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88화 (88/155)

88화 V3 (5)

팡! 팡! 팡!

송명현이 불펜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좋았다.

1차전에서 120구를 넘게 던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볍게 던지는데도 볼 끝에서 확실하게 힘이 느꼈다.

“공 좋은데? 1차전보다 좋은 거 같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너도 진짜 괴물이다. 1차전에 120구를 넘게 던지고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 게 말이 되냐.”

“아하하…… 이대로 무기력하게 한국시리즈를 끝내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후회가 남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그래. 네 말이 맞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해봐야지.”

송명현의 컨디션이 좋은 이유는 명확했다.

유현.

유현과 다시 한 번 맞대결을 한다는 사실이 송명현을 베스트 컨디션으로 만들어 줬다. 우상과의 맞대결은 없던 힘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떻게든지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송명현은 직감하고 있었다.

소속팀인 서울 레오파즈가 이번 시즌에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 거라는 걸, 결국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대전 펠컨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2인자에 머물 거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대전 펠컨스 타선을 집요하게 괴롭히며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갈 수 있길 바랐다.

일단 컨디션은 1차전보다 좋았다.

이 컨디션이라면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유현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1회 초.

송명현은 헛스윙 삼진 하나와 루킹 삼진 두 개로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손쉽게 요리했다. 특히나 최수환을 상대로 바깥쪽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슬라이더로 삼구삼진을 잡아내며 서울 레오파즈 팬들에게 환호성을 유도해 냈다.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닌데?

‘그러게. 1차전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아니지.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듯?’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확실히 난 놈이야. 120구 넘게 던졌으니 체력이 떨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잖아. 심지어 너처럼 내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혹시 다른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대단하네.’

솔직한 말로 유현은 120구를 던지든, 혹은 그 이상을 투구하든 컨디션에 영향이 없다.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항상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송명현은 다르다.

120구를 던졌으면 지쳤을 법도 한데, 4차전에서 전혀 문제없이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한다는 건 타고났다고 봐야 했다.

구위만 놓고 보면 최수환마저도 타이밍을 제대로 못 잡을 만큼 1차전보다 더 좋았다.

그래서 유현은 송명현이 안타까웠다.

저 좋은 공을 던지면서, 최고의 피칭을 하는데도 팀의 승리를 이끌 수 없다는 게 말이다.

‘확실히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게 티가 나네.’

-그래. 작년 시즌 중의 너를 보는 기분이다. 분명 좋은 공을 던지고 타자들이 웬만해서는 공략하지 못할 테지만…….

‘절대 공략하지 못하라는 법도 없지.’

-자신감과 자만이 다르다는 거만 깨달으면 더 좋은 투수가 될 텐데 말이야. 이참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송명현의 컨디션은 좋았다.

1회 초에 볼을 단 하나만 기록할 정도로 공격적인 피칭을 했음에도 타자들이 연신 헛스윙을 할 만큼 구위가 위력적이었다.

유현과 땅의 정령은 바로 그 엄청난 구위가 송명현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컨디션이 좋고 평소보다 구위가 괜찮은 날에 정면승부를 즐겨 한다. 자신이 타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서 투구를 한다.

이는 송명현 또한 다르지 않았다.

1회 초 피칭을 보면 타자들을 구위로 찍어 누를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그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송명현이 제구가 그리 좋은 투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구위로 찍어 누르려다 보면 필연적으로 실투가 나온다는 거였다.

유현 또한 한가운데로 몰리는 공을 더러 던진다.

하지만 그건 실투가 아닌 의도한 피칭이었다.

타자가 스윙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한가운데에 찔러 넣어 멘탈을 흔들겠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닌 채 투구를 했다.

실제로 이번 시즌, 유현은 루킹 삼진의 80퍼센트 이상을 존 한복판에 찔러 넣은 포심 패스트볼을 통해서 잡아냈다.

