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9화 (79/155)

79화 가치 (2)

두 선수가 똑같이 9이닝을 투구하면서 1피안타만을 허용했다. 공교롭게도 탈삼진도 나란히 13개씩을 잡으며 대등한 피칭을 선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유현은 패전투수가 됐고, 양원중은 9이닝 1피안타 13탈삼진 완봉승으로 시즌 14승째를 챙겼다.

한 명은 평범한 중견수 앞 안타를, 다른 한 명은 솔로 홈런을 허용한 게 승패를 갈랐다.

경기가 끝난 뒤.

최수환과 펠릭스 곤잘레스를 비롯해 유현과 친한 몇몇 타자들이 평소와 달리 유현에게 다가가지 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타자들의 모습에 유현이 인상을 썼다.

“다들 왜 그렇게 눈치를 봐?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현, 미안하다. 우리가 점수 못 뽑아서 졌다. 무릎 꿇고 손들고 반성한다.”

“미안해요, 선배. 우리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완투패를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그동안 계속 잘해 줬잖아. 살다 보면 득점을 못 만드는 날도 있고 그런 거지. 다들 너무 호들갑 떨지 마.”

“그래도…….”

“미안하면 다음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 때려 주면 되겠네. 평소처럼 넉넉하게 득점 지원해 줘.”

“네, 선배. 제가 다음 경기에서는 꼭 연타석 홈런 때려서 득점 지원 넉넉하게 해드릴게요.”

타자들은 유현의 완투패를 신경 썼다.

자신들이 양원중에게 완봉을 당해서 유현이 패전투수가 된 것 같아 눈치를 봤다.

정작 유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202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한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기록이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한 시즌을 방어율 0으로 끝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언젠가는 실점을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1할 5푼 타자에게 홈런을 맞아서 놀라긴 했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다.

1할 5푼이라는 건 어쨌거나 100타석 중 15타석은 안타를 만들 수 있는 타자라는 뜻이고, 힘만큼은 진짜라고 평가받는 타자가 쳐낸 안타가 홈런인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유현의 완투패가 팀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거였다.

지난 시즌부터 팀 승리의 상징이 된 유현이 패배했다는 건, 선수들에게 있어 단순히 1패가 아닌 팀의 기둥이 무너진 거였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곧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전반기를 맹렬하게 질주한 영향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부진인 걸까?

대전 펠컨스는 후반기 첫 주 일요일 경기를 남겨 둔 상황에서 주간 1승 4패를 기록하며 시즌 첫 2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다.

광주 앨리펀츠를 상대로 수요일 경기에서 1승을 챙긴 뒤, 목요일 경기부터 토요일 경기까지 내리 3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패배의 원인은 각가지였다.

선발투수가 잘 투구했음에도 타선이 터지지 않았고, 불펜이 무너지면서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아예 선발투수가 일찌감치 무너진 경기마저 있었으니까.

확실한 건 대전 펠컨스가 유현이 시즌 첫 패를 당한 경기를 기점으로 일시적이지만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는 거였다.

정작 당사자는 시즌 첫 패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타선이 넉넉하게 득점 지원을 해줘서 편하게 피칭할 수 있었는데, 한 경기 득점 지원을 해 주지 못했다고 원망해서야 되겠는가.

시즌 첫 패와 무관하게 유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요일 등판을 준비했다.

팀의 연패를 끊어야 한다는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지닌 채로 말이다.

* * *

유현이 1할 5푼 타자에게 홈런을 맞으며 시즌 첫 패전투수가 됐을 때.

일각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나왔다.

경기 당 95.1구를 투구할 정도로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했다지만 매 경기 완봉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오버 페이스라고, 유현이 후반기에 급격한 컨디션 난조를 겪을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이라도 안용석 감독이 유현을 철저하게 관리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정작 유현은 구단에서 많은 편의를 봐주는 가운데 스스로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며 확실하게 컨디션 관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95.1구라는 평균 투구 수에서 보듯이 많은 투구 수를 기록하며 억지로 완봉을 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유현의 시즌 방어율은 0.05다.

