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피날레 (2)
2019시즌.
유현은 상품 판매 1위, 역대 올스타 최다 득표 1위 기록을 갈아치우고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만큼 많은 야구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유현이 자신의 팀과 맞붙으면 제발 컨디션 난조를 겪으라고 욕을 하면서도, 다른 팀과 맞붙을 때는 처참하게 박살내 주기를 바랐다.
유현의 시즌 마지막 등판.
서울 나인테일즈 팬들을 제외한 9개 구단 팬들이 유현에게 바라는 건 하나였다.
시즌 300탈삼진.
이미 김정수가 먼저 달성한 기록이긴 하지만, 시즌 300탈삼진을 달성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를 바랐다.
그 바람을 알고 있어서일까?
유현은 1회 초부터 적극적으로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피칭을 했다.
바깥쪽 위주로 카운트를 잡다가 결정구로 선택한 몸쪽 하이 패스트볼로 1회 초의 세 타자가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마쳤다.
-유현 선수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1회 초를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이제 300탈삼진까지 여섯 발자국만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무척이나 좋아 보입니다. 평소보다도 수직 무브먼트가 더 좋은데요? 바깥쪽으로 카운트를 잡은 뒤 몸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으면,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몸에 더 붙는 느낌을 받아 대처하기 어렵거든요.
-저 같아도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몸 쪽으로 붙어 들어오면 무서울 것 같습니다. 맞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지 않을까요?
-하하하. 맞습니다. 중요한 건 유현 선수가 지난 시즌부터 몸에 맞는 몸에 맞는 볼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몸 쪽 제구에 자신이 있기에 과감한 몸 쪽 승부를 즐기는 거죠.
-아무래도 오늘,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유현 선수를 상대하는 게 괴로울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컨디션이 좋은 유현 선수를 상대하는 건 타자들에게 고통이죠.
손쉽게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유현에게, 땅의 정령이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을 걸었다.
-컨디션 죽이는데?
‘음. 푹 쉬고 나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공에 힘이 있는 느낌이야. 이 정도면 한국시리즈에서는 직구만 던져서 다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300탈삼진 미리 축하한다.
‘땡큐. 근데 300탈삼진으로 만족하면 끝내면 재미없지 않나?’
-재미없지. 더 해야지.
‘응. 이번 시즌 들어서 느낀 건데, 한 팀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게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메이저리그 진출하면 그걸 같은 지구 팀을 상대로 적용하면 딱이겠군.
선발투수가 로테이션을 소화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다가 모처럼 등판했을 때, 대부분 투수들의 투구 양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쉰 게 오히려 독이 돼서 제구나 구위에 문제를 드러내거나, 혹은 푹 쉬면서 체력이 회복된 덕분에 평소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지거나.
유현의 경우 전형적인 후자였다.
원래부터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투수는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쉬었다고 확실히 평소보다 힘이 넘쳤다.
그리고 그런 유현을 상대하게 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2회 초.
유현은 선두타자로 나온 김형주를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현과 김형주는 나름 악연이 있었다.
개막전 유현이 의도적으로 몸 쪽 위협구를 던지긴 했지만 맞추지는 않았고, 그 상황에서 김형주가 발끈해서 벤치클리어링을 유발하고 유현을 때리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왔다가 부상으로 9주를 결장했다.
그리고 그 이후 유현을 만날 때마다 서울 나인테일즈는 처참하게 박살났고 말이다.
유현은 딱히 특정 팀을 상대로 잘 던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모든 팀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울 나인테일즈는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 선수의 부상을 유발하는 악의적인 비매너 플레이는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선 맞대결들에서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참교육을 했던 유현은, 이번 대결에서도 확실하게 참교육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먹이사슬을 제대로 각인시키리라.
참고로.
이번 시즌 서울 나인테일즈는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단 1승도 챙기지 못하며 상대 전적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최하위로 추락했다지만 시즌 전패는 선수들의 입장에서도, 응원하는 팬들의 입장에서도 치욕이었다.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단 1승이라도 챙기며 연패 사슬을 끊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선발투수가 정신 나간 괴물인 유현이다.
선발투수 제이미 소시아가 1회부터 최수환에게 시즌 48호 2점 홈런을 허용한 상황, 서울 나인테일즈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현을 상대로 최소 2득점 이상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서일까?
딱! 딱!
김형주는 유현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스윙했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 두 개를 받아쳤다.
다만 타이밍이 살짝 늦었고 구위에 밀리며 두 타구 모두 파울이 되고 말았다.
3구째.
김형주는 스윙을 참았다.
유현이 자신에게 스플리터나 존을 살짝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컨디션이 좋은 상당수의 투수들이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기를 즐겨하니까.
일단 한 번 참고 1볼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건만…….
팡!
“스트라이크 아웃!”
예상이 빗나갔다.
유현은 김형주가 스윙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었다.
동시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얼핏 보면 김형주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마운드 위에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유현이기에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다혈질 기질이 있는 김형주가 다음 타석에서 흥분해 스윙이 커지면 좋은 것이고, 흥분하지 않으면 그냥 평소처럼 승부하면 그만이다.
“x발!”
그리고 김형주는 유현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잔뜩 흥분한 채 배트를 부러트리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걷어찬 것이다.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투수가 존 한복판으로 찔러 넣어 루킹 삼진을 잡은 뒤 비웃는단 생각에 화를 참지 못했다.