타자와의 수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라는 걸 몸소 보여 주는 두뇌 피칭의 결과물이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려다가 실투가 나와 한가운데로 몰리는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지난 시즌만 하더라도 유현 또한 힘으로 타자를 찍어 누르려다가 실투를 한 적이 더러 있었다. 한 경기에 3실점을 하며 스스로 화가 날 정도로 마음에 안 드는 피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유현에게는 실투를 찾아보는 게 힘들었다. 가끔 나오는 실투마저도 한가운데로 몰리지 않을 만큼 제구가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줬다.

반면 아직 제구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 송명현의 입장에서는, 전력투구로 인해 한가운데로 몰리는 실투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한가운데로 몰린 공은 언제 홈런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104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도 한가운데에 몰리면 홈런을 맞는 게 야구이니까.

자신의 공에 자신을 가지는 건 좋지만, 자신감과 자만은 결국 한 끗 차이다.

유현은 이번 경기를 통해 송명현이 한층 발전할 거라고 믿었다. 자만함을 내려놓고서 더 좋은 투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 물론.

4전 전패로 팀이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문 뒤에 말이다.

* * *

유현과 대화를 나눠 본 몇몇 투수 출신 해설위원들은, 유현의 가장 큰 장점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두뇌 피칭을 하는 거라고 말했다.

유현은 경기를 준비하면서 컨디션에 따라 투구 스타일을 미리 계획하는 스타일의 선수다. 정확히는 상대해야 할 타자들의 전력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집요하게 약점을 노리는 피칭을 한다.

게다가 타자의 노림수를 간파하는 것에도 도가 텄다. 스플리터를 배우기 전에도 허를 찌르는 피칭을 통해 그라운드 볼러라는 평가를 뒤엎고 삼진을 많이 잡아낼 정도로 두뇌 피칭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두뇌 피칭은 2019시즌 들어 타자들에게 절망을 심어줬다.

유독 유현을 상대할 때 타자들은 예상하는 구종이 맞는 경우가 없었다.

특히나 스플리터를 던질 거라고 예상할 때, 스윙을 참으면 대부분 한가운데에 찔러 넣는 포심 패스트볼로 루킹 삼진을 잡아내는 건 2019시즌의 유현의 등판 경기에서 자주 보였다.

그 정도로 수싸움에 일가견이 있었다.

한국시리즈 4차전.

어쩌면 2019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등판에서, 유현은 두뇌 피칭의 진수를 보여 주며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을 농락했다.

절대 원하는 코스에 원하는 구종을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약점을 노리거나, 혹은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피칭으로 타자들을 괴롭혔다.

그 결과.

유현은 8회까지 탈삼진을 7개 잡았지만, 그 7개 모두를 루킹 삼진으로 기록하는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 줬다.

그 정도로 수싸움에서 우위를 점했다.

타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데리고 놀았다.

-쯧쯧. 마음이 급하니 수가 간파당하지. 절박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모습은 아니야.

수싸움에 뛰어난 투수들은 말한다.

타자의 표정과 움직임만 보더라도 어떤 구종을 노리는지 보인다고 말이다.

유현이 딱 그런 투수였다.

정확히는 땅의 정령에게 타자의 심리를 읽는 방법을 배운 덕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유현은 타자의 표정과 움직임을 보고 어떤 구종을 노리고 있는지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상당 부분 맞았다.

뭐…… 예상이 맞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제구 잘 된 유현을 공을 노려 쳐서 장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타자는 적어도 KBO리그에서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유현은 작정하고 던졌을 때 실점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261이닝 3실점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통해 자신감을 증명해 보였다.

얻어걸린 홈런만 아니라면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을 상대로 실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2019시즌, 유현이 허용한 피홈런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8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7탈삼진 무실점.

유현이 완벽에 가까운 호투를 한 상황에서, 9회 초 송명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송명현 또한 8회까지 호투를 보여 줬다.

8이닝 4피안타 1사사구 14탈삼진 무실점.

대전 펠컨스 타자들에게 연신 헛스윙을 유도하며, 탈삼진만 놓고 보면 유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게 사실이었다.

