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피날레 (3)
7회에 두 개.
8회에 두 개.
탈삼진을 두 개 추가한 유현은 9회를 앞두고 18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9회 초. 유현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유현 선수는 8회까지 115구를 투구했습니다.
-8회에도 157km를 기록한 걸 보면 아직까지도 공에 힘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저도 현역 시절 완투를 많이 했지만, 100구가 넘어가면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115구까지 던지면서 구속이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유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할 겁니다.
-구단들은 긴 이닝 동안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는 투수를 선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모든 구단들이 갈수록 이닝 제한과 투구 수 제한을 두고 있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이닝 이터의 가치가 오르고 있죠. 좋은 공을 던지는 투수라고 해서 모두 다 이닝 이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보통 투수들은 100구 이후 체력적인 문제로 구위가 떨어지는 모습을 더러 보인다.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100구 이후에도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정도로 구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스코어는 0대12.
사실상 승패는 일찌감치 결정이 났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팬들의 이목은 승패가 아닌 오로지 유현의 대기록 달성 여부에만 집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탈삼진 1개를 추가하면 유현이 종전에 세웠던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 2개 이후로는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9회 초.
첫 타자를 상대로 유현이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몸쪽에 찔러 넣은 순간, 서울 나인테일즈의 3번 타자 차희성은 직감했다.
‘x됐네.’
결국은 유현을 막지 못할 거라고, 또다시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거라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만 비참함을 맛보면 더 이상 유현을 상대할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함께해서 더러웠고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최악의 상황에서 차희성은 스플리터를 노렸다.
역전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대기록을 내주고 싶진 않았다. 안타가 되지 않더라도 스플리터를 받아쳐서 범타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희성의 생각은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에게 제대로 간파당하고 말았다.
아니, 비단 차희성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의 유현은 자신을 상대하는 타자들이 스플리터를 노린다 싶으면 하이 패스트볼을, 스윙을 참는다 싶으면 한복판으로 찔러 넣으며 타자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유현은 차희성에게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며 이날 경기에서 19번째 탈삼진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 선수가 19번째 탈삼진을 기록합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두 개. 이제부터는 탈삼진을 잡을 때마다 KBO리그의 새 역사가 됩니다.
-다수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현 선수가 남은 두 개의 아웃카운트에서 추가로 삼진을 잡을 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정 해설위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전 잡을 거라고 봅니다. 최소 하나는 잡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유현 선수를 상대로 삼진 비율이 가장 놓은 타자가 바로 김형주 선수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의외로군요.
-네. 이번 시즌 부상과 부진으로 고생했어도 타율 3할 1푼 2리를 기록할 정도로 김형주 선수는 클래스 있는 타자입니다만, 지난해부터 유독 유현 선수를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현 선수에게 가장 많은 루킹 삼진을 당하기도 했고요. 오늘도 삼진 세 개를 적립했죠. 게다가 유현 선수는 120구를 돌파했음에도 155km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직 힘이 살아 있는 유현 선수를 상대로 김형주 선수가 이긴다? 힘들 거라고 봅니다.
해설위원의 지적은 정확했다.
김형주는 유현을 상대로 유독 상대전적이 좋지 않았다. 안타를 기록한 적이 있긴 하지만 유현을 상대로 삼진 비율이 가장 높을 만큼 고전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루킹 삼진이 유독 많았다.
수싸움에 재능이 있는 김형주이지만, 유현을 상대할 때마다 수싸움에서 말리며 허를 찔리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9회 초 1아웃 상황.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선 김형주는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과감하게 스윙을 했다. 하이 패스트볼이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스윙을 했지만······.
유현의 선택은 스플리터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크게 헛스윙을 한 김형주는, 이제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유현이 다음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시원한 선풍기질이 자료로 사용될 거라고 말이다.
또다시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가 김형주와의 수싸움에서 승리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딱!
서울 나인테일즈의 5번 타자 양수안이 초구부터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쳤다.
분명 잘 맞은 타구였다.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았고, 타이밍 또한 적절했다. 장타를 예상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유현의 공에 힘이 있다 보니 양수안의 배트가 살짝 밀렸다는 거였다.
그 결과.
중견수 키를 훌쩍 넘었어야 할 타구가 중견수 정면으로 향하며 잡히고 말았다.
-게임 셋! 대전 펠컨스가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장식합니다. 이로서 대전 펠컨스가 2019시즌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전승을 수확합니다.
-오늘 경기는 대전 펠컨스에게 여러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가 시즌 28승째를 수확했고,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다시 한 번 갈아치웠으며, 한 팀을 상대로 시즌 전승을 수확하는 업적을 이뤘으니까요.
-펠컨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만원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칩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최고의 호투를 보여 준 팀의 에이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전 펠컨스 팬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이날이 유현의 마지막 등판이라는 걸 말이다.