-단순하군.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만 하더라도 멘탈이 괜찮았는데, 나인테일즈와 계약하면서 맛이 갔단 말이지. 타격은 여전히 잘하는데 멘탈이 너무 유리야.
‘우리한테는 좋은 거 아닌가? 약한 멘탈을 후벼 파면 되는 거잖아.’
-이미 후벼 파놓고 물어보는 거 아니다.
‘형주 선배만 바보로 만들어 놓으면 다른 타자들은 무섭지 않거든. 그리고…….’
-그리고?
‘사실 도발에 안 넘어왔어도 상관없었을 거 같아. 지금 내 컨디션이 미쳐 있거든.’
300탈삼진까지 남은 탈삼진은 5개.
5번 타자를 상대하게 된 유현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올라갔다.
‘오늘 한 번 다들 제대로 죽여 보자고.’
* * *
6회까지.
경기의 3분의 2가 진행된 시점에서 유현은 무려 14탈삼진을 수확했다. 18개의 아웃카운트 중 4개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삼진을 잡은 것이다.
몸 쪽과 바깥쪽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제구력, 평소보다 평균 구속이 1km 더 나오고 수직 무브먼트 또한 좋은 포심 패스트볼, 거기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까지.
대량의 탈삼진을 잡기 위한 조건은 충분했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단 하나도 던지지 않은 것이다.
그랬다.
유현은 철저하게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만을 던지며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상대했다.
안타를 두 개 허용하긴 했지만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지 않았고,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평소처럼 땅볼 유도를 하는 게 아니라 삼진을 잡기 위한 피칭을 이어 나갔다.
중요한 건 그게 제대로 먹혔다는 것이다.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스윙을 참으면 한복판으로 찔러 넣고, 스윙을 하면 하이 패스트볼이나 스플리터로 헛스윙을 유도했다. 계속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유현의 탈삼진 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종종 타자들은 상대 팀의 에이스 투수에게 알면서도 못 치는 공을 던진다고 말을 한다.
유현이 던지는 공이 딱 그러했다.
좌우와 위아래에 자유자재로 찔러 넣는 평균 구속 155km의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타이밍을 맞춰도 구위에 밀려 정타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 입장에서는 유현에게 농락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젠장. 유현 저 자식…… 오늘 투심이랑 커터는 하나도 안 던지고 있어.”
“알아. 안다고. 근데 x발, 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노려 쳐도 배트가 밀리는데 어떻게 하냐고!”
“작정하고 삼진만 잡는데 어떻게 하냐.”
“번트 댈까?”
“또 욕 한 바가지 먹으려고?”
“기록 내주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잖아. 상황 보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번트 댈 거야. 욕먹는 게 대기록 내주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에게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두 가지면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요리하는 게 가능했다.
압도적인 구위에 제구까지 동반된 유현의 피칭에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만을 던지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대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9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그중 5개 이상의 아웃카운트에서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 기록이나 신기록을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위기에 직면했다.
7회 초 1아웃 상황.
앞선 두 타석에서 허무하게 루킹 삼진을 당했던 김형주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서며 속으로 유현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x발, 저 새끼는 진짜 우리한테 왜 저래? 잘못했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잘못했다고 무릎이라고 꿇고 싹싹 빌어야 되냐고! 투구 수도 많은데 적당히 던지고 내려가라, 좀!’
6회까지 유현의 투구 수는 85개, 허용한 안타는 두 개였다.
안타야 둘 다 장타가 아닌 빗맞은 안타여서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투구 수는 확실히 평소의 유현과 비교했을 때 많았다.
작정하고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만 던지며 탈삼진을 잡은 결과였다. 땅볼 유도 자체를 하지 않고 삼진에만 신경 쓰니 투구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투구 수 관리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맞는 말이다. 그래야 타자들이 널 상대할 때 머리가 복잡해지니까 말이야.
‘아. 빨리 메이저리그 가고 싶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내 공이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시리즈만 끝나면 바로 메이저리그야. 그때를 대비해서 이런 패턴으로 투구하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일부 야구인들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두 가지 구종이 유현의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철저한 땅볼 유도 위주의 피칭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인 포심 패스트볼과, 유현의 가치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 준 스플리터의 존재를 망각한 채 말이다.
유현은 그라운드 볼러다.
하지만 마냥 땅볼 유도만을 하진 않는다.
지난 시즌에도 허를 찌르는 삼진을 많이 잡아냈지만, 이번 시즌에는 스플리터를 장착하면서 9이닝당 탈삼진이 대폭 늘어났다.
삼진 개수만 보면 그라운드 볼러가 아니라 kkk머신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
그라운드 볼러와 kkk머신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컨디션과 타자의 성향에 따라 피칭 스타일의 변화가 가능한 것.
그것이 유현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치르는 2019시즌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등판은, 자신의 장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한 무대였다.
대놓고 삼진만 잡아도 무서운 투수다.
땅볼 유도도 잘하고 삼진도 잘한다, 그러니까 날 비싼 돈 주고 사가라.
직관을 온 메이저리그 12구단의 스카우터들에게 쇼케이스를 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유현은 서울 나인테일즈를 선택했다.
‘남은 아웃카운트 9개 중에 딱 5개만 더 삼진으로 잡아보자고. 운이 따라줘서 그 이상 잡으면 좋은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