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85화 (85/155)

85화 V3 (2)

지난해와 달리 미디어데이에서는 별다른 도발이 이어지지 않았다. 양 팀의 선수와 감독들이 한국 시리즈 우승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정도가 도발의 전부였다.

미디어데이가 싱겁게 끝난 가운데 야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사가 올라왔다.

[유현vs송명현. 한국시리즈 1차전, 숨 막히는 투수전이 될까?]

[서울 레오파즈, 유현 상대로 우타자 일색 라인업으로 승부한다.]

[유현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

[방어율 1위와 3위의 맞대결, 반전을 위해 송명현의 보여줘야 할 것들.]

유현과 송명현의 맞대결.

정규 시즌 당시 최고의 투수전을 펼쳤던 두 투수의 맞대결에 많은 이목이 집중됐다.

관건은 송명현이 대전 펠컨스 타선을 상대로 호투할 수 있을지였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상대로 애를 먹은 것과 달리, 송명현은 대전 펠컨스 타선을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 왔다.

심지어 서울 레오파즈 킬러로 불리는 최수환마저도 송명현을 상대로는 17타수 3안타에 그칠 정도로 썩 성적이 좋지 못했다.

문제는 유현의 경우 모든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상대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거였다.

서울 레오파즈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워낙 유현에게 처참하게 당해서 그렇지, 서울 레오파즈도 유현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다.

해설위원들은 결국 어느 투수가 실투 없이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해주느냐가 1차전의 승패를 가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유현의 손을 들어줬다.

송명현이 좋은 투수이고 더 발전할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매 시즌 15승 이상에 2점대 방어율을 거뜬하게 기록할 수 있는 투수고, 2019시즌 1.89의 방어율로 시즌을 끝마친 괴물이다.

문제는 송명현의 기량과 별개로 지금의 유현은 적어도 KBO리그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투수라는 거였다.

261이닝 3실점.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기록한 투수를 상대로, 어떤 투수가 매치 업이 되더라도 답이 안 나온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이는 송명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감 있게 유현을 이기겠다고 코코아톡을 보내긴 했지만, 사실 송명현은 자신이 유현을 이기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길 생각을 하질 않았다.

송명현이 원하는 걸 유현을 이기는 게 아니라,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하는 거였으니까.

경기 내용이 어떻건 간에 유현과 같은 실점을 하고 같은 이닝을 소화하는 것, 그래서 팀이 연장 승부를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송명현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플레이오프 4차전 당시 송명현은 6회까지 69구만 투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당시 팀이 13대0으로 앞서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한국시리즈 1차전 등판을 위한 체력 안배 차원이기도 했다.

그 덕분일까?

한국 시리즈 1차전 등판을 준비하는 송명현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명현아. 부탁한다.”

“네. 최대한 길게 던질게요.”

1회 말.

유현이 1회 초를 고작 6구로 끝낸 상황에서 송명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유현과 똑같은 이닝을 똑같은 실점으로 던지는 것,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지도 않는 것.

운이 따라서 유현과의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 그대로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기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실력으로 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송명현은 4할 출루율을 기록하며 시즌 내내 양질의 밥상을 차려줬던 정장혁과 장영학 테이블세터를 각각 중견수 플라이와 2루수 라인드라이브를 통해 도합 공 5개로 처리했다.

2아웃 상황.

어쩌면 오늘, 아니 한국시리즈 내내 서울 레오파즈의 고민거리가 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최수환.

울산 알바트로스에 있을 때부터 레오파즈 킬러로 명성이 자자했던 타자는, 대전 펠컨스에 온 이후 잠재력이 폭발하며 시즌 49홈런을 기록하는 거포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와의 천적 관계는 2019시즌에도 유지됐다.

타율 4할 5푼에 7홈런 25타점.

압도적인 상대 전적을 기록 중인 최수환을 어떻게 상대하느냐를 두고 서울 레오파즈 코칭 스태프는 고민이 많았다.

문제는 최수환 뒤에 있는 제라드 캠프와 펠릭스 곤잘레스도 각각 31홈런과 38홈런을 기록한 강타자들이라는 것.

최수환을 피하더라도 산 넘어 산인 상황이다.

다만 이 고민은 송명현에 한해서만큼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인 우위인데 쓸데없는 고민을 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자신감 있게, 단 실투는 없게.

코칭스태프의 조언을 상기하며 송명현이 최수환과 승부를 했다.

5구째.

포심 패스트볼만 주구장창 던졌던 송명현이 결정구로 선택한 건,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아니었다.

딱!

몸쪽으로 바짝 붙은 패스트볼을 공략했지만 히팅 포인트를 살짝 빗겨나가며 유격수 앞으로 흘러가는 땅볼이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유현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투심이 많이 좋아졌는데?’

-죽어라 갈고 닦았겠지. 물론 아직도 비장의 무기 수준이지만. 자주 던지면 결국 맞을 거다. 본인도 그거 잘 알고 있을 테고.

‘진짜 투심 패스트볼만 더 좋아지면 막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뭐…… 네 말대로 지금은 제구 때문에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 것 같지만.’

송명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져 있었다. 이전에 비해 무브먼트가 더 지저분해져 있었고, 그 덕분에 최수환에게 땅볼을 유도할 수 있었다.

단점은 제구였다.

워낙 무브먼트가 지저분한 구종이다 보니 제구를 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투심 패스트볼을 보더라인에 기가 막히게 걸치는 유현이 미친 거지, 대부분의 투수들은 투심 패스트볼의 제구에 애를 먹는다.

때문에 던지는 투수는 많지만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는 보기 힘든 구종이다.

