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피날레 (1)
유현과 김정수는 비슷한 면이 많으면서도 사뭇 다른 스타일의 투수다.
일단 두 사람 다 좌완 파이어볼러고, 몸쪽 승부를 즐겨 하며 하이 패스트볼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투수들이다. 거기에 범타 유도와 삼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피칭을 한다.
다만 유현이 항상 일관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김정수는 자신감에 따라 컨디션의 차이가 극명한 투수였다. 자신감이 있을 때는 구위로 찍어 눌러도 공략이 불가능할 만큼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반면, 자신감이 없을 때는 타자들을 상대로 종종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물론 체인지업이 있기에 맞춰 잡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자신감이 떨어진 날에는 탈삼진 개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서일까?
몇몇 해설위원들은 유현과 김정수의 탈삼진 1위 경쟁의 핵심은 김정수가 자신감을 유지하는 거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의 탈삼진 1위 쟁탈 선언은 김정수가 자신의 공에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데뷔한 김정수가 투수로서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있다면 바로 유현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비슷하겠지만 유현처럼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은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게 목표였다.
김정수는 유현의 탈삼진 1위 쟁탈 선언을 보고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해 준다고 받아들였다.
자신의 우상으로부터 라이벌로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는 유현이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물론 자신의 탈삼진 1위 쟁탈 선언이 김정수를 자극하고 시너지를 내서 선발 마운드가 전체적으로 안정되길 바란 건 맞다. 세미 제이슨과 김용우가 전반기 막바지부터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었기에, 이럴 때일수록 자신과 김정수가 굳건히 마운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경기 연속 15탈삼진 이상을 잡아내며 완전히 각성해 버릴 줄이야.
-김정수 완전 날아다니는데? 너 이러다 탈삼진 1위 쟁탈 못 할 수도 있겠는데?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정수가 잘하면 팀으로서도 좋은 거니까. 근데 설마 이 정도로 각성해 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피지컬만 놓고 따지면 너보다 좋은 게 김정수다. 자신감에 따라 컨디션과 제구가 오락가락해서 그렇지 재능 자체는 엄청나다고. 그런 놈에게 자신감을 심어 줬으니 미쳐 날뛰는 게 당연하지.
‘뭐…… 정수가 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질 수는 없지. 최선을 다해서 쫓아가 보자고.’
* * *
중위권 싸움과 더불어 2019시즌 KBO리그 후반기 최대의 화두거리는 탈삼진왕 싸움이었다.
탈삼진 3위인 송명현이 8월이 끝났을 때 202탈삼진을 기록할 만큼 페이스가 엄청났다.
문제는 1위와 2위였다.
1위인 김정수가 279탈삼진, 2위인 유현이 262탈삼진을 기록하며 까마득하게 차이를 벌렸다.
이미 종전의 한 시즌 최다 탈삼진을 기록을 갱신할 걸로도 모자라 매 경기 새 기록을 작성해나가고 있는 두 사람의 탈삼진 페이스는 상대 팀 타자들의 입에서 절로 쌍욕이 나오게 만들 만큼 엄청났다.
300탈삼진.
메이저리그에서는 나왔지만 KBO리그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2019시즌의 대전 펠컨스는 유독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다른 팀들은 우천 취소가 되는 경기가 더러 있어 무더운 여름에 휴식을 취한 반면, 대전 펠컨스는 유독 우천 취소가 되는 경기가 적다 보니 다른 팀들에 비해 같은 기간 상대적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만 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정이 반복됐다.
그 때문일까?
후반기에 들어서자마자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시즌 중 가장 큰 위기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유현의 12타자 연속 탈삼진 경기 이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일단 유현과 김정수가 탈삼진왕 경쟁을 하며 매 경기 압도적인 피칭을 선보였고, 2선발인 세미 제이슨이 날이 더워지면서 구속이 오르자 지난해의 위력적인 피칭을 다시 이어 나갔으며, 김용우는 기복이 있긴 해도 난타를 당하지 않고 경기당 평균 5.2이닝을 소화해 줄 만큼 안정감이 있었다.
