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V3 (3)
81구, 그리고 105구.
유현과 송명현이 각각 9회까지 기록한 투구 수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선수 모두 효율적으로 무실점 피칭을 한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두 선수가 나란히 10회에도 마운드에 섰다는 거였다.
유현은 13구를 투구해 도합 94구로 10회까지 틀어막았다. 송명현이 9회까지 기록한 투구 수보다도 11구가 적었다.
이는 곧 서울 레오파즈에게 고민거리가 됐다.
송명현이 설사 10회 말을 틀어막는다 하더라도 11회 말에 마운드에 서는 건 현실적으로 불안했다. 아니, 사실 10회 말도 안타를 허용하지 않고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반대로 유현은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생각인 듯 더그아웃에서 아이싱을 하지 않은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어찌 보면 예견된 행동이기도 했다.
삼진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작정하고 맞춰 잡기를 하며 투구 수 관리를 했다는 건, 최대한 긴 이닝을 던지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유현이 송명현보다 1이닝 더 투구한다는 건,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 봤을 땐 최악의 상황이었다.
송명현에게 11회를 맡기기에는 투구 수가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사실상 10회 말 등판이 마지막이고, 그마저도 안타를 허용하는 순간 교체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결국 승리를 위해서는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무리한 불펜들을 기용해야만 하게 됐다.
결국 10회 말이 시작되자마자 서울 레오파즈 불펜이 분주해졌다.
송명현이 이닝을 틀어막는다면 11회 말에, 안타를 허용한다면 10회 말에 불펜투수들을 투입할 준비를 했다.
이미 연장전까지 와버린 상황에서 쉽사리 승부를 포기할 순 없었다. 필승조를 총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1차전 승리를 가져오고 싶었다.
‘어차피 유현도 길어야 11회다. 11회 말까지만 잘 막고 그 이후로 승부를 본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어.’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의 예상대로 유현은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동시에 펠컨스타디움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아니. 이 선수 도대체 왜 이럽니까!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르다니요!
-사실 오늘 경기 내내 조짐이 보이긴 했습니다. 삼진을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안 잡고 맞춰 잡는 데에 주력하며 투구 수를 아꼈거든요. 120구 내외에서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할 건 고려하고 투구한 거겠죠.
-10회까지 유현 선수가 기록한 투구 수는 고작 94구입니다.
-너무 칭찬을 많이 해서 더 이상 칭찬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유현 선수는 항상 저희의 생각한 것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
유현은 송현수 투구코치로부터 한 가지 전달 사항을 전해들었다.
“안타 하나 맞으면 교체다. 알지?”
“네. 아웃카운트 세 개 다 잡고 내려오라는 말씀이시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현역 때 너처럼 던졌으면 300승은 거뜬하게 했을 텐데 말이야. 11회에도 확실하게 보여줘. 네가 2019시즌 최고의 투수라는 걸.”
“당연하죠.”
안타 하나를 맞으면 교체라고 했지만, 유현은 교체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은 맞춰 잡기를 하는 유현을 상대하며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꼈지만, 차라리 맞춰 잡기를 할 때가 나았다는 걸 10회와 11회에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여섯 타자 연속 탈삼진.
111구를 투구하며 유현이 11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는 딜레마에 빠졌다.
* * *
서울 레오파즈가 10회 말에 송명현을 올린 건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펜 방어율 2위.
타선과 불펜의 힘으로 한국 시리즈까지 올라온 서울 레오파즈지만, 유독 대전 펠컨스에게 지난 시즌부터 약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이번 시즌 서울 레오파즈 불펜투수들은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만 다섯 번의 블론세이브를 허용하면서 절대적 열세를 보였다. 선발투수들도 대전 펠컨스에게 약했던 걸 보면,서울 레오파즈 투수진 전체가 유독 대전 펠컨스에게 약한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강세를 보인 투수가 바로 송명현이었다.
3경기에서 27이닝 1실점.
완벽하게 대전 펠컨스 타선을 틀어막았다.
실제로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도 10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대전 펠컨스 타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 봤을 땐, 송명현만 없다면 다른 투수들은 얼마든지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상대 전적 덕분에 자신감이 넘쳤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아무리 성적이 좋은 투수라도 대전 펠컨스 상대로는 뭔가 불안했다.
11회 말.
서울 레오파즈는 시즌 방어율 1.51을 기록하며 필승조의 한 축을 차지한 신예투수 박원을 올리며 승부수를 띄웠지만…….
딱!
-호오오오옴런! 끝내기 그랜드 슬램! 최수환 선수가 레오파즈 킬러의 위엄을 보여주며 경기를 자신의 손으로 끝냅니다!
-서울 레오파즈가 연장 승부에서 결국 대전 펠컨스를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아아.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되면 송명현 선수를 1차전에 올린 게 악수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맞습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2차전에 송명현 투수를 올리는 게 나았을 거라고 봅니다. 과정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패배라면 기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끝내기 그랜드 슬램.
팽팽한 투수전의 결말은 레오파즈 킬러의 시원한 홈런 한 방이었다.
* * *
대부분의 스포츠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건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팀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기 마련이다.
2019시즌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최고의 투수전이 펼쳐졌다. 어쩌면 현대 야구에서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는 투수전이었다.
하지만 승리한 건 대전 펠컨스였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서울 레오파즈는 연장 11회 말에 마무리 투수를 올려서 22구 승부를 한 끝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고, 대전 펠컨스는 선발투수가 11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뒀다.
두 팀의 희비가 명확하게 엇갈렸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유현을 상대하기 위해 송명현을 선발투수로 내보냈지만, 결국 승리를 하지 못하며 확실한 1승을 놓치고 말았다.
