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가치 (1)
[나눔 팀, 드림 팀에 11대2 대승. 최수환 4타수 3안타 2홈런 6타점으로 MVP.]
[이젠 도루까지 하는 유현, 대전 펠컨스가 비밀리에 준비한 대주자?]
[안용석 감독 “상황에 따라 대주자 유현을 볼 수도 있을 것.”]
[1타수 1안타 1득점 2도루, 유현에게는 내셔널리그가 답?]
[강태영, 올스타전에서 시원한 그랜드슬램으로 올스타전 MVP 영애!]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 “강태영은 최고의 선수다. 우린 다음 스토브리그에서도 KBO리그 선수들을 주목할 것이다.”]
KBO리그의 올스타전은 최수환이 4타수 3안타 2홈런 6타점을 기록하면서 MVP가 됐고, 메이저리그에서는 강태영이 8회 말에 만루 홈런을 터트리며 아메리칸 리그의 승리를 견인하고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그 두 선수보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의 관심을 끈 건 바로 유현이었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올스타전에서 1이닝을 책임지며 완벽한 투구를 선보인 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정도야 지금의 유현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팬들이 주목한 건 투수로서가 아닌 타자로서 유현이 세운 기록이었다.
1타수 1안타 1득점 2도루.
안타야 빗맞은 안타였고 중요한 건 도루였다.
과감하게 2루 베이스를 훔친 뒤 3루 베이스까지 훔치자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유현이 내셔널리그 구단과 계약하면 더 많은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이야기가 나왔고, 시즌 중에 대전 펠컨스가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정도로 유현이 보여준 도루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언론의 관심에 안용석 감독은 답했다.
기회가 된다면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할 수도 있다고, 유현의 등판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전략적인 카드로 고려하겠다고 말이다.
확정이 되지 않았지만 대전 펠컨스 팬들은 시즌 중에 유현이 대주자로 기용될 거라 확신했다.
타석에 들어서는 것도 아닌 대주자로 기용하는 거라면 전략적으로 충분히 사용 가능한 작전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정작 유현은 자신의 대주자 기용에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팀이 원하면 대주자든 대타든 나가면 되는 거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보다는 당장 며칠 뒤에 있을 등판을 준비하는 게 낫다고 봤다.
-벌써 후반기라니 시간 참 빠르군.
“그러게. 이제 한국시리즈 포함해서 대략 열 몇 번 등판하면 시즌이 끝나는 거잖아.”
-얼마 안 남았으니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팀은 1위하고, 난 온갖 지표에서 1위를 싹쓸이하고. 그 후에 미련 없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고.”
* * *
나눔 팀이 드림 팀을 11대 2로 꺾으며 올스타전이 마무리가 됐다.
찰나의 휴식을 즐긴 10개 구단들은 다시 치열한 순위 싸움을 이어나갈 채비를 끝마쳤다.
일단 1위는 대전 펠컨스로 사실상 굳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전반기에만 62승 27패를 기록한 대전 펠컨스는, 산술적으로 남은 경기에서 5할 승률만 거두더라도 89.5승으로 우승에 가까워진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 따윈 없었다.
대전 펠컨스 선수단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승수를 쌓아 일찌감치 자력 우승을 확정짓는 거였다.
2위 울산 알바트로스와 7경기 차이가 나긴 하지만, 55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실제로 지난해의 대전 펠컨스는 막판까지 집요하게 서울 레오파즈를 괴롭히며 경이로운 후반기를 보내지 않았던가.
대전 펠컨스가 가장 원하는 건 최대한 빨리 자력 우승을 확정짓고 한국시리즈 대비 모드로 전환하는 거였다.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와 신예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자력 우승을 하루라도 더 빨리 확정짓는 게 중요했다.
2위는 울산 알바트로스였다.
대전 펠컨스와 7경기 차이가 나긴 하지만 3위 서울 레오파즈와 4경기 차이를 벌린 상황에서, 최대한 많은 승수를 쌓아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짓는 걸 목표로 삼았다.
반면 서울 레오파즈는 2위 탈환을 위해 후반기 사활을 건 준비를 했다. 2위로 포스트시즌을 맞이하는 것과 3위로 포스트시즌을 맞이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4위부터 7위였다.
