목표는 월드 시리즈 우승이 간절하고, 최고의 투수만 있다면 정말로 월드 시리즈 우승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팀이다.
그들은 유현을 원하고 있다.
중요한 건 몸값이지만, 아마 유현의 요구소항은 대부분 수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그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유현과 같은 기량을 지닌 메이저리그 선수를 영입하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는 걸.
데이비드 메켄이 미소를 지었다.
“유현 선수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일단은 알리사와 함께 뉴욕 관광을 하면서 푹 쉬시길 바랍니다. 포스팅 결과가 나오더라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유현 선수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건,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 말고는 없을 겁니다.”
최고의 고객 중 한 명이자 어쩌면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데이비드 메켄이 모처럼 구단들의 악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 * *
[하루 남은 포스팅 입찰 마감, 과연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선택은?]
[A해설위원 “최소 6개 팀 입찰했을 것.”]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 “우린 항상 최고의 선수를 원한다. 돈은 준비되어 있다.”]
[포스팅 마감까지 남은 하루, 역대 KBO리그 출신 메이저리거들의 몸값은?]
유현의 포스팅 입찰 마감을 앞두고 대한민국 야구 관련 기자들은 유현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대부분의 관심은 한 가지였다.
유현을 영입하기 위해 몇 개 구단에서 최고 입찰액을 적어냈을까?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보통 6~8구단 정도를 예측했다. 계약 규모까지 감안해 현실적으로 유현의 영입이 가능한 구단들만이 경쟁에 뛰어들 거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포스팅 입찰 결과를 KBO에 전달했을 때, 포스팅 관련 담당자들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지금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죠?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죠?”
“맞는 것 같은데요.”
“많이 참여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 유현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나네요. 여환진 선수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여환진 선수도 대단했지만, 유현 선수는 KBO리그의 기록 자체를 갈아엎었잖아. 클래스가 다르다고 봐야지.”
“자자. 잡담은 그만 하고 펠컨스 프런트에 포스팅 입찰 결과 전달합니다. 그쪽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KBO에서는 포스팅 입찰 결과를 확인한 뒤 곧장 대전 펠컨스 프런트에 공문을 보냈다.
공문을 확인한 대전 펠컨스 프런트 또한 KBO의 포스팅 담당 직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공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일제히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진짜 대박인데요?”
“유현 선수가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음. 제가 아는 유현 선수라면 별 신경 안 쓰고 운동하면서 여자친구랑 뉴욕 관광할 거 같은데요?”
“유현 선수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그쪽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겠네요.”
“그럼 우린 이제…….”
“메켄 코퍼레이션 쪽에 연락하고 공식 보도자료 돌려야죠. 자자. 얼른 업무 처리하고 일찍 퇴근해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합시다.”
약 1시간 뒤.
대전 펠컨스 프런트는 언론사들에게 공식으로 보도 자료를 돌렸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언론사들은 유현의 포스팅 결과와 관련해서 기사를 쏟아냈다.
[유현, 13개 구단의 선택 받아!]
* * *
LA다저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휴스턴 에스트로스, 시애틀 매리너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시카고 컵스, 콜로라도 로키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밀워키 브루어스까지.
총 13구단이 최종적으로 유현의 포스팅 최고 입찰액을 적어 낸 구단이 됐다.
유현은 한 달 동안 해당 13개 구단과 자유롭게 협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한 달 동안 계약을 하지 못하면 포스팅 입찰이 무효화되며 유현은 다시 대전 펠컨스 소속으로 돌아가지만, 유현이나 메켄 코퍼레이션이나 계약과 관련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2주 안에 결판을 내겠습니다.”
데이비드 메켄은 자신감이 넘쳤다.
직원들을 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협상에 나설 생각이니만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2주도 길게 잡은 거였다.
열흘.
딱 열흘이면 유현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사이 유현은…….
“음. 뉴욕에 와서 비빔밥 맛집을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양식 먹고 싶어요?”
“아뇨. 슬슬 물리려고 해요.”
“후후. 그럴 거 같아서 여기 오자고 했어요. 여기 비빔밥이랑 제육볶음이 기가 막히거든요.”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네요. 못 먹을 정돈 아닌데 생각보다 느끼한 게 많은 거 같아요.”
“구단이 제공하는 음식에 한식 추가해 달라고 옵션 넣을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넣어야죠.”
오전에는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알리사 메켄과 뉴욕 전역을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만나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의외인 건 미국인 중에서도 유현을 알아보는 팬들이 더러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뉴욕 양키스 팬들이었다.
뉴욕 양키스 팬들은 유현이 양키스와 계약하기를 바랐고, 팀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해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박살내 주기를 바랐다.
뉴욕 양키스는 두 시즌 연속으로 다른 지구였으면 손쉽게 1위를 했을 만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두 시즌 연속 100승 이상을 기록하며 광속 질주를 한 보스턴 레드삭스에 막혀 와일드카드 결정전으로 포스트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2020시즌.
그들의 목표는 지구 라이벌인 보스턴 레드삭스를 제치고 지구 1위를 하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 뉴욕 양키스 팬들은 유현과의 계약을 원했다. 유현을 영입해서 선발 라인업이 한층 탄탄해지기를 바랐다.
물론 유현을 알아본 팬들 중 일부는 유현이 KBO리그에서 보여 준 활약상을 전혀 몰랐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유현의 영입을 강력히 원한다는 것, 그리고 지역 언론에서 양키스가 레드삭스를 이기려면 유현을 영입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기에 얼굴을 알아보는 거였다.
뉴욕 양키스 팬들의 열정적인 공세에 유현은 혀를 내둘렀다.
“다들 열정이 엄청나네요.”
“레드삭스에게 2년 동안 막혔으니 저럴 만도 하죠. 충분히 이해돼요.”
“레드삭스에 가면 양키스 팬들에게 맞아 죽을 거 같고, 양키스에 가면 레드삭스 팬들에게 맞아 죽을 거 같은데요.”
“으음. 팬들끼리 서로 칼로 찌르고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끔찍하네요.”
협상을 위해 주어진 한 달.
유현은 협상에 관심이 없었다.
알리사 메켄과 그 동안 밀린 데이트를 하며, 데이비드 메켄이 좋은 결과를 들고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