시즌 181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고작 1실점을 했을 뿐인데도 온갖 흔드는 기사가 나오는 건, 그만큼 유현이 경이로운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유현 다음으로 낮은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가 1.51인 김정수다. 다른 시즌이었다면 압도적으로 MVP가 됐을 법한 성적을 기록 중인 투수보다 무려 1.46이나 방어율이 낮다.

전반기 내내 7푼의 타율을 기록하던 포수가 리그 방어율 1위 투수에게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는 게 야구라는 스포츠다.

1할 5푼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작 당사자는 홈런을 맞은 걸 잊고 다음 등판 준비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외부에서 호들갑을 떨며 팀을 흔들어댔다.

유현은 그 상황 자체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흔들리는 거야 그렇다 쳐도 계속되는 기사에 팀이 조금씩 흔들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유현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기자들을 입 다물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흔들리는 팀이 제자리를 잡도록 도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유현은 지석한에게 7월 28일 등판에서 어떤 식으로 피칭을 할지 전달했다.

“정말 그렇게 투구하시게요?”

“응. 이닝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야.”

“뭐…… 저야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죠. 그리고 선배라면 그렇게 투구해도 대량 실점할 일은 없을 테고요.”

“한 점도 안 내줄 생각인데?”

“그리핀스 타자들 머리 좀 아프겠네요.”

7월 28일 경기.

유현은 미친놈이 되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 * *

등판을 앞둔 유현은 자신감이 넘쳤다.

몇몇 기자들은 유현의 등판 당일까지도 체력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후반기에는 컨디션이 떨어질 거라 이야기했지만, 정작 유현은 자신의 체력이 시즌 초나 7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즌 내내 루틴을 철저하게 지켰고, 몸에 좋은 보양식을 잔뜩 챙겨 먹었다. 거기에 땅의 정령의 축복으로 인해 딱히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만한 일도 없었다.

그 증거로…….

“스트라이크!”

유현은 1회 말 인천 그리핀스의 선두타자 오선광을 상대로 해서 초구부터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과감하게 찔러 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초구 157km는 유현의 컨디션이 좋을 때만 나오는 거였다.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날에는 초구 157km를 던진 적이 없었다.

유현은 자신을 향해 체력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공으로 답했다.

나 컨디션 좋다고, 체력에 대해서 쓸데없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말이다.

다만…….

컨디션이 좋은 것과 달리 경기 내용은 썩 좋지 못했다.

3회까지.

유현은 실점을 하지 않았지만 안타를 세 개 허용했다. 병살타를 유도해서 위기를 벗어나긴 했어도, 초구 157km를 던진 것에 비해서는 만족스러운 경기 운용이 아닌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유현이 안타를 맞고 있다는 건, 인천 그리핀스의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유현 저놈, 저번 경기에서 홈런 맞더니 오늘 살짝 맛이 간 거 같은데?”

“공이 빠르고 위협적이긴 한데 평소처럼 보더라인으로 파고들지를 못해. 확실히 오늘은 평소보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게 분명해.”

“좋아. 우리도 유현 상대로 득점 좀 뽑아 보자고. 이제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도 깨졌잖아? 광훈 선배가 잘 막아 주고 있을 때 분위기를 가져오자고.”

4회 말.

안타 세 개를 허용했지만 병살타 세 개를 만들어내며 유현은 선두타자 오선광을 다시 상대하게 됐다.

타순이 정확히 한 바퀴 돈 시점.

유현이 모자 끝을 만졌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지석한이 사인을 냈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보자고.’

-넌 진짜 악마야.

‘칭찬 고마워. 오늘 그리핀스 타자들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해 주자고.’

3회까지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커터를 적절히 섞어 던졌다.

하지만 보더라인으로 집요하게 찔러 넣지 않았다. 맞춰 잡는다는 느낌으로 투구했고, 철저하게 땅볼을 유도하는 피칭을 했다.

안타를 세 개나 만들다 보니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은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다.

유현의 투구 수가 3회까지 고작 21개에 불과했다는 걸, 그리고 유현이 하이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단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이제부터 쇼 타임 시작이야.’

* *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 그리고 또 삼진.

유현은 4회에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고서 깔끔하게 이닝을 틀어막았다.

5회에도, 그리고 6회에도.

유현은 삼자범퇴로 이닝을 틀어막으며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당한 상황에서,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은 유현이 어떤 목표를 지닌 채 피칭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 자식, 지금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 노리고 있는 거 맞지?”

