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V3 (1)
시애틀 매리너스.
2018시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시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던 그들은, 2019시즌 지구 3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초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고전한 게 컸다. 후반기에는 6할 승률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6월 말까지 지구 최하위였을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게 컸다.
덕분에 알리사 메켄은 지난해보다 더 빠르게 휴가를 받았고, 겸사겸사 2020시즌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할 KBO리그 선수에 대한 취재를 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대한민국에 왔다.
아, 물론.
모처럼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서 일주일이나 먼저 입국했지만 말이다.
유현은 준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 주어진 짧은 휴식 기간 동안 알리사 메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땅의 정령은 유현과 붙어 다녔다.
수시로 투덜대고 복상사를 하라며 저주를 퍼부어대긴 했지만, 알리사 메켄이 한국에 있는 동안 딱히 유현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며 유현의 옆에 붙어서 진지한 충고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메켄 코퍼레이션에서는 이미 네 몸값 책정이 끝났을 거다. 그만한 몸값을 지불할 후보 리스트도 이미 추려 놨을 거고.
‘그 리스트를 알리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달할 생각일 테고?’
-그렇다고 봐야지.
‘후보 중에 그 구단이 있을까?’
-있을 거라고 본다. 아니, 100% 있을 거다. 이번 시즌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난 시즌의 아쉬운 성적을 생각해 본다면 과감한 투자를 할 가능성이 높지. 이번 시즌도 결국 에이스라고 할 만한 선발투수가 없었으니까.
‘흐음. 역시 그렇겠지?’
유현과 땅의 정령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계약하게 될 구단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일단 메켄 코퍼레이션은 못해도 6~8개 구단이 최고 입찰액을 적어 낼 거라 말했고, 그중에는 유현과 땅의 정령이 2019시즌을 치르며 가장 마음이 동한 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 구단이 과연 유현이 원하는 조건과 몸값을 맞춰 줄 의사가 있느냐였다.
시즌 내내.
유현의 마지막 등판 경기까지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스카우터를 파견한 걸 보면 의사가 있는 거 같긴 했지만, 아직 판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긴 했다.
메켄 코퍼레이션 측에서 준비한 정보를 전달 받은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구단.
유현과 땅의 정령이 가길 원하는 구단이 예상 구단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빨리 미국으로 와주기를 바라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요?”
“네. 아무래도 자기가 현지에 있는 게 협상에 유리하니까요. 아마 훈련하는 걸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지켜보게 될 수도 있어요.”
“흐음. 쇼케이스라고 보면 되려나요.”
“선수가 건강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죠.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계약 전에 메디컬 테스트를 할 테니까요.”
유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활한 계약을 위한 건데 훈련 과정을 공개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있었다.
“괜찮아요. 계약에 도움이 된다면야 그 정도는 해줘야죠. 포스팅 시스템 관련 기자회견 하고 나서 바로 출국하면 되려나요?”
“그럼 최고죠.”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 * *
한국시리즈라는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있음에도 유현의 시선은 메이저리그에 가 있었다.
정말 솔직한 말로 자신이 없더라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2019시즌 대전 펠컨스의 전력은 엄청났다.
투타 모두 상당 부분의 지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역대급 포스를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유현을 제외하더라도 대전 펠컨스 투수진은 방어율 1위, 퀄리티 스타트 2위, 탈삼진 2위를 기록할 정도로 마운드가 탄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시리즈를 걱정하는 건 사치였다. 휴가를 즐기다가 남해에 가면 성실히 훈련하고, 한국시리즈 매치업이 확정되면 철저한 전력 분석을 하는 정도면 차고 넘쳤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통해 5위 인천 그리핀스가 4위 광주 앨리펀츠를 꺾고 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인천 그리핀스의 에이스 이광훈이 89구 완봉승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유현의 짧은 휴가가 끝이 났다.
“알리사. 한국시리즈 보러 올 거죠?”
“당연하죠. 전 기자로서, 자기는 야구 선수로서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다시 만나게요. 한 달 정도는 대한민국에 있을 테니까요.”
“혹시 취재에 어려움을 겪는 선수가 있으면 저한테 말해 줘요. 제가 부탁해 볼게요.”
“음. 자기는 다른 구단들 사이에서 슈퍼 빌런이라 부탁하면 욕하지 않을까요? 일단 제 힘으로 알아서 해볼게요. 그래도 안 되면 부탁하고요.”
유현은 남해로 향했고, 알리사 메켄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일찌감치 선언한 선수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2019년 10월 20일.
일찌감치 훈련을 끝낸 선수들이 훈련장 근처 식당에 한데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울산 알바트로스와 서울 레오파즈의 플레이오프 5차전이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두 경기를 내리 내줬던 서울 레오파즈가 3차전과 4차전을 타선의 힘으로 잡아내며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그렇게 치러진 5차전.
서울 레오파즈의 타자들이 1회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상대 선발투수 애런 해스밀을 상대로 5안타를 몰아치며 4득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애런 해스밀은 2회에도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허용하고 위기를 자초했다.