이는 제대로 구사할 수 있기만 하다면 위력적인 구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2018시즌 초.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만으로 정상급 투수로 도약했던 유현이 그 사실을 일찌감치 증명해보이지 않았던가.

지금도 kkk머신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는 송명현이지만, 투심 패스트볼까지 제대로 장착한다면 한층 발전할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유현은 송명현에게 투심 패스트볼을 가르쳐 줄 생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지만.

‘일단 한국시리즈 이기고 생각하자고.’

* * *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 중 누가 더 기분이 안 좋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이었다.

송명현은 6회까지 삼진을 10개 잡으면서 압도적인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 누른 반면, 유현은 6회까지 삼진을 고작 2개만 잡으면서 무실점 피칭을 이어나갔다.

피안타는 송명현이 2개, 유현이 4개였다.

문제는 유현이 허용한 안타가 전부 다 내야 안타였다는 것이다.

그랬다.

서울 레오파즈의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내야를 벗어나는 타구를 6회까지 단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틀어 막히고 있었다.

그 정도로 유현의 구위가 압도적이었다.

컨디션이 최고조임에도 유현은 억지로 삼진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위주의 볼 배합으로 철저하게 맞춰 잡았다.

안타를 얼마나 맞던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안타를 맞기를 바라기도 했다.

주자가 출루할 때마다 절묘하게 나오는 유격수 앞 땅볼 유도 후 병살타로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의 멘탈을 완전히 박살내고 싶었으니까.

6회까지 50구.

완벽한 투구 수 관리를 하며 유현이 무실점으로 18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반면 송명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위로 찍어 누르고 투심 패스트볼로 허를 찌르는 볼 배합도 한 두 번이지,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주 무기이기에 탈삼진을 많이 잡는 피칭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타자를 압도할 수 있으니까.

탈삼진을 10개 잡았지만 자연스럽게 투구 수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송명현이 6회 말까지 기록한 투구 수는 71구.

1회와 2회를 손쉽게 넘어간 덕분에 나름대로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오늘 유현이 작정하고 효율적인 피칭을 한다는 거였다.

‘너는 삼진 잡아라, 난 안 잡을 테니까.’

-삼진 잡아서 뭐해. 잡는다고 누가 너한테 상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난 그냥 편하게 땅볼이나 잡을래. 어휴. 요즘 삼진 잡으면 삭신이 쑤셔서 죽겠다니까.’

유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송명현의 투구가 한국시리즈 1차전의 승패를 판가름 할 거라는 걸, 누가 더 길게 실점을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그래서 삼진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푹 쉰 덕분에 유현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오죽하면 한가운데로 찔러 넣는다고 해도 타자들이 자신의 공을 못 칠 거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정교한 제구도, 복잡한 볼 배합도 필요하지 않았다.

데이터 상으로 나와 있는 타자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하며 구위로 찍어 누르면 됐다.

실제로 안타를 4개 허용하긴 했지만 유현은 효율적인 피칭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9회 이후에도 등판할 걸 고려하고 최대한 투구 수를 아꼈다.

송명현 또한 투구 수를 아끼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땅볼 유도 구종이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삼진을 잡아야만 했다.

9회까지 누가 더 좋은 투구 내용을 보여줬는지를 놓고 승부를 가른다면 송명현이 우위일 수도 있지만, 야구는 결국 상대보다 더 많은 득점을 만들어내야 승리할 수 있는 스포츠다.

유현이 송명현보다 아웃카운트 하나라도 더 책임져준다면, 그 과정에서 실점을 하지 않는다면 대전 펠컨스의 승리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유현은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맞춰 잡으며, 타자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면서 괴롭혔다.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은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지도, 그렇다고 스윙을 참지도 못하는 난관 속에서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적극적으로 스윙하면 죄다 땅볼이 됐다. 무슨 놈의 타구가 가운데로 살짝 몰린 걸 쳐도 내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스윙을 참으면 한가운데로 찔러 넣어서 루킹 삼진을 잡아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속에, 고작 1시간 40분 만에 정규 이닝이 끝이 났다.

10회 초.

유현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9회 까지 81구를 기록할 정도로 투구 수 관리에 집중했기에 컨디션은 여전히 좋았다.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을 요리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그 증거로…….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은 10회 초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깔끔한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살얼음판 승부다.

안타 하나에도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는 게 연장 승부다. 출루가 된 순간 벤치 간의 작전 싸움이 시작될 거고, 그 과정에서 유현이 모든 변수를 차단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가장 좋은 건 아예 출루를 시키지 않은 채 이닝을 틀어막는 거다.

9회까지 7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병살타 유도로 위기를 벗어났던 유현이, 피칭 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30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1실점도 하지 않는 위엄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어진 10회 말.

-세상에! 유현 선수에 이어 송명현 선수 또한 마운드에 오릅니다!

-진짜 이 선수들 왜 이러는 거죠! 이런 명품 투수전을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오늘 눈 호강 제대로 하는 날인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와 달리 송명현 선수의 투구 수는 9회까지 105구였습니다. 송명현 선수가 10회 말에도 실점을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10회 말.

송명현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불펜 소모가 심했던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지난 경기에서 투구 수가 적었던 송명현이 120구까지 던지며 10회 말까지 막아주기를 바랐다.

또한 10회 말 등판은 송명현이 자처한 것이기도 했다. 팀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유현과 대등한 승부를 펼치기 위해 말이다.

송명현이 마운드에 오른 그 순간.

유현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겼네.’

-응. 이긴 거 같다.

‘이제부터 함정카드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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