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굿바이 (2)
흔히 메이저리그에서는 KBO리그를 더블A와 트리플A 사이라고 평가한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절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없는 기량을 지녔지만,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일부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유현은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했다.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걸 넘어 게임에서나 가능할 법한 시즌을 소화했으니까.
한 시즌 동안 도합 3실점을 했다는 건,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서 무실점 호투를 했다는 거다. 심지어 유현은 261이닝을 소화하기까지 했다.
완봉승을 하지 않는 경기를 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유현은 매 경기 마지막 이닝까지 홀로 마운드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 전.
땅의 정령과 유현은 시즌을 준비하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261이닝 3실점이었다.
덕분에 유현은 자신이 있었다.
시즌 내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로 인해 메이저리그 현지에서도 메이저리그 2선발 수준의 활약을 해줄 수 있을 거란 평가를 받는 중이다.
물론 유현은 그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모든 팀의 1선발 수준, 나아가서는 사이영 상을 노릴 만한 기량을 지니고 있는데 2선발로 평가받는 게 불편했다.
물론 이는 리그의 수준 차이를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여환진만 하더라도 4~5선발급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막상 진출한 뒤에는 2~3선발급의 실력을 보여 주며, 결국 6년 1억 2천만 달러의 몸값으로 FA 계약에 당당히 성공하지 않았던가.
결국 중요한 건 메이저리그 진출 후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KBO리그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리그의 수준 차이로 인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유현의 경우 여환진과는 평가가 사뭇 달랐다.
아직 포스팅 신청을 하지 않았음에도 메이저리그 2선발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현역 메이저리거가 더블A나 트리플A에서 한 시즌을 풀로 소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 중 261이닝 3실점을 기록하며 300탈삼진을 달성한 채 시즌을 끝낼 수 있는 투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현실적으로 나오기 힘든 기록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여환진보다 유현에 대한 평가를 높게 했다. 구속, 구질, 제구, 멘탈, 성적 등의 모든 부문에서 유현이 더 나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현의 몸값은 얼마일까?
최소 1억 달러.
메이저리그 현지에서는 유현이 최소 1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할 거라고 내다보았다. 포스팅 입찰 금액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몸값만 놓고서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여환진이 포스팅 입찰 금액을 포함 4년 45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던 걸 감안하면, 유현에 대해 평가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유현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 좋은 계약을 따내고 싶다면 메이저리그 진출 후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원하는 팀으로 가고 싶었다.
* * *
2019시즌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 대 LA다저스의 싸움이었다.
2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포스트 시즌을 진출해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를 전승으로 뚫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보스턴 레드삭스.
지구 1위 콜로라도 로키스에 한 경기 차이로 뒤쳐지며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통해 포스트시즌에 진출, 챔피언십 시리즈 7차전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9회 초 역전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가까스로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LA다저스.
굳이 조금 더 간절한 팀을 따지라고 한다면 보스턴 레드삭스보단 LA다저스였다.
31년 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리며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에 밀리며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통해 힘겹게 월드 시리즈에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이왕 올라온 거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고 말겠다는 선수들의 의지에서는 결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은 자신이 있었다.
2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투타의 밸런스에 완벽에 가깝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만큼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곧 결과로 이어졌다.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내리 승리를 가져가며 손쉽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운 것이다.
챔피언십 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강태영은, 월드 시리즈에서 2홈런 7타점을 기록했지만 5홈런 12타점을 기록한 팀 동료에게 밀려 아쉽게도 MVP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월드 시리즈 다음 날.
LA다저스는 감독을 경질했다.
3년 연속으로 과감한 투자를 통해 든든한 지원을 해 줬음에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건 감독의 클럽 하우스 장악 능력 부족과 선수들과의 갈등이 원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태영은 월드 시리즈 우승 퍼레이드를 즐겼다. 시즌 39홈런 133타점을 기록하며 보스턴 레드삭스의 새 3번 타자로 자리매김한 그에게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강태영이 입국했다.
“강태영 선수.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유현 선수를 잡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메이저리그 첫 시즌에 30-30클럽에 가입했고, 올스타전 MVP가 됐으며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도 끼웠습니다. 내년 목표는 무엇입니까?”
“얼마 전 할리우드 톱 모델 라엘 크로포드와의 열애설이 터졌었는데 사실입니까?”
강태영은 자신을 향해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대는 기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인터뷰는 며칠 뒤,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강태영 선수! 한 마디만 해주세요!”
“유현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기자회견 때 뵙겠습니다.”
“주차장으로 가자, 태영아.”
“오케이.”
강태영은 함께 입국한 통역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통역사가 지인을 통해 렌트해 놓은 차를 타고서 공항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강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공항에 기자들이 몰릴까 봐 일부러 지인들과 부모님에게만 슬쩍 말하고 입국한 건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기자들이 몰려와서는 미친 듯이 질문을 쏟아 냈다.
일부러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온 게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강태영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방금 막 차 탔다. 몇 시에 시작한다고 했지?”
[오후 2시.]
“맞출 수 있을까 모르겠다.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괜찮아?”