투구 수는 91구.

잘하면 1차전처럼 10회에도 등판이 가능한 투구 수였다. 실제로 송명현은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점하면 안 돼. 지난번처럼 10회까지 던질 생각을 해야 돼. 그래야지 팀이 이길 수 있어.’

유현의 투구 수는 8회까지 80구에 불과했다.

팀의 승리를 위해 10회에도 자진해서 마운드에 오를 확률이 높은 상황 속, 송명현 또한 10회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송명현은 전력투구를 했다.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공격적인 피칭을 통해 최대한 투구 수를 아낄 생각이었다.

일단 아웃은 쉽게 잡았다.

2루수 겸 2번 타자 장영학이 2구째에 슬라이더를 노리고 받아쳤지만 중견수에게 잡히며 아웃카운트 하나를 올린 것이다.

1아웃 상황.

최수환이 타석에 들어섰음에도 송명현은 위축되지 않았다. 초구부터 과감하게 몸쪽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으며 카운트를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전력투구를 한다는 건 제구보다는 구위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력투구는 필연적으로 실투가 동반된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전력투구를 하다 보면 실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송명현은 초구를 몸 쪽으로 찔러 넣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구가 안 되며 애당초 원했던 대로 몸 쪽이 아니라 한가운데로 몰리고 말았다.

공인구가 손을 떠난 순간.

송명현은 한가운데로 몰릴 거라는 걸 직감하고서 간절히 바랐다.

제발 최수환이 저걸 치지 말기를, 이번 시즌 상대전적처럼 자신의 공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를 말이다.

최수환은 분명 송명현에게 약했다.

하지만…….

딱!

상대전적과 무관하게 한가운데로 들어온 실투를 놓칠 정도로 최수환은 어리숙한 선수가 아니었다.

-호오오오옴런! 잠실 베이스볼 파크를 그대로 넘어간 초대형 홈런! 최수환 선수가 팽팽했던 균형을 9회 초에 무너트립니다! 스코어는 1대0! 대전 펠컨스가 드디어 리드를 잡았습니다!

-아아. 송명현 선수가 고개를 떨굽니다. 안타깝네요. 오늘 경기의 유일한 실투가 홈런으로 연결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송명현은 좋은 피칭을 했다.

8회까지 단 1실점도 하지 않으며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 눌렀고, 안타를 4개 허용했지만 장타가 단 하나도 없었다. 연속 안타를 허용한 뒤에는 병살타를 잡아내며 위기관리 능력 또한 보여 줬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구위로 찍어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결국 송명현의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송명현은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지만,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1실점을 한 게 뼈아팠다.

물론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9회 말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이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쥐어짜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든 출루만 하자. 출루를 하고 나서 그다음 작전을 생각하자고. 역전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겠지.”

“다들 정 안 되면 타석에 바짝 붙어. 몸에 맞아서라도 출루해. 우리 1점 쥐어짜는 거 잘하잖아.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1차전에서 10회까지 투구한 명현이가 오늘도 9회까지 막아 주면서 단 1실점만 내줬어. 19이닝 1실점이라고. 이대로 허무하게 져도 좋아?”

“그럴 리가 있나.”

“유현 저놈도 인간인데 못할 게 뭐 있겠어요. 한번 해보죠.”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은 1차전에 이어 4차전에서 호투를 해준 송명현을 패전투수로 만들지 않기 위해 각오를 다졌다. 유현을 상대로 어떻게든지 1점을 쥐어짜기로 했다.

정 안 되면 타석에 바짝 붙어서 억지로 몸에 맞아 출루를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도 4차전의 승리가 중요했지만…….

-2019시즌 수고했다. 내년에는 한국시리즈가 아니라 월드시리즈 마운드를 밟자고.

‘물론. 당연히 그래야지.’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투수 유현, 패전투수 송명현.

대전 펠컨스가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구단 역사상 첫 통합우승 달성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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