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굿바이 (1)
[대전 펠컨스, 구단 역사상 첫 통합우승.]
[유현, 한국시리즈 MVP 선정. 2위 최수환과 단 3표 차이로 접전]
[한국시리즈 MVP 유현 “팬들의 염원을 이뤄 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
[유현의 2020시즌 행선지는 어디? 선발투수가 필요한 메이저리그 구단 TOP6.]
[대전 펠컨스 “조만간 기자회견을 통해 유현 선수의 거취와 관련된 입장을 발표할 것.”]
2019시즌 한국시리즈 MVP는 유현이었다.
1차전과 2차전, 그리고 마지막 4차전에서 결승타를 때려 낸 최수환이 받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투표 결과는 단 3표 차이로 유현의 손을 들어줬다.
20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2승.
한국시리즈 MVP가 되기엔 부족함이 없는 성적이긴 했지만, 유현이 많은 득표를 얻을 수 있었던 건 1차전에서의 임팩트 덕분이었다.
11이닝 무실점 완봉승.
현대 야구에서 퍼펙트게임보다도 보기 힘들 수도 있는 기록이다. 압도적인 구위와 뛰어난 제구에 철저한 전력분석과 두뇌 피칭의 시너지가 더해지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유현의 호투는 단순히 대전 펠컨스가 1승을 차지한 것 이상의 의미였다.
에이스 송명현이 1차전에서 10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음에도 서울 레오파즈는 패배하고 말았다. 유현이 11회까지 마운드를 버티는 상황에서 득점 기회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서울 레오파즈의 한국시리즈 구상이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에이스가 1승을 챙겨 주지 못하면서 결국 4전 전패로 허무하게 한국시리즈를 끝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현이 있었다.
1차전과 4차전.
유현이 아니라 다른 투수였다면 송명현을 상대로 더 뛰어난 피칭을 보여 주며 승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게 대부분 해설위원들의 의견이었다.
그 정도로 송명현의 공은 좋았다.
송명현은 좋은 투수고 최고의 공을 던졌다. 19이닝 1실점으로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증명했다.
함께 마운드에 오른 상대팀 투수가 정규 시즌에 261이닝 3실점을 한 괴물이란 게 문제였지.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의 피칭이 시리즈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고, 1차전에서의 임팩트까지 더해지며 최수환을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MVP 수상 후.
언론 인터뷰까지 모두 끝마친 뒤 원정 팀 라커룸으로 들어가려던 유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송명현을 만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선배님은 대단하십니다. 역시 선배님과 맞대결을 피했어야 하나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겼을 거야.”
“음······ 역시 그랬겠죠? 하하하. 선배님이 떠나신 내년을 노려봐야 할 거 같습니다.”
송명현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설사 자신이 유현과의 맞대결을 피했다 하더라도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은 대전 펠컨스가 했을 거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서울 레오파즈가 반전을 만들어 내기에는 대전 펠컨스의 전력이 너무 탄탄했다. 유현이 등판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를 잡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였다.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송명현을 바라보았다.
“너 오프 시즌에 뭐하냐?”
“집에서 푹 쉬다가 2군 훈련장에서 개인 훈련 하면서 스프링캠프 전까지 몸 만들 거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미국 와라. 항공권이랑 숙박 제공할 테니까.”
“미국이요?”
“그래. 투심 가르쳐 줄게.”
군 제대 후 잠재력이 만개했지만 아직도 더 발전할 수 있는 투수,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뛰어난 역량을 보여 줄지도 모르는 투수.
유현은 그런 송명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가르쳐 주고 몇몇 노하우만 가르쳐 준다면 다음 시즌에 송명현을 공략할 수 있는 팀은 없을 거라고 봤다.
아, 물론.
송명현만 데려갈 생각은 아니었다.
김정수는 이미 일찌감치 메켄 코퍼레이션과 계약했고, 오프 시즌 메켄 코퍼레이션 본사에서 유현과 함께 훈련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사랑합니다, 선배님. 지금 당장 짐 싸겠습니다. 몇 시까지 공항으로 가면 됩니까?”
“미친놈아. 지금 당장 출국한다는 게 아니잖아. 열흘 정도 있다가 출국할 테니까 그 전에 미리 준비해 둬. 필요한 거 말해줄게.”
“알겠습니다, 선배님.”
* * *
2019시즌이 대전 펠컨스의 통합 우승과 함께 끝이 났다.
한국시리즈 MVP가 됐고, 정규 시즌 MVP 또한 확정적인 유현은, 시즌이 끝나자마자 알리사 메켄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땅의 정령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이모가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유현과 알리사 메켄, 그리고 유현의 부모님이 함께 식사를 했다.
-여기 음식 너무 맛있다!
‘그래. 많이 먹어라. 내 몫까지 다 먹어.’
-신경 쓰여서 소화 안 돼?
‘소화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 없네.’
-별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네 부모님은 여자친구가 마음에 든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럼 다행이지만······.’
-얼굴 예뻐, 몸매 좋아, 능력 있어, 성격까지 싹싹해. 문제될 게 뭐가 있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의 말을 믿어라. 너희 부모님은 알리사 메켄이랑 네가 언제쯤 결혼해서 손주 보게 해줄까 그거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사실 유현은 알리사 메켄을 부모님과 만나게 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아무래도 국적이 다르다 보니 부모님의 입장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향에 함께 내려오는 것 또한 계획에 없었다.