4위 광주 앨리펀츠와 7위 부산 유니콘스가 고작 3.5경기 차이가 날 정도로 중위권 싸움이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포스트 시즌 진출 티켓을 얻기 위해 중위권 팀들은 매 경기 치열한 접전을 예고했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는 공교롭게도 후반기에 4위 광주 앨리펀츠, 5위 인천 그리핀스, 6위 대구 재규어스, 7위 부산 유니콘스를 순서대로 상대하게 됐다.
* * *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 풀리는 날,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경기가 꼬이는 날.
대전 펠컨스의 입장에서는 광주 앨리펀츠를 상대로 홈에서 치르게 된 후반기 첫 경기가 바로 그런 경기였다.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의 휴식 덕분일까?
전반기 막판에 구속 감소로 고생하던 광주 앨리펀츠의 에이스 양원중의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152km가 찍혔다. 구위가 좋아서 타자들의 배트가 더러 밀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6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
양원중이 완벽한 투구로 팀 타율 1위인 대전 펠컨스 타선을 꽁꽁 틀어막았다.
모든 타자들이 매 경기 좋은 타격을 보여줄 수는 없다. 타격에는 슬럼프가 있기 마련이고, 상대 투수가 비정상적으로 잘 던지는 날도 있으니까.
대전 펠컨스 타자들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상대 투수인 양원중의 컨디션이 너무 좋다는 것, 그리고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잘 맞는 타구가 호수비에 가로막히며 안타를 몇 번이나 빼앗겼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상대 투수가 잘 던져서 득점을 만들어내기 힘든 상황에서 행운의 여신마저 대전 펠컨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오! 저게 잡히냐!”
“쟤들 지금 한국 시리즈 7차전 하냐? 오늘따라 수비가 너무 타이트한데?”
“후반기 시작부터 너무 힘 빡 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저러다가 막판에 지칠 텐데.”
“뭐…… 일단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1승 1승을 쌓아나가겠다는 거겠죠. 5위 싸움 하는 팀이 뒷일을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응. 우리도 그러다가 불펜 과부하로 5위에서 8위로 순식간에 떡락했었지.”
대전 펠컨스 타자들 입장에서 뼈아픈 건, 하필이면 타선이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기가 에이스 유현이 등판한 경기라는 거였다.
2019시즌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 타선은 평균 6.2득점을 올렸다. 에이스가 승리투수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양원중을 상대로도 어떻게든지 득점을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예 안타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유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5회 초까지 단 하나의 안타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퍼펙트를 기록한 것이다.
199이닝 연속 무실점.
실점 없이 아웃카운트 세 개만 더 잡으면 선수 본인이 바라던 200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경이로운 대기록을 세우게 되는 상황.
6회 초.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유현의 컨디션이 워낙 좋기에 계획한 대로 사인을 냈고, 포수가 원하는 코스에 정확하게 찔러 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7번 타자를 상대로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 8번 타자를 상대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던져 헛스윙 삼진, 9번 타자를 상대로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루킹 삼진까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6회 초 또한 삼자범퇴로 틀어막은 유현이, 18번째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 어퍼컷 세레모니를 했다.
[와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펠컨스타디움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전광판에 200이닝 연속 무실점을 축하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유현 선수가 200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달성합니다! 야구 역사상 다시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유현 선수.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오늘 만들어진 이 기록을 깨지는 못 할 거라 확신합니다. 이런 대단한 기록을 세운 유현 선수에게 같은 야구인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야구라는 스포츠가 없어질 때까지도 깨지지 않을 수 있는 대기록을 세웠음에도 유현은 어퍼컷 세레모니를 한 걸 제외하면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 영 시원치가 않다?
‘150이닝 넘긴 순간부터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었으니까. 200이닝을 돌파한 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긴 해도 좋아서 팔짝팔짝 뛸 만한 기록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리고?
‘실점 안 하려면 집중해야지.’
200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워서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솔직한 말로 194이닝 연속 무실점이나 200이닝 연속 무실점이나 앞으로 깨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록이라고 봐야 한다. 앞자리가 1에서 2로 달라진 상징성이 있는 거지, 기록 달성 자체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유현에게는 그보다 팀의 승리가 더 중요했다.
오늘 양원중의 컨디션이 워낙 좋아 득점을 내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유현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거였다.
유현의 퍼펙트 행진은 8회까지 이어졌다.
광주 앨리펀츠 코칭스태프는 각종 작전까지 걸어가면서 유현을 상대로 안타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이어진 9회 초.
