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91화 (91/155)

91화 굿바이 (3)

2000년대 들어 대전 펠컨스가 낳은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꼽으라면, 아마 팬들은 네 선수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누적 스탯의 끝판왕이자 은퇴 후 영구결번이 예약되어 있는 김태성, 암흑기의 에이스였으며 현재는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하게 활약을 이어 나가고 있는 여환진, 2018시즌부터 에이스로 자리매김하며 한국시리즈 2연패의 1등 공신이었던 유현.

마지막으로 김태성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괴물 같은 활약을 보여 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30-30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강태영이었다.

네 선수 중 대전 펠컨스 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 같은 답할 것이다.

강태영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이다.

잘생긴 외모, 타고난 입담, 거기에 대전 펠컨스 팬이라면 강태영의 사인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몸에 밴 팬서비스까지.

여환진처럼 전국구 스타인 강태영은 대전 펠컨스 팬들의 자존심이었다.

그런 강태영이 유현의 팬 미팅에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그아웃에서 팬 미팅을 지켜보고 있던 대부분의 선수들조차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기습 방문이었다.

강태영이 오늘 귀국한다는 건 일부 선수들은 알고 있었고, 팬 카페에 퍼진 소식을 통해 일부 팬들에게도 알려졌다.

이미 관련 기사가 뜨기도 했고 말이다.

다만 귀국한 강태영이 곧장 펠컨스타디움으로 와서 유현의 팬 미팅을 도와줄 거라고 예상한 팬이 거의 없었다.

기습적인 강태영의 방문에 팬들은 열광했다.

원래 선물은 예고하고 받는 것보다 기습적으로 받는 게 더 좋은 법 아니겠는가.

강태영 덕분에 펠컨스타디움 1루 응원석이 후끈 달아올랐다. 모처럼 강태영을 보는 선수들도 적극적으로 1루 응원석으로 올라와 팬들과 호흡하며 유현의 팬 미팅 자리를 빛내 줬다.

사회인야구를 하는 몇몇 팬들에게는 유현이나 다른 선수들이 직접 투구 폼이나 타격 폼에 대해 짧게나마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팬들과 헤어질 시간이 됐다.

팬 미팅의 마무리를 앞두고서 유현은 팬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동시에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메이저리그에 가서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야구할지 새벽에 야구할지 알 수 없지만, 여러분이 바쁜 시간 쪼개서 제 등판 경기를 보실 때마다 희열을 느낄 수 있는 피칭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에도 계속 사랑해주시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렇게 메이저리그로 떠나기 전, 유현의 공식 일정이 마무리됐다.

* * *

팬 미팅을 끝낸 유현은 강태영과 저녁 식사를 한 뒤 가볍게 와인 한잔 하면서 늦은 저녁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다.

10개월 만에 보는 것이다 보니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음에도 대화가 좀처럼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태영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유현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가고 싶은 팀은 정했냐?”

“정했지.”

여환진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는 최고 입찰액을 적어 낸 구단에게 우선 협상권이 주어졌고, 협상이 결렬되면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해 일부 구단에서는 최고 입찰액을 적어 낸 뒤, 일부러 협상을 결렬시켜서 해당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막은 적도 있었다.

지구 라이벌 팀이 해당 선수를 데려갈 게 유력했기에 일부러 훼방을 놓은 것이다.

포스팅 시스템은 기량이 만개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이지만 단점 또한 존재했고, KBO리그의 경우 일본보다 늦게 2018시즌이 돼서야 문제점이 일부 고쳐지게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최고 입찰액이 2000만 달러로 제한됐고, 입찰액을 적어 낸 구단이 다수일 경우 선수가 해당 구단 전체와 동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거였다.

유현의 몸값이 얼마일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정확한 건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최고 입찰액을 적어 내는 구단이 다수일 거라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LA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포함한 몇몇 빅 마켓 구단들은 일찌감치 유현의 포스팅에 참여할 거라 공표하기도 했다.

“너 진짜 레드삭스 올 생각 없냐? 너 있으면 내년에도 월드 시리즈 우승은 예약하는 건데.”

“레드삭스 가면 좋겠지. 2년 연속 메이저리그 최다승 거둔 팀이고, 포스트 시즌 전승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한 팀에 전력 누수도 없으니까 좋은 선택지라고 봐.”

“어째 말하는 게 레드삭스 올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1순위는 아니지.”

강태영은 유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현재 자타공인 메이저리그 최고의 강팀이다. 투타 모두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2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할 만큼 좋은 성적을 냈다.

게다가 강태영이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에 맹활약을 하며 KBO리그 선수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지역 언론지에서 유현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며 영입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는 유현에게 거액의 몸값을 지불할 만한 실탄 또한 충분한 팀이다.

사치세?

훗날 선수단 규모를 줄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고의 전력을 갖춘 상황이니만큼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라도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하나라도 더 늘려야 한다는 게 보스턴 레드삭스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만약 유현이 보스턴 레드삭스에 간다면 월드 시리즈 우승에 가까워질 수 있다.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보다 더 완벽한 전력을 보유한 팀이 없는 만큼, 유현의 합류도 선발진이 한층 더 탄탄해진다면 2020시즌에도 대권을 노려보고도 남을 테니까.

정작 유현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도 많이 줄 수 있고 전력도 좋은 팀을 놔두고 도대체 어떤 팀을 가려고 하는 걸까?

강태영의 의문은 유현이 2019시즌을 치르며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구단의 이름을 꺼내면서 해소되었다.

동시에 강태영이 경악했다.

유현의 입에서 나온 구단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그 팀에 가겠다고? 농담 아니지?”