[괜찮고말고. 와주는 게 어디냐.]
“대신 저녁 맛있는 거 쏴라. 오랜만에 본토 한식 좀 먹어 보자. 보스턴에서 먹는 한식은 맛있긴 한데 뭔가 좀 아쉬웠단 말이지.”
[원하는 거 다 사줄 테니까 얼른 오기나 하셔.]
“이따가 보자.”
* * *
돌아오는 월요일에 포스팅 신청을 하기로 한 상황에서, 유현은 토요일에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시즌이 끝났음에도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한 건 팬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대전 펠컨스가 이제 곧 미국으로 출국하는 유현을 위해 팬 미팅을 준비해 준 것이다.
“팬 미팅을 해보는 건 처음이네요.”
“하하하. 사인회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팬 미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하더라도 대부분 합동 팬 미팅이지 단독 팬 미팅은 안 하고요.”
“팬분들이 많이 오셨을까 모르겠네요.”
“추첨으로 1000분을 모집했는데, 경쟁률이 100대1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냥 다 뽑았다면 펠컨스타디움을 꽉 채우고도 부족하겠네요.”
“그랬겠죠. 아마 추첨되신 분들은 거의 다 오셨다고 보면 될 겁니다.”
유현은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설 때보다 더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독으로 팬 미팅을 한다는 게, 1000명의 팬들과 시즌이 끝나고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이었다.
유현이 펠컨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
동시에 환호성이 쏟아졌다.
1루 응원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팬들의 모습이 보였다. 프런트 직원이 말한 대로 족히 1000명은 될 것 같은 규모였다.
프런트 직원으로부터 건네받은 마이크를 잡고서 유현이 입을 열었다.
“와주신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분들과 만나고 싶었지만 안전과 시간상 문제로 1000분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일단…… 저한테 사인 받은 적 없는 분 손 들어 주세요.”
유현의 말에 극히 일부의 팬들이 손을 들었다.
유현은 사인을 원하는 팬들에게 흔쾌히 사인을 해주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루틴을 지키는 것과 경기 준비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사인을 해줬다.
특히나 홈경기 전후로 한두 시간 동안 사인을 해주는 장면은 대전 펠컨스 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장면 중 하나가 됐다.
그래서일까?
유현에게 사인을 받지 못한 팬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대전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이었다.
“앞쪽으로 나와 주세요. 제가 올라가서 바로 사인해 드리겠습니다.”
유현은 프런트 직원 한 명과 함께 1루 응원석으로 올라갔다. 인원수에 맞춰 야구공을 챙겨 가서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
이후 유현이 팬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야구선수 유현입니다. 으음. 평소와 달리 프런트 직원들과 구경 온 동료 선수들이 더그아웃에 있으니까 뭔가 이상하네요.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은 교통비 입금 받으셨죠?”
“네에에에!”
“일단 인원수에 맞춰 호텔 방 잡아 놨으니까 급하게 돌아가셔야 하는 분이 아니면 하루 묵었다 가시길 바랍니다. 거기 조식이 기가 막히거든요. 부모님이 대전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그 호텔로 모실 정도라니까요.”
유현은 타 지역에서 오는 팬들을 위해 사비를 털어 교통비를 입금해 줬었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인원수에 맞춰 호텔까지 잡아 놓았다.
돈이 제법 들었지만 괜찮았다.
팬들이 위해 쓰는 돈은 그 금액이 얼마가 됐건 아깝지 않았다. 팬들이 없으면 야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할 수 없는데 그깟 돈이 중요하겠는가.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팬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팬들과 함께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현의 휴대폰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죄송한데 잠깐 휴대폰 좀 확인할게요.”
유현이 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휴대폰을 확인했다. 불과 몇십 초 전에 온 코코아톡을 확인하기 위해 액정을 터치했다.
[나 이제 곧 주차장 도착. 어디야?]
[1루 응원석 쪽에 있어.]
[오케이. 그럼 나 팬들에게 안 들키게 뺑 돌아서 간다. 한 5분 정도 걸릴 듯?]
[ㅇㅇ. 시간 끌고 있을 테니까 얼른 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자리에서 보고 싶은 선수 있나요? 제 인맥으로 초청할 수 있는 선수라면 여러분을 위해서 초청할 생각이 있는데 말이죠.”
“김정수 선수요!”
“김태성 선수요!”
“사랑해요 제라드 캠프!”
팬들의 입에서는 다양한 선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은 현재 대전 펠컨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선수들의 이름이었다.
유현은 팬들이 말한 선수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고 사설을 붙이면서 시간을 끌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팬들의 뒤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나왔네요. 대부분 더그아웃에서 구경하고 있는 선수들이라 지금 당장 불러도 되긴 하는데…… 이상하네요. 여러분. 혹시 저 선수는 보고 싶지 않았나요?”
유현이 손가락으로 팬들의 뒤쪽을 가리켰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팬들이 펠컨스타디움이 떠내려가라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여환진과 더불어 대전 펠컨스가 낳은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강태영이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은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