한국시리즈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정규 시즌 마지막 등판이라는 건 선수와 팬 모두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팬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무대.
지석한과 주먹을 맞부딪히며 승리를 자축한 유현은, 자신을 향해 기립박수 세례를 하는 팬들 때문에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걸 멈췄다.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최고의 데뷔 시즌을 보냈던 팀, 그리고 은퇴 기로에 섰던 자신을 다시 받아준 팀.
두 번의 전성기를 함께 보낸 친정팀이다 보니 유현은 대전 펠컨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진출했지 FA가 되더라도 다른 팀은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공개적으로 말을 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유현을 대전 펠컨스 팬들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뛰어난 실력과 팬 서비스를 겸비한 에이스, 대전 펠컨스에게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안겨 주고 첫 통합우승 도전에 1등 공신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유현은 한참 동안 멍하니 기립박수를 치는 관중들을 바라보다가, 땅의 정령의 정수리 꾹꾹 누르기 스킬에 정신을 차렸다.
-뭐하고 있어, 인사 안 하고.
‘아······ 그래. 인사 해야지.’
정규 시즌 마지막 등판을 끝낸 유현이 기립박수를 치는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모자를 벗어 관중석을 향해 번갈아가며 고개를 숙인 뒤, 팬들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절을 하며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췄다.
그런 유현을 향해 팬들은 정성 들여 준비한 대형 플랜카드를 외야에서 활짝 펼치는 것으로 화답했다.
[올 때 사이영 상!]
* * *
98승 46패.
대전 펠컨스는 지난해보다 더 좋아진 성적으로 정규 시즌 1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목표는 단 하나.
첫 통합 우승이었다.
대전 펠컨스는 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정규 시즌 1위를 여러 차례 했지만 항상 한국시리즈 준우승에만 머물렀다.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모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광주 앨리펀츠가 발목을 잡았고, 광주 앨리펀츠가 부진한 시즌에는 다른 팀들에게 발목을 잡히며 번번이 통합 우승을 놓쳤다.
포스트 시즌 진출과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이라는 염원은 2018시즌에 달성했다. 통합 우승만 달성한다면 대전 펠컨스 팬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황이다.
기분 좋게 정규 시즌을 마무리한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다음 날, 구단 소유의 호텔에서 작게나마 정규 시즌 1위 기념 파티를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안용석 감독이 선언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샴페인은 오늘이 아니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뒤에 터트리도록 하고, 오늘은 일단 마음껏 먹고 적당히 마셔라. 또한 준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는 푹 쉬도록. 그 이후에는 남해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는 남해 캠프를 치르면서 결정할 생각이다. 명심해라. 시즌 중 아무리 좋은 모습을 보여 줬더라고, 막바지에 컨디션 관리에 실패한 선수는 엔트리에서 빠질 거라는 걸.”
안용석 감독은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했다.
지쳐 있을 선수단에게 휴식을 부여하는 한편, 컨디션 관리에 유념하지 않으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할 거라고 압박을 줬다.
대부분의 강팀들은 주요 포지션에서 긍정적인 경쟁 구도를 만들 줄 안다. 신예 선수들의 도약으로 나태해질 수 있는 주전 선수들을 긴장하게 만들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다.
암흑기의 대전 펠컨스는 주전과 비주전의 격차가 컸고 경쟁이 되지 않았지만,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의 대전 펠컨스는 일부 포지션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쟁 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그리고 그건 한국시리즈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을 예정이었다.
물론 유현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부상이라도 입지 않는 한 유현은 무조건 한국 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갈 테고, 1선발로서 마운드에 오를 테니까.
‘남해라······.’
-솔직히 너 남해가 머리에 안 들어오지?
‘너 같으면 들어오겠냐?’
-안 들어오지.
‘알면서 왜 물어보고 그래.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으니까 건들지 마셔.’
-나 며칠만 가출해도 되냐? 커플들 염장질 보느니 가출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올 때 불화산 치킨.’
-망할 놈. 하다가 복상사로 요단강 건너라. 꼭 건너라. 건너서 9시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와라.
남해.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한 팀들이 한국 시리즈 전까지 훈련을 위해 으레 방문하는 그곳에, 대전 펠컨스가 90년대 이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됐다.
일단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는 휴식이 주어졌기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가볍게 훈련을 하며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이는 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현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운동을 한 뒤 차를 끌고 인천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을 공항 카페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땅의 정령을 먹이기 위해 카페에서 파는 조각 케이크를 종류별로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걸 제외하면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낸 유현은, 미리 설정해 뒀던 알람이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분 후.
멀리서 걸어오는 한 금발 여성의 모습에, 유현의 입가에 대기록을 세웠을 때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맺혔다.
“보고 싶었어요.”
알리사 메켄.
유현의 연인이자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담 기자가 대한민국으로 휴가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