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87화 (87/155)

87화 V3 (4)

2차전까지 패배한 상황에서 서울 레오파즈 팬들은 1차전에서 송명현이 유현과 맞붙게 해서는 안 됐었다고 성토했다.

유현이 등판한 경기를 포기하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송명현이라는 필승 카드를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1차전을 내주고 2차전을 취하는 운용을 했으면 나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서울 레오파즈는 1차전과 2차전을 모두 내줬고, 3차전에서 총력전을 선언하며 필승을 다짐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안용석 감독이 일찌감치 4차전 선발로 유현을 예고한 상황에서, 3차전을 잡지 못하면 시리즈를 5차전으로 끌고 가는 게 어려웠다.

대전 펠컨스 또한 총력전을 선언하며 맞불을 놓은 상황 속에, 일찌감치 표가 모두 매진된 잠실 베이스볼 파크에 관중들이 가득 찼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진짜 행복합니다~ 펠컨스라 행복합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대전 펠컨스 팬들은 목청껏 응원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원정 경기임에도 잠실 베이스볼 파크 절반을 꽉꽉 채울 정도로 대전 펠컨스 팬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전 펠컨스의 승리를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지난 10여 년의 암흑기 동안 쌓인 울분과 한을 풀기 위해서는 지난 시즌의 한국시리즈 우승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기회를 잡았을 때, 정규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을 때 구단 역사상 최초로 통합 우승을 달성하기를 바랐다.

반대로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3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3차전을 잡아내며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김정수 대 장일석.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엿 바꿔 먹고 20승․1점대 방어율․300탈삼진 고지를 정복한 투수와, 2018시즌 부진하긴 했지만 2019시즌 13승 7패 방어율 3.55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통산 135승 투수의 맞대결은 팽팽한 투수전으로 이어졌다.

6회까지.

두 투수는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정수는 탈삼진 11개를 곁들이며 탈삼진왕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 줬고, 장일석은 매 이닝 안타를 허용했지만 특유의 위기관리 능력을 제대로 보여 주며 실점 없이 위기를 마무리했다.

문제는 7회부터였다.

6회까지 99구의 투구 수를 기록한 장일석은, 7회 초 1아웃을 잡은 뒤 2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 순간.

서울 레오파즈의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동시에 서울 레오파즈의 필승조가 불펜에서 서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최수환 전에 끝낼 수 있겠냐?”

“해보겠습니다.”

“그래. 못 끝내더라도 최수환 타석에서는 교체할 거니까 이해하고.”

“넵. 알겠습니다.”

장일석은 최수환을 상대로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았다. 이번 시즌만 하더라도 7피안타 3피홈런을 허용했고, 피안타가 전부 장타일 정도로 최수환과는 상극이었다.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는 상황.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장일석이 최수환을 상대하기 전에 이닝을 끝내 주기를 바랐다.

일단 2아웃은 비교적 쉽게 잡아냈다. 정장혁이 2구 슬라이더를 타격, 내야 플라이가 되면서 허무하게 물러나고 만 것이다.

문제는 2루수 장영학이었다.

장영학은 장일석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2스트라이크 이후 집요하게 커트를 하면서 승부를 10구까지 이어 나갔다.

11구째.

딱!

장영학이 때려 낸 타구가 유격수 방향으로 크게 바운드가 튀었다. 그사이 장영학이 1루수를 향해 전력질주를 했고, 송구보다 조금 더 빨리 1루 베이스를 밟으며 내야 안타를 만들었다.

그 순간.

서울 레오파즈 더그아웃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고, 불펜이 한층 더 분주해졌다. 결과와 상관없이 투수 교체를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비디오 판독 결과,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장영학의 내야 안타로 만들어진 2사 1․3루 찬스, 대전 펠컨스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최수환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는 투수교체를 단행했다.

교체된 투수는 2019시즌 5승 3패 21홀드를 방어율 기록한 2년 차 사이드암 투수 곽영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땅의 정령이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을 걸었다.

-최수환은 거를 생각이네.

‘그러겠지. 수환이가 사이드암 투수에게 강한데 교체를 했다는 건, 거르고 캠프랑 승부하겠다는 뜻이라고 봐야겠지.’

-곽영민이 제라드 캠프한테 강하기도 했고.

‘그래? 그건 또 몰랐네.’

-지난 시즌부터 이번 시즌까지, 빗맞은 안타 하나 말고는 출루한 적 없어.

‘심각하네.’

-적절한 투수 교체라고 봐야지. 최수환과 굳이 무리하게 승부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땅의 정령의 예측이 맞았다.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는 최수환의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지시한 뒤, 만루 상황에서 제라드 캠프를 상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곽영민을 상대로 두 시즌 동안 빗맞은 안타 하나를 기록한 게 전부일 정도로 열세였던 제라드 캠프였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맞아떨어졌다.

제라드 캠프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실점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전히 스코어는 0대0인 상황.

거기에 김정수가 7회 말에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실점을 한 덕분에, 서울 레오파즈는 한국시리즈 3차전이 돼서야 첫 리드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6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동안 실점 없이 위기를 틀어막는 거였다.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곽영민은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이닝을 틀어막았다.

승리까지 필요한 아웃카운트는 세 개.

세 개만 더 잡으면 승부를 최소 5차전까지 끌고 갈 발판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됐다.

9회 초.