24개의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는 동안 단 하나의 안타도 만들어내지 못한 최악의 상황에서, 광주 앨리펀츠가 대타 작전을 시도했다.
신인 타자 홍현의.
시즌 홈런 15개, 하지만 타율은 1할 5푼 5리.
광주 앨리펀츠가 2019시즌 드래프트에서 2차 1지명으로 뽑은 이 신인 타자는, 힘 하나만큼은 진짜라 평가받고 있었다. 1군에서 백업과 대타로 경험을 쌓으면서 15홈런을 기록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다.
문제는 타율이 1할 5푼 5리라는 것.
스치기만 해도 넘어간다고 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지만 타격 기술은 아직 프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신인 타자.
그를 9회 초 선두타자로 기용한 광주 앨리펀츠 코칭스태프의 의도는 명확했다.
큰 거 한 방.
주전 타자들이 안타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대타 작전을 통해 큰 거 한 방을 노려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제대로 적중했다.
딱!
유현이 3구째로 던진 바깥쪽으로 빠지는 투심 패스트볼을 홍현의가 억지로 밀어 쳤다. 하체가 살짝 무너진 상태로 스윙하다 보니 힘이 제대로 실리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워닝트랙 앞에서 잡힐 거라 예상됐던 타구는 예상보다 더 많이 뻗어나가며 펜스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호오오오옴런! 홍현의 선수의 시즌 16호 홈런! 광주 앨리펀츠가 길었던 침묵을 깹니다!
-와…… 저게 넘어가네요. 하체가 무너진 상태에서 스윙했거든요. 순전히 팔 힘만을 이용해서 홈런을 만들었다는 건데, 진짜 힘 하나는 장사인 거 같습니다. 타격 기술만 조금 더 보완하면 최고의 홈런 타자가 될 거라고 봅니다.
-유현 선수, 이번 시즌 첫 실점이자 첫 피홈런을 7월 23일에 기록합니다.
-유현 선수는 위축될 필요 없습니다. 고작 시즌 첫 피홈런을 허용했을 뿐입니다. 시즌 방어율이 0에서 0.05가 됐을 뿐입니다.
-타구가 넘어가는 걸 보고 헛웃음을 내뱉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유현 선수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홈런을 허용하는 순간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홈런을 허용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하체가 무너진 상태에서 상체만을 이용해 한 스윙으로 홈런을 만들어낸 괴력에 놀라서였다.
‘저게 넘어가?’
-힘 하나는 장사인 것 같은데? 2할 5푼 수준의 타율을 기록할 수만 있어도 홈런왕은 가뿐하겠어.
‘그러게. 워닝트랙 앞에서 잡힐 줄 알았는데 넘어가는 거 보고 솔직히 놀랐어.’
유현의 대기록 행진이 202이닝 연속 무실점에서 종료되고 말았다. 8회까지 이어져오던 퍼펙트 행진 또한 깨져버렸다.
다행히 유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피홈런을 허용했음에도 세 타자 모두에게 땅볼을 유도하며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9회 말.
110구를 투구한 상황에서 양원중이 팀의 승리를 위해 다시 한 번 올라왔다.
이미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145km 내외로 떨어졌을 만큼 힘이 빠진 상태였다. 유현처럼 정신 나간 체력을 지닌 게 선수가 아니라면 투구 수 100구를 넘긴 뒤부터는 정신력으로 투구를 한다고 봐야 했다.
불펜이 불안하기에, 1점 차 승부에서 불펜이 실점없이 1이닝을 책임져 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기에 한 선택이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해서는 잡을 수 있는 경기를 확실하게 잡아 착실하게 승수를 쌓아나가는 게 중요하다. 다 잡은 경기를 놓치면 팀 전체에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양원중은 자신이 어째서 광주 앨리펀츠의 에이스인지, 135승 투수인지 제대로 보여 줬다.
구속이 떨어진 상황에서 삼진보다는 맞춰 잡기에 집중했다. 코너워크에 신경 쓰면서 실투를 던지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2루수 라인 드라이브, 중견수 플라이, 마지막으로 좌익수 플라이까지.
아웃카운트 세 개를 깔끔하게 잡아낸 양원중이 경기를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하며 유현에게 시즌 첫 패를 안긴 뒤 포효했다.
19승 1패.
시즌 무패를 달리던 유현이 완투를 하고도 패전투수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