심지어 기복 있는 모습을 보인다고 평가받는 세미 제이슨과 김용우의 시즌 평균자책점은 각각 3.21과 3.45에 불과했다. 다른 팀에 가면 1~2선발을 맡을 만한 방어율이었다.
5선발이 불안하긴 하지만 1~4선발이 확실한 것만 하더라도 갈수록 좋은 투수를 찾기 힘들어지고 있는 KBO리그에서는 엄청난 거였다.
괜히 타고투저가 아닌 타고투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대전 펠컨스는 선발진의 안정 속에 후반기에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 나갔다. 그 어떤 팀을 만나도 절대 루징 시리즈를 내주지 않으며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대전 펠컨스는 유현의 12타자 연속 탈삼진 경기 이후 전반기의 위엄을 완전히 되찾았고, 결국 잔여 경기를 12경기 남겨 둔 시점에서 일찌감치 자력 우승을 확정지었다.
후반기 들어 기복 있는 경기력을 보이며 서울 레오파즈에게 1~2경기 차이로 쫓기고 있는 울산 알바트로스가 잔여 경기를 모두 이기더라도, 대전 펠컨스가 1위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자 안용석 감독은 선언했다.
남은 경기에는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 및 팀의 미래를 위해 신예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할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2019시즌에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유현-세미 제이슨-김정수-김용우에게는 한국 시리즈 전까지 휴식을 줄 거라고 이야기했다.
단, 시즌 마지막 홈경기는 의미가 있는 만큼 에이스인 유현이 등판할 예정이었다.
시즌 마지막 등판을 남겨 둔 상황.
252이닝을 투구하며 27승 1패 방어율 0.10 291탈삼진을 기록한 상황에서, 유현이 모처럼 휴식을 취하며 여유롭게 등판을 준비했다.
공교롭게도…….
유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지독한 악연인 서울 나인테일즈였다.
* * *
사실상 유현이 탈삼진 1위를 쟁탈할 가능성은 0퍼센트라고 봐야 했다.
유현이 시즌 마지막 등판을 남겨 둔 시점에서 시즌을 끝마친 김정수는 22승 4패 방어율 1.47 314탈삼진을 기록했으니까.
유현이 마지막 등판에서 23개의 탈삼진을 수확해야 동률, 24개의 탈삼진을 수확해야 역전을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따라잡기 불가능한 격차였다.
2019시즌에 온갖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경이로운 시즌을 보내고 있는 유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경기 24탈삼진은 12회까지 투구한다 해도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는 개수였다.
-쯧쯧. 결국에는 김정수를 자극해서 탈삼진 1위를 못하는군. 가만히 있었으면 1위를 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정수가 각성했으니 좋게 생각하자고. 애초에 무조건 1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지. 탈삼진 1위를 못 한다고 해서 네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현이 탈삼진 1위 쟁탈 선언을 한 건 자신감에 따라 투구 내용이 180도 달라지는 김정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는 자극이 아니라 거의 각성을 한 게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유현은 더 이상 대전 펠컨스 소속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도전을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는 한 선수로서 대전 펠컨스의 유니폼을 다시 입을 일은 없다.
유현 한 명이 없다고 해서 대전 펠컨스가 약팀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지난해와 이번 해에 이룩한 업적이 너무 크다.
유현이 없더라도 대전 펠컨스의 팀 방어율은 1위다. 불펜과 선발 모두 방어율 1위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마운드가 안정되어 있다.
거기에 팀 타율 1위, 팀 홈런 2위, 팀 타점 1위, 팀 득점 1위, 팀 득점권 타율 1위를 기록하며 지난해와 타격 지표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운드의 힘으로 우승했다고 평가를 받던 대전 펠컨스가, 이제는 투타 모두 1위를 하는 괴물 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유현은 팀에 절대적인 에이스 한 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포스트 시즌을 생각한다면 에이스의 존재는 필수였다.
다른 팀들이 절대로 공략하지 못할, 일단 만나는 순간 위축되고 마는 그런 에이스 말이다.
김정수가 시즌 방어율 1.47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긴 했지만,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할 때와 달리 김정수를 상대할 때 위축되지 않았다.