서울 레오파즈가 선택한 건 마무리투수 한대주였다.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불안함을 노출하긴 했지만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무실점 호투를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기에 믿고 기용을 한 것이었다.

박원이 무너진 상황에서 믿고 맡길 만한 투수가 한대주밖에 없기도 했고 말이다.

한대주는 2아웃까지 잘 잡아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정장혁에게 포볼, 장영학에게 중견수 앞 안타를 허용하며 2사 1․2루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서울 레오파즈 투수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또다시 최수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타이밍을 끊어줬다.

“어떻게 할래?”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자존심이 상하지만 한대주는 팀을 위해 현실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최수환보다는 상대 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제라드 캠프와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아웃카운트 하나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되는 상황에서 최수환을 상대하는 미친 짓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기록한 부담스러운 최수환보다,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제라드 캠프를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리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최수환은 7회에 이어 9회에도 고의사구로 1루 베이스를 밟았고, 또다시 2사 만루 상황에서 제라드 캠프가 타석에 들어섰다.

제라드 캠프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안용석 감독이 슬쩍 한 마디를 건넸다.

“캠프. 자신 있게 스윙해. 오늘 한 경기 내줘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건 우리야. 4연승 할 거 1패 추가되는 게 다라고. 부담감 가지지 말고 적극적으로 네가 노리고 싶은 구종을 노려.”

“알겠어요, 보스.”

“정 안 되면 내일 경기에서는 너 대신 현이를 4번 타자로 넣고 지명타자를 없애던가 하지 뭐.”

안용석 감독의 농담에 제라드 캠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제라드 캠프는 1차전과 2차전 도합 1안타만을 기록하며 자신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앞선 타석의 만루 찬스에서 시원하게 선풍기를 돌리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자신감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라드 캠프에게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자신감 있게 스윙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 같은데,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에서 부진한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오히려 더 결과가 안 나오는 걸로 보였다.

결과를 신경 쓰지 말고 자신 있게 스윙하라는 말과 별 의미 없는 농담.

안용석 감독은 그것으로 제라드 캠프가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반대로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또다시 제라드 캠프를 상대로 위기를 벗어나며 3차전 승리를 가져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 선택은…….

딱!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쭉쭉…… 그대로 담장을 넘어갑니다! 호오오오런! 제라드 캠프 선수의 그랜드 슬램!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하던 제라드 캠프 선수가 한 건 제대로 합니다!

-클러치 상황에서 강한 제라드 캠프 선수가 팀을 위해 제대로 한 방을 쳐 줍니다. 이러니까 부진해도 안용석 감독이 믿는다고 한 거죠!

-결과적으로 안용석 감독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제라드 캠프 선수는 코칭스태프의, 그리고 팬들의 바람을 배신하지 않는 슈퍼스타니까요.

제라드 캠프의 역전 만루 홈런.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하며 자신감이 떨어져 있던 선수가 만루 홈런으로 분위기를 뒤집어 버렸다.

이어진 9회 말.

시즌 36세이브를 기록한 대전 펠컨스의 마무리투수 정우연이 올라오자, 서울 레오파즈 선수단은 단체로 직감했다.

아. 끝났다.

이번 시즌은 끝났다.

* * *

-우리 4번 타자 무시하지 마라 멍청이들아! 두 번은 안 당한다!

‘수환이랑 승부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맞았겠지! 무조건 1점 이상은 만들어 냈을 거고, 개싸움을 했어도 대전 펠컨스가 이겼을 거다! 레오파즈 따윈 최강 펠컨스를 막을 수 없단 말씀!

‘네네. 어련하시겠어.’

-자. 이제 네가 내일 경기에서 호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4전 4승으로 가뿐하게 한국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어. 대전 펠컨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통합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고!

‘나도 알고 있어.’

땅의 정령이 한껏 들떴다.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시원한 만루 홈런 한 방으로 뒤집고 승리했으니 좋아할 만도 했다.

실제로 유현 또한 제라드 캠프가 만루홈런을 기록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정수와 껴안고 난리를 칠 만큼 기쁨을 드러냈다.

그 정도로 팀의 승리가 좋았다. 무리하지 않고 4전 전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확률이 높아져서 한층 더 좋았다.

해설위원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대전 펠컨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점찍었다. 투타 모두에서 완벽한 시즌을 보낸 대전 펠컨스의 우승을 예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단.

4전 전승이 아닌 4승 1패나 4승 2패로 승리할 거라고 봤다. 아무리 대전 펠컨스가 강해도 서울 레오파즈가 송명현이라는 필승 카드를 가지고 있는 이상 1~2경기는 이길 거라고 봤다.

문제는 서울 레오파즈가 송명현과 유현을 맞붙게 하면서 필승 카드를 허무하게 날리고 1패만을 떠안았다는 거였다.

심지어 다 잡을 뻔한 3차전에서는 마무리투수 한대주가 무너지며 이제 1패만 더 하면 시즌이 끝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준우승.

서울 레오파즈로서는 원치 않았던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는 순간에서, 대전 펠컨스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 일찌감치 예고한 선발투수를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는…….

1차전에 이어 송명현을 다시 선발로 예고했다.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한 팀과, 시리즈를 5차전으로 끌고 가기 위한 팀의 맞대결에 리그 최고의 투수들이 다시 한 번 맞붙게 됐다.

등판을 앞둔 유현의 목표는 하나였다.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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