원래는 알리사 메켄과 휴가를 만끽하다가 이틀 정도 고향에 혼자 내려가서 부모님을 뵙고 가려 했는데, 난데없이 부모님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계획이 바뀌게 된 거였다.
물론 알리사 메켄 또한 동의했고 말이다.
다행히 유현이 걱정한 것과 달리 식사 내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알리사 메켄과 유현의 어머니가 한국 드라마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데 예상외로 의견이 통했다.
-네 여자친구가 한국어를 드라마 보면서 배운 게 천만다행이로군.
‘그러게. 막장 드라마 때문에 대화가 이렇게 잘 통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뭐, 그게 아니었어도 너희 부모님이 여자친구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만.
‘그럼 다행이고.’
좋은 분위기 속에 식사가 끝이 났다.
식당에서 나와 근처 카페로 이동한 뒤, 디저트와 음료를 주문하고서 유현은 잠시 아버지와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문 아버지가 유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까지 생각하니까 데려온 거지?”
“음. 네. 결혼 생각이 있으니까 데려왔죠.”
“그래. 네가 지금껏 연애하면서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데려온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 연애 두 번밖에 안 했는데요?”
“두 번 다 안 데리고 왔잖냐.”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22살 때고요. 결혼한다고 여자친구 데려오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뭐 어때. 서로 좋아 죽겠으면 일찍 결혼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긴 하죠.”
알리사 메켄을 만나기 전.
유현은 두 번의 연애를 했다. 그리고 두 연애 모두 그리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야구가 너무 힘들어서 이성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죽어라 야구에만 매달리기에도 바빴다.
세 번째 연인인 알리사 메켄을 만나며 유현은 결혼을 확신하게 됐다.
초장거리 연애를 하면서도 서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게 결정적 계기였다. 실제로 알리사 메켄도 메이저리그 첫 시즌이 끝난 이후 결혼을 하자고 이야기를 나눈 상태이기도 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알리사 메켄을 좋게 봐주는 거 같아서 결혼까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 네가 미국 가도 알리사가 있어서 마음이 좀 놓일 것 같네.”
“자주 오셔야죠. 구단에서 한 달에 한 번은 미국에 올 수 있게 해줄 거예요. 퍼스트 클래스로요. 그 조건으로 계약할 거거든요.”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많지 않나. 그리고 난 햄버거나 피자 같은 거 못 먹는데. 밀가루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방구가 너무 많이 나와서 안 돼. 자고로 음식은 한식이 최고야.”
“요즘 미국에도 한식 전문점 많아요. 주요 도시마다 한인타운이 잘 형성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러냐? 그럼 가끔 놀러가고.”
유현은 고향에 내려온 김에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으로 떠나면 계약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얼굴을 보기 힘들 테니, 이번 기회에 자식 노릇 좀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유현과 알리사 메켄은 꼬박 3일 동안 강진에서 머물다가 올라갔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대전이 아닌 서울이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 관련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
2019년 11월 7일 오후 3시.
예정된 시간에 맞춰 유현이 배종한 단장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기자회견장을 찾은 다수의 팬들이 유현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유현이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가며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팬분들은 기자회견 끝나고 사인도 해드리고 사진도 찍어 드릴 테니까 끝날 때까지는 조용히 해주세요. 알겠죠?”
[네에에~]
“감사합니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유현은 기자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각을 세우지도 않았다. 자극적인 기사가 나올 때 일침을 날린 적도 있지만 일부일 뿐, 대부분의 주요 언론들과는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기자들의 입장에서도 유현을 건드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건드릴 만한 건수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진하거나 행실에 문제가 있어야 건드리던가 하는데, 부진하지도 않고 행실에 문제가 있지도 않은데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오늘은 유현이 메이저리그 진출과 관련해서 기자회견을 하는 날이다. 굳이 기자들이 유현과 날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유현 선수. 언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포스팅 신청을 할 예정이십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합니다. 또한 계약 및 개인 훈련을 위해 일요일에 출국해, 계약 이후 귀국할 예정입니다.”
“혹시 가고 싶은 팀이 따로 있으십니까?”
“있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계약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흔쾌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아메리칸 리그를 원하십니까, 내셔널리그를 원하십니까?”
“둘 다 상관없습니다.”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유현이 아메리칸 리그보다는 내셔널리그로 가는 게 좋을 거라 이야기하곤 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 리그에선 아무래도 유현이 더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현의 생각은 달랐다.
아메리칸 리그? 내셔널 리그?
솔직히 어느 리그로 가더라도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왜냐면······.
“리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KBO리그에서 보여 준 역량을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줄 생각이거든요. 어떤 리그로 가든 사이영 상을 받을 텐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유현의 목표는 단순히 메이저리그 진출로 끝나는 게 아닌 사이영 상을 획득하는 거였다. KBO리그에서처럼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의 투구로서 군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이면 좋을 것 같았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 리그가 투수들이 적응하기에는 더 까다롭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명타자 한 명이 더 있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떠들어 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사이영 상의 제물이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