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80화 (80/155)

80화 가치 (3)

대기록을 이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연속 이닝 무실점이 100이닝을 넘었을 때부터 부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202이닝에서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이 중단되자 유현은 아쉬움보단 홀가분함을 느꼈다.

어차피 언젠가는 중단될 기록이었다.

200이닝을 돌파하며 상징성을 얻었으니 기록이 중단된 상황에서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한결 편해졌다.

기자들이 자신과 팀을 흔들어 대는 기사를 쓰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더 이상 무실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유현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대기록이 중단된 상황에서 유현이 첫 한두 경기 정돈 흔들릴 수도 있다고 한 몇몇 투수 출신 해설위원들의 생각과 달리, 유현은 확고한 목표를 지닌 채 등판을 준비했다.

연속 타자 탈삼진 신기록 경신.

종전까지 10타자 연속 탈삼진이었던 KBO리그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싶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과 팀을 뒤흔드는 기자들과 자칭 전문가들이 더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일단은 계획대로 경기가 흘러갔다.

1회부터 3회까지 유현은 의도적으로 보더라인 피칭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맞춰 잡는 수준에서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에게 안타 세 개를 허용하고, 병살타로 위기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투구 수를 아낀 효율적인 투구였지만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은 전혀 다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유현이 흔들리고 있다.

구속은 빠르지만 매 이닝 안타를 허용하고 있는 만큼 뭔가 문제가 있다. 잘하면 우리도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확신은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스윙하게 만들었고, 손쉽게 탈삼진을 잡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았다.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이 유현의 의도를 눈치챈 건 타순이 정확히 두 바퀴 돌았을 즈음이었다.

아, 물론.

눈치를 챘다 하더라도 딱히 대처법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투구해도 좀처럼 막을 수 없는 투수였다.

그래서 종종 작정하고 삼진을 잡곤 했다.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9이닝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을 때처럼 말이다.

컨디션이 베스트가 아닌 날에도 삼진을 많이 잡긴 했지만, 컨디션이 좋을 때의 유현을 상대하는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삼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컨디션이 좋을 때의 유현은 보더라인에 기가 막히게 걸치는 제구가 일품이다.

거기에 수싸움에도 일가견이 있다 보니 잔뜩 노리고 있을 땐 존에서 벗어나는 유인구를 던지고, 참으려고 하면 존 안으로 과감하게 찔러 넣으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대처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유현을 상대로 그나마 안타를 만들어 내려면 스트라이크 존을 확실히 잡은 채 모두 걷어 낸다는 느낌으로 타격해야만 했다. 한 가지 구종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것보다는 공략할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마저도 확률이 뚝 떨어졌다.

괜히 202이닝 동안 무실점 피칭을 한 게 아니었다. 어쩌다 얻어맞은 피홈런 하나가 며칠 동안 화제가 될 정도로 이번 시즌의 유현은 완벽했다.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허용한 상황에서 인천 그리핀스의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당당히 승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대기록을 헌납한다면 유현이 잘한 거고, 만에 하나 막아낸다면 번트나 억지로 몸에 맞는 볼이 아닌 안타로서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팡!

“스트라이크!”

신기록까지 탈삼진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현이 전력투구를 했다.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과감하게 찔러 넣으며 타자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와. 제구 안 돼서 맞기라도 하면 진짜 골로 가겠다. 무슨 공이 이렇게 빨라?’

몸 쪽으로 정확하게 제구되는 포심 패스트볼은 지금의 유현을 만들어 준 최고의 무기였다.

대부분의 타자들이 움찔하면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설사 제대로 대처하더라도 수직 무브먼트가 워낙 좋아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유현은 초구로 몸 쪽 포심 패스트볼을 선호하고, 대부분의 타자들이 이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타자들은 유현에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빈번하게 허용한다. 알면서도 못 치는 공을 던져 대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후 커터를 던져 파울, 2스트라이크를 수월하게 잡은 뒤 3구로 스플리터를 선택했다. 타자의 배트가 크게 헛돌며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삼구삼진.

4회부터 7회까지.

유현이 12개의 아웃카운트를 모조리, 단 한 번의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으면서 삼진으로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유현 선수가 12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을 다시 한 번 갱신합니다!

-이젠 칭찬하는 게 입이 아플 지경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내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유현의 대기록 행진은 12타자 연속 탈삼진에서 멈추고 말았다.

8회 초.

선두타자를 상대로 중견수와 2루수 사이로 애매하게 떨어지는 빗맞은 안타를 허용하면서 기록 행진이 중단된 것이다.

짝짝짝!

기록이 중단됐음에도 유현은 대전 펠컨스 팬들뿐만 아니라 인천 그리핀스 팬들에게도 박수갈채를 받았다.

-축하한다. 이젠 진짜 웬만한 기록은 다 갈아치웠군. 내친 김에 한 경기 최소 투구 완투승 기록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아서 포기할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닌 거 같아.’

-흐음. 재미없네. 난 네가 이번 시즌에 KBO리그를 초토화시킬 거라 예상했고, 온갖 기록을 죄다 갈아치울 것도 알았거든. 이왕이면 최소 투구 완투승도 노려보는 게 어땠을까 싶은데.