“진짜 갈 거야. 메켄 코퍼레이션 쪽에서는 그쪽에서 나한테 거액을 베팅할 거라 예상하고 있더라고. 두 시즌 연속 선발투수 쪽에서 아쉬움을 드러낸 팀이잖아.”

“그렇긴 한데…… 괜찮겠어? 굳이 그 팀에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이왕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거 제대로 된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그래.”

“메이저리그 진출 자체가 도전인데 제대로 된 도전을 하겠다라……. 넌 진짜 미친놈인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강태영이 말한 것처럼 보스턴 레드삭스로 가는 게, 그게 아니더라도 빅 마켓 구단의 손을 잡는 게 이득이다.

그들은 유현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베팅할 테고,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유현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할 테니까.

그럼에도 유현은 빅 마켓 구단이 아닌 다른 구단과 계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껏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그 어떤 투수도 해내지 못한 대기록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강태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보다 안정적인 미래를 포기하고 과감한 도전을 하는 걸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메켄 씨 머리 좀 아프겠네. 하고 많은 팀들 중에 왜 하필 그 팀인지 모르겠다. 너 잘못하면 계약 끝날 때까지 욕만 먹다가 KBO리그로 복귀하는 수가 있다.”

“네가 볼 땐 내가 실패할 거 같아?”

“흐음. 다른 투수였다면 무조건 실패할 거라고 말할 텐데……. 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팀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다른 투수가 유현과 같은 생각을 했다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리거나, 주제 파악을 못한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KBO리그를 초토화시키며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강태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안정 대신 도전을 선택하겠다고 하는데 제3자가 가타부타 떠들어 봐야 뭐하겠는가.

“뭐…… 이왕 가려고 마음먹은 거 꼭 목표 달성해라. 그 팀 안 갈 거 같으면 레드삭스로 오고.”

“그래. 2순위는 레드삭스일 거다. 다른 팀 갈 거면 네가 있는 팀 가는 게 낫지.”

“그리고 웬만하면 월드 시리즈는 오지 마라. 너 상대할 생각 하니까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뭐래. 이왕 가는 거 당연히 월드 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해야지. 그리고 너 내 공 잘 쳤잖아.”

“그건 네가 각성하기 전이고.”

“작년에도 연습할 잘 쳐 놓고선 무슨.”

“야. 컨디션 안 올라온 투수를 상대로 안타 친 건 친 게 아니야. 솔직히 난 네가 베스트 컨디션일 때 공략할 자신이 없다.”

강태영이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낸 건 사실이지만, 모든 선수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건 아니었다.

천하의 강태영도 공략하지 못한 괴물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메이저리그였다.

압도적인 구위와 안정적인 제구력을 함께 지닌 괴물들, 각 리그에서 사이영 상 경쟁을 하는 이들은 강태영으로서도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태영의 눈으로 봤을 때 유현은 그 투수들과 비슷한 부류였다.

최고 구속 158km의 포심 패스트볼, 포심 패스트볼과 1~2km의 구속 차이가 나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할 때까지 구분하는 게 불가능한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커터를 던지면서 제구가 완벽에 가깝다.

특히나 유현은 제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투심 패스트볼의 제구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투심 패스트볼 중에서도 유독 무브먼트가 지저분한데도 보더라인 투구를 할 수 있었고, 이는 2018시즌과 2019시즌 병살타 유도 1위의 원동력이 됐다.

거기에 야구 지능마저 뛰어나다.

유현은 타자들과의 수싸움에서 항상 우위를 점한다. 타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 낼 줄 알기에, 타자가 어떤 공을 노릴 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강태영은 유현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거라고 봤다.

아, 물론.

그 팀을 가서도 사이영 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강태영은 유현이 잘할 거라 믿었다.

2019시즌 유현의 피칭은 지금껏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을 세울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완벽했으니까.

* * *

2019년 11월 11일.

대전 펠컨스는 예고했던 대로 유현의 포스팅 절차를 진행했다.

그즈음 유현은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인사를 드린 뒤, 어머니께 용돈을 쥐어 드리는 걸 끝으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끝마쳤다.

이후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댄 직후 알리사 메켄이 유현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자기, 긴장돼요?”

“으음. 조금요? 티 나요?”

“자기는 긴장하면 미간이 일그러지거든요.”

“그, 그래요? 오프 시즌에 고칠 수 있게 노력해 봐야겠네요. 전력 분석에 걸릴 수도 있겠어요.”

“안 걸릴 걸요? 옆에 붙어 있는 사람 아니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살짝 일그러지거든요.”

“그럼 다행이고요.”

“긴장하지 마요. 자기라면 원하는 팀과 계약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KBO리그에서 충분히 증명했잖아요.”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팅 신청을 앞둔 상황에서 유현은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가고 싶은 팀에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되는 것, 그 팀의 팬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것.

자신은 있었고 실력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다만 막상 출국을 앞두기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두 달여 동안의 행보에 메이저리그 생활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알리사 메켄이 손을 잡아주며 진정을 시켜준 덕분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그 모든 과정을 유현의 머리 위에서 지켜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징글징글한 커플. 진짜 내가 연애를 하던가 해야지. 더러워서 못 살겠다.

‘암컷 햄스터 한 마리 입양하자니까 그러네.’

-흥. 네가 메이저리그 데뷔 전에 대머리가 되면 그건 내가 네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먹어서라는 걸 명심해라.

‘땅의 정령은 성별이 없나?’

-있지. 근데 대한민국은 남탕이라서.

‘……미국은 남탕이 아니기를 바란다.’

-뉴욕은 남탕이던데, 다른 지역은 다르기를 바라야지. 남탕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땅의 정령의 하소연을 들으며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 함께 메켄 코퍼레이션 본사가 있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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