“네. 그런 것 같은데요.”

“보더라인으로 못 던진 게 아니라 안 던진 거였어. 적당히 안타 맞는 척하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스윙하게 만들려고.”

“어쩐지 157km를 기록한 것치고는 안타를 맞는다 싶더니, 저러려고 그런 거였어?”

“나인테일즈 애들이 왜 유현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지 알 것 같다. 목적을 가지고 투구하는데, 그 목적을 막을 수가 없어.”

“보더라인으로 집요하게 찌르고 들어오는데 저걸 어떻게 공략해요. 홍현의처럼 얻어걸리는 홈런을 때리면 모를까.”

“하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는 순간, 유현이 결정구로 선택한 건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그리고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8km였다.

유현이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을 노린다는 걸, 자신들을 상대로 삼진을 잡으려 한다는 걸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은 확실하게 느꼈다.

그럼 뭐한단 말인가.

알면서도 치지 못할 정도로 유현의 공이 좋고, 제구 또한 완벽하게 되고 있는데 말이다.

광주 앨리펀츠의 홍현의가 유현을 상대로 얻어걸린 솔로 홈런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득점을 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유현의 컨디션이 좋았다.

3회까지 세 개의 안타를 허용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4회 이후의 유현은 언터쳐블이었다.

4회와 6회.

최수환이 인천 그린핀스의 에이스 이광훈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했다. 유현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37호 홈런과 38호 홈런을 내리 때려내며 인천 그리핀스의 에이스 김광훈을 6회에 강판시켰다.

7회 말.

4대0의 리드를 허용한 상황에서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유현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대기록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 작전 야구를 구사해야 할지를 두고 말이다.

고민 끝에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이 결론을 내렸다.

“정면 승부 하자. 어차피 유현을 상대로 머리 굴려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위닝 시리즈를 확보한 상황에서 점수 차이가 벌어졌는데 대기록 내주지 않으려고 번트 대는 건 아닌 것 같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나인테일즈처럼 추잡하게 굴지 말고 당당하게 승부하죠. 그래서 대기록 헌납하면 뭐…… 유현 선배가 잘한 거죠.”

“좋아. 어디 한 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인천 그리핀스 타자들이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을 지닌 채 타석에 들어섰다.

7회 말.

타순이 두 바퀴 돈 상황에서 인천 그리핀스의 1번 타자 오선광이 이날 세 번째로 유현을 상대하게 됐다.

오선광은 시즌 타율 3할 4푼 5리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좋은 타자이지만, 약점이 아주 확실한 타자이기도 했다.

정교한 타격 실력과 선구안, 뛰어난 외야 수비와 빠른 발까지 지녔지만 빠른 공에 약하다는 약점 또한 확실한 타자였다.

그리고 유현은 빠른 공에 약한 타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포심 패스트볼을 연속으로 던져서 2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오선광은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애를 먹는 모습을 보였다.

‘스플리터다. 이번엔 스플리터야.’

오선광은 유현이 자신을 상대로 스플리터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공이 너무 빨랐다. 그리고 뚝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살짝 위로 떠올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유현이 자신을 상대로 포심 패스트볼만 세 개 연속으로 던졌다는 걸 말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포심 패스트볼 세 개로 헛스윙 삼진.

가볍게 삼구삼진을 잡아낸 유현이 이미 한 번 도달해 본 적 있는 10타자 연속 탈삼진 타이기록에 다시 한 번 도달했다.

-유현 선수가 158km짜리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삼구삼진을 잡아냈습니다. 10타자 연속 탈삼진 타이기록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한 발자국입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유현 선수가 또 하나의 대기록을 경신하게 됩니다.

-도대체 누가 이 선수에게 체력이 떨어졌다고, 후반기에 부진했다고 했나요! 체력이 떨어지기는커녕 158km짜리 패스트볼을 뻥뻥 뿌리고 있는데 말이죠.

-이제 유현 선수에게 체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사? 체력 저하?

유현은 자신과 팀을 흔드는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 실력을 통해 물어보았다.

7회에도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가 체력 저하면, 다른 투수들은 모두 장사 접어야 하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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