차라리 유현이 나오는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나머지 경기를 모두 잡는 방향으로 운용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내부 비판 또한 나왔다.
더 큰 문제는, 분위기를 반전해야 할 2차전에서 시작부터 경기가 꼬였다는 거였다.
조나단 린도어 대 세미 제이슨.
나란히 15승씩을 거둔 두 외국인 투수의 맞대결은, 1회부터 분위기가 한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시즌을 5월 중순부터 시작했음에도 171 탈삼진을 수확하며 2018시즌 탈삼진왕의 위엄을 보여준 세미 제이슨은 1회 초부터 세 타자를 모두 탈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반면 KBO리그 통산 100승을 돌파하며 모범적인 외국인투수 영입으로 불리는 조나단 린도어는 1회 말부터 홈런을 얻어맞았다.
자신의 천적이자 서울 레오파즈의 천적인 최수환에게 말이다.
-최수환 선수가 1회 말부터 큼지막한 장외 홈런을 기록합니다! 스코어는 0대2! 대전 펠컨스가 선취점을 기록하며 앞서 나갑니다!
-결국 어제도 오늘도 최수환 선수가 레오파즈 킬러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는 머리가 아플 거 같습니다. 최수환 선수를 거르자니 뒤에 제라드 캠프가 있고, 펠릭스 곤잘레스가 빠진 자리에 이번 시즌 27홈런을 기록한 클러치 히터 이정협 선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정협 선수의 득점권 타율은 3할 8푼 3리로 시즌 타율보다 정확히 1할이 높습니다.
-결국 웬만해선 최수환 선수와의 승부를 피하기 어렵다는 거죠.
-맞습니다. 대량 실점을 하는 순간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이기기는 힘듭니다. 선발로 불펜도 모두 방어율 1위인 팀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대량 실점을 허용해선 안 됩니다.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제외하더라도 팀 방어율 1위를 기록할 만큼 마운드가 높은 팀이다.
3.98.
유일하게 3점대 팀 방어율을 마크한 팀이며, 팀 방어율 2위인 서울 레오파즈와 0.88 차이가 날 정도로 투수진이 좋았다.
문제는 팀 타율도 1위라는 데에 있다.
대전 펠컨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투수가 팀 타율 1위인 타선을 상대로 최소한의 실점을 하는 가운데, 타자들이 승리에 필요한 점수를 쥐어짜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안 되니까 인천 그리핀스를 제외한 모든 팀들이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2019시즌 상대 전적에서 열세인 거고 말이다.
이는 서울 레오파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6승 10패라는 상대 전적이 증명하듯 그들은 2019시즌 대전 펠컨스에게 약했다. 투수들이 호투하면 타격이 터지지 않았고, 타격이 잘 되는 날에는 투수들이 일찌감치 무너졌다. 혹은 투타 모두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날도 있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 시리즈 2차전은 잊고 싶을 정도로 최악의 졸전을 보여준 날이라고 봐야 했다.
일단 조나단 린도어가 5이닝 6피안타 2홈런 7실점으로 무너진 것만 하더라도 문제였는데, 타자들마저 세미 제이슨에게 꽁꽁 틀어 막혔다.
7회 초에 솔로 홈런이 터지며 1점을 따라잡긴 했지만, 이미 스코어는 1대11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나온 득점이라 의미가 퇴색됐다.
결국 대전 펠컨스가 1대11로 압승을 거두며 2차전을 가져갔다.
-대전 펠컨스가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승리를 쟁취합니다. 이제 우승 트로피까지 단 두 발자국 남았습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이제 모든 경기를 총력전으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전 펠컨스는 3차전에서 김정수 선수, 4차전에서 다시 유현 선수를 등판시킬 예정입니다. 두 선수를 넘어서지 못하면 4전 전패로 한국 시리즈를 허무하게 끝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쉽지 않은 승부가 되겠군요.
-네. 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대전 펠컨스는 1차전과 2차전을 치르며 단 한 명의 불펜투수만 기용했습니다. 총력전을 펼치면 유리하면 유리하지 불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의 머릿속이 복잡할 것 같습니다.
2패.
2경기를 더 내주면 시즌을 끝마쳐야 하는 상황에서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는 3차전에서 총력전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 3선발 체제를 선언한 안용석 감독은 4차전에 1차전 선발이었던 유현을 다시 등판시킬 확률이 높았다.
유현을 상대로 승리를 장취하기 어렵다는 건 2019시즌 내내, 그리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충분히 증명됐다.
11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하는 정신 나간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운이 따라주면 이길 수도 있지만 확률이 낮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현이 등판하면 이기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결국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3차전을 무조건 잡아야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이어가는 게 가능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 또한 총력전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대전 펠컨스는 1차전에서 유현의 11이닝 무실점 호투, 2차전은 세미 제이슨의 8이닝 4피안타 1사사구 14탈삼진 호투 덕분에 단 한 명의 불펜투수를 기용하는 데에 그쳤다.
즉, 상황에 따라 불펜투수들을 3차전에서 총동원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었다.
‘3차전을 잡으면 우리가 우승한다.’
안용석 감독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셈법으로 상황을 직시했다.
4차전에서는 시즌 28승을 거둔, 1차전에서 11이닝 무실점 호투를 한 괴물이 선발로 등판을 할 예정이었다.
유현은 2018시즌부터 2019시즌까지, 단 1패만을 기록하며 팀의 확실한 승리를 책임졌다.
심지어 그 1패마저도 완투패였다.
3차전만 잡으면 4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하루 쉬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땅의 정령은 신이 나서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4전 전승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