울산 알바트로스 벤치에선 고민에 빠졌다.
평균자책점 4위인 선발진과 타선의 힘으로 정규 시즌 2위를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 8위에 머문 불펜진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팀의 고민거리로 전락하는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 선발투수가 1회에 4점을 내주고 2회에도 실점 위기를 자초하니, 투구 교체를 놓고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나온 벤치의 선택은 선발투수 애런 헤스밀을 믿는 거였다. 물론 투수코치가 투구 패턴의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짧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애런 헤스밀은 2사 만루 위기에서 홈런을 허용하며 벤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울산 알바트로스가 2회까지 무려 8실점을 한 순간, 식사를 하며 경기를 지켜보던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직감했다.
“끝났네.”
“응. 끝난 거 같다.”
“레오파즈가 단기전 경험이 많아서 한 번 달아오르면 막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울산 알바트로스 입장에서는 3차전에서 한발 늦은 투수 교체로 경기를 내준 게 아쉽겠네.”
“그때 투수교체만 제대로 했어도 3차전에서 시리즈가 끝났을 텐데 말이죠.”
“흠. 우리 입장에서는 알바트로스가 올라오는 게 낫나, 레오파즈가 올라오는 게 낫나?”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상대전적도 두 팀 다 비슷하고, 우리가 더 잘할 건데 어느 팀이 올라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자신감이 넘쳤다.
시즌 성적 98승 46패를 기록하며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고, 남해 캠프에서 철저하게 컨디션 관리를 하며 한국시리즈를 준비했다.
실전 감각이 무뎌져 있는 첫 경기의 승패로 인해 시리즈 분위기가 좌우될 가능성이 높지만, 선수들 중 그 누구도 1차전을 걱정하지 않았다.
리그를 초토화시킨 괴물이 선발로 등판할 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울산 알바트로스가 올라오건, 서울 레오파즈가 올라오건 전부 다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결국 서울 레오파즈가 울산 알바트로스의 마운드를 초토화, 5대21로 승리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대전 펠컨스 대 서울 레오파즈.
2018시즌의 한국시리즈 매치업이 다시 한 번 성사됐다.
양 팀의 입장이 바뀐 채로 말이다.
서울 레오파즈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확정된 순간,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결국 레오파즈가 올라오는군.’
-재밌는 매치업이 되겠어.
* * *
유현은 내심 서울 레오파즈가 울산 알바트로스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오기를 바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송명현과 다시 한 번 더 붙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짜릿한 투수전을 다시 한 번 재현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서울 레오파즈가 4차전에 등판했던 송명현을 한국시리즈 1차전이 아니라 2차전 선발로 내보내며 에이스 간의 맞대결을 피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할 수 있는 투수가 존재하느냐는 거였다.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없었다.
2019시즌 15승 7패 방어율 3.21 145탈삼진의 성적을 기록한 조나단 린도어지만, 유독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외 선발투수들의 방어율은 모두 4점대 이상.
불펜과 타선의 힘으로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송명현이 아니라면 유현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승리를 노리는 게 불가능했다.
타자들의 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시즌 도합 3실점을 한 투수를 상대로 대량 득점을 바라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유현이 1차전과 4차전과 7차전에서 등판한다고 가정했을 때,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승부를 포기하면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지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하다.
결국 최선은 송명현이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하는 가운데, 1점이라도 더 득점을 하길 바라거나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까?
플레이오프 5차전이 끝나고 얼마 후, 송명현이 유현에게 코코아톡을 보냈다.
[선배님. 이번에는 제가 이길 겁니다. 메이저리그 가시는 길 마음 편하시게 후배로서 일취월장한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답장을 보냈다.
[응. 아니야.]
[저 제구도 많이 좋아졌고 투심 패스트볼도 예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이번만큼은 선배님을 이길 자신 있습니다.]
[응. 그럴 일 없어.]
유현은 송명현이 좋은 투수가 되길 바랐다. 김정수와 더불어 훗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함께 역사를 써내려나가기를 원했다.
송명현만 원한다면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가르쳐 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 유현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는 한국시리즈 2연패였으니까.
-자신 있어?
‘물론. 완벽하게 준비했으니까.’
-한국시리즈 MVP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야.
‘흐음. 그러기에는 수환이가 있어서 어려울 거 같은데. 수환이 이번 시즌에도 레오파즈 상대로 타율 4할 넘지 않았나?’
-타율 4할 5푼에 홈런 7개 기록했지. 송명현한테 꽁꽁 막힌 게 저 정도야.
‘이야. 믿음직하네.’
유현은 자신감이 있었다.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을 비롯해 팀 타율 1위를 기록 중인 든든한 타석이 뒤를 받쳐 주고 있고,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했으니까.
송명현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한다면 승자는 자신이 될 생각이었다.
한국시리즈 2연패.
유현은 대전 펠컨스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 주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펠컨스타디움에서 치러지게 된 한국시리즈 1차전의 선발투수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예상한 대로 유현과 송명현으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