‘억지로 기록을 쥐어짜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아직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 하나 있잖아.’

-혹시 그거 말하는 거야?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집안싸움에 불쌍한 타자들만 죽어나겠군.

* * *

12타자 연속 탈삼진이 중단된 이후 유현은 다시 피칭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탈삼진을 잡기보다는 맞춰 잡는 데에 집중했다.

8회와 9회.

유현이 안타 하나를 더 허용하긴 했지만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7월에 타율 4할을 기록하며 펄펄 끓어올랐던 인천 그리핀스의 타선을 꽁꽁 틀어막는 데에 성공했다.

9이닝 5피안타 무사사구 12탈삼진 무실점.

지금껏 유현이 보여 줬던 피칭과 큰 차이가 없음에도, 경기가 끝난 뒤 유현은 기자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기존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을 12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갱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시즌.

유현은 9이닝 최다 탈삼진, 퍼펙트게임, 연속 이닝 무실점을 비롯해서 투수로서 세울 수 있는 온갖 기록들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팬들이 퍼펙트게임과 더불어 가장 바랐던 기록인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을 갱신하는 데에 성공했다.

2018시즌에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유현을 폄하하는 언론이 제법 있었다. 탈삼진 능력 부족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고전할 수도 있다는 게 일부 언론의 주장이었다.

유현은 기자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실력으로 확실하게 보여 줬다.

여환진이 세웠던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운 걸로도 모자라, 여환진은 끝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 또한 갱신하면서 탈삼진 능력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이날의 경기는 유현과 대전 펠컨스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시즌 전 패전투수가 된 이후 체력적인 문제로 유현이 흔들릴 거라고 주장한 일부 언론에게 시사하는 바가 명확한 경기였으니까.

유현에게 체력적인 문제 따윈 없었다.

체력적인 문제가 있는 투수가 어떻게 97구 완봉승을 거두며 12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날.

유현은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모처럼 도발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제 방어율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아, 네. 0.047로 알고 있습니다.”

“0.47도 아니고 0.047입니다. 190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1실점을 했는데,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분들은 관심 좀 끌어보겠다고 제가 혹사로 인해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거라느니 멘탈이 나갈 거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더군요.”

유현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연패를 끊긴 했지만 외부에서 자꾸 팀을 흔들어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안달 난 게 보여서 거슬렸다.

그리고 유현은, 그들이 앞으로 자신에 대해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일부 언론과 척을 지더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짚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떤 투수건 한 시즌 내내 실점하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 매 경기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해도 방어율이 오릅니다. 그것만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유현 선수가 리그 최고의 투수인 건 기록이 말해 주고 있죠.”

“네. 그러니까 일부 언론에서 제발 홈런 하나 맞았다고 난리를 호들갑 좀 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다가 9이닝 2실점 완투승하면 부상을 숨기고 있다고 난리칠 거 같아 무섭습니다.”

할 말을 다 한 유현은, 내친 김에 이번 시즌 달성하고 싶은 개인 기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남은 시즌 동안 유일하게 2위에 머물고 있는 기록을 1위로 갱신하고 싶습니다.”

유현이 2019시즌 마지막 목표를 내비췄다.

* * *

7월 28일 등판까지.

유현이 195탈삼진, 김정수가 211탈삼진을 기록하며 탈삼진 경쟁을 하고 있었다.

탈삼진 3위인 송명현이 171탈삼진이라 1위를 탈환하는 건 사실상 어려워 보였고, 유현과 김정수가 탈삼진왕을 놓고 집안싸움을 하는 모양새였다.

일단 두 사람 다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인 223탈삼진은 갱신이 가능해 보였다.

중요한 건 시즌이 끝났을 때 두 선수 중 누가 탈삼진 1위를 차지할까였다.

유현과 김정수는 서로 친한 사이다.

강태영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이후 유현과 가장 많이 식사를 한 게 김정수와 최수환일 만큼 두 사람은 좋은 관계다.

하지만 그것과 기록은 별개의 문제였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탈삼진 1위까지 쟁탈해 전 부문 1위를 하고 싶었고, 김정수의 입장에서는 죄다 2위인 상황에서 탈삼진 1위만큼은 절대로 내주고 싶지 않았다.

안용석 감독은 두 선수의 로테이션을 별도로 조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등판일에 맞춰 등판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기를 바랐다.

유현의 도발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김정수는 7월 31일 등판에서 8이닝 4피안타 무2사사구 1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유현과의 격차를 다시 벌리는 데에 성공했다.

시즌 226탈삼진 고지에 도달하며 이제 겨우 7월임에도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 치우는 데에 성공했다.

공은 유현에게로 넘어갔다.

김정수가 좋은 피칭을 보여 준 상황에서, 유현이 과연 격차를 좁힐 수 있을지 많은 언론과 야구 팬들이 관심을 드러냈다.

그에 화답하듯 유현 또한 다음 등판에서 정확히 9이닝 3피안타 1사사구 15탈삼진 1실점 피칭으로 시즌 21승을 수확, 다시 김정수와의 격차를 16탈삼진으로 좁혔다.

바야흐로 탈삼진 대전이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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