유현으로 인해 각성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현의 12타자 연속 탈삼진 경기 이후 김정수가 선발 등판할 때마다 상대 팀 타자들은 우는 소리를 냈다. 김정수가 상대하는 게 꼭 유현을 상대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유현이 없더라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투수로 단기간에 성장한 것이다.
-네가 없더라도 펠컨스는 잘할 것이다. 오랜 시간 암흑기를 겪었고 잘못된 방향으로 팀이 운영됐지만, 지금은 다르니까.
‘그래. 2군에서 선수들이 계속 올라오는 거 보면 확실히 달라졌지. 작년이랑 다르게 올해는 전형적인 강팀이 된 것 같아.’
-한국 시리즈 우승은 못 할 수도 있지만 포스트 시즌은 꾸준히 진출하는 강팀으로 자리할 거다. 그러니까 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마지막 등판만 신경 써라. 한국시리즈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정규 시즌, 그것도 마지막 홈경기다.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래. 팬들에게 선물 주러 가야지.’
* * *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울고 싶었다.
대전 펠컨스가 일찌감치 자력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만 하더라도 좋았다. 안용석 감독이 선발투수들에게 휴식을 줄 거라고 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대전 펠컨스와 서울 나인테일즈는 시즌 막바지에 한 번의 맞대결을 남겨 두고 있었다. 우천 취소되며 추후 편성이 된 한 경기였다.
선발투수들이 휴식을 취한다는 건 유현과 맞대결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번 시즌 유현을 만날 때마다 최악의 졸전을 펼친 서울 나인테일즈 선수들은, 최하위로 시즌을 끝날 판국에 유현을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유현과의 시즌 첫 맞대결 이후, 이번 시즌 유현을 만날 때마다 팀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됐으니까.
물론 당시 원인 제공을 한 게 제이미 소시아이긴 하지만, 서울 나인테일즈 선수들 입장에서는 만날 때마다 팀의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유현이 원망스러운 게 당연했다.
상당수의 팀들이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팀을 꼽으라면 아마 서울 나인테일즈일 것이다.
오죽하면 서울 나인테일즈 코칭스태프들이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빌고 나온다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그런 서울 나인테일즈 선수단이 유현이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 등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절망한 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전 펠컨스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 상대가 바로 서울 나인테일즈였으니까.
뭐가 문제일까?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걸까?
안용석 감독이 서울 레오파즈에 있을 때부터 같은 서울 연고인 나인테일즈에게 원한이라도 품고 있었던 걸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 정도로 서울 나인테일즈 선수들은 유현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1회 초.
팬들의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마운드에 선 유현을 바라보고 있는 1번 타자는 빨리 경기가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저 미친 투수를 상대로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어떤 구종을 노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탈삼진 1위가 물 건너가긴 했지만 시즌 300탈삼진을 달성하기 위해 유현이 탈삼진 위주의 피칭을 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스플리터와 하이 패스트볼에 속지 않으며 스트라이크 존을 확실하게 잡은 채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받아치면 공략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늘 말하지만, 최고 구속 158km가 찍히는 시즌 방어율 0.10의 괴물을 상대로 그게 가능하다면 굳이 KBO리그에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선택한 초구는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같다가 붕 떠오르는 공에 타자가 헛스윙을 했다. 빠르고 종속이 살아있는 포심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동시에 타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 상대할 때보다 더 빠른 거 같은데? 공이 더 뜨는 느낌이기도 하고.’
의아함을 느낀 타자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허…….”
동시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난 등판 이후 열흘 넘게 푹 쉰 덕분일까?
유현은 체력이 남아돌았고 컨디션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당장이라도 한국시리즈를 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베스트 컨디션이었다.
그 증거로…….
유현이 던진 초구 하이 패스트볼의 구속이 158km를 기록했다.
전력투구.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을 치르는 유현은, 마지막 1구까지 전력으로 던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 유현을 상대해야 하는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포심 패스트볼 3개에 타이밍을 전혀 맞추지 못하며 삼구삼진으로 물러난 1번 타자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x발. 그냥 너 혼자 다 해 처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