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7화 (77/155)

77화 팬 퍼스트 (2)

유현, 최수환, 김정수.

세 선수가 종합병원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택시에서 내린 송명현이 허겁지겁 유현의 차를 향해 달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자자, 얼른 들어가자. 행사 끝나고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고. 어이, 서울 촌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선배님들과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지 좋습니다만, 이왕이면 고기가 조금 더 좋습니다.”

“그래. 행사 끝나고 고기 먹자. 2019시즌 홈런왕님께서 한턱 쏠 테니까.”

네 선수는 저녁식사로 뭘 먹을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유니폼을 입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몇몇 아이들이 유현과 선수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유현은 미소를 지은 채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아저씨 누군지 알아?”

“네! 유현 선수요!”

“우와! 유현 아저씨다!”

“사인해 주세요!”

아이들은 유현을 한눈에 알아봤다.

두 시즌 연속 KBO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이며, 대전 펠컨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괴물 에이스이기에 야구를 좋아하는 대전의 아이들이 유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유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서 휴게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즉석 사인회가 열렸다.

유현이 가장 인기가 많았고, 최수환과 김정수 또한 아이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서울 레오파즈의 소속이지만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송명현에게도 아이들은 제법 관심을 보였다.

선수들은 아이들을 한참 동안 사인을 해준 뒤에야 대전 펠컨스 프런트 직원을 따라 이동했다.

네 선수가 도착한 곳은 소아병동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큰 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위해 선물과 작은 사인회를 준비한 거였다.

아이들 중에는 소아암 환자들도 있었다.

유현과 선수들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고 사인도 하면서 하루 종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몇몇 아이들은 유현을 향해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아저씨! 내년에 메이저리그 진출하죠?”

“나중에 아저씨처럼 멋진 야구 선수가 될 거예요! 퇴원하면 야구부 들어갈 거예요! 선생님이 전 야구하면 잘할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 나중에 프로 데뷔하면 아저씨 꼭 찾아와. 그립 가르쳐 줄 테니까. 알았지?”

* * *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루틴과 멘탈 다음으로 강조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팬을 항상 소중히 하라는 거였다.

팬이 없으면 야구선수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땅의 정령의 소신이었고, 유현은 땅의 정령의 말에 따라 팬들을 끔찍이도 챙겼다.

팬들이 원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인에 응했다. 홈경기면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까지 원하는 팬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줬고, 원정 경기일 때는 숙소로 가장 늦게 들어가거나 버스에 가장 늦게 타는 선수가 유현이었다.

사실 유현은 땅의 정령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팬 서비스가 그리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데뷔 시즌에는 속된 말로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팬들이 주는 선물은 받더라도 사인을 해 주지 않았고, 팬 서비스를 가지고 말이 많이 나오는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누구보다 팬을 소중히 생각하는 선수로 환골탈태했다. 팬이 없으면 선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유현은 올스타 투표 전체 1위를 차지했고, 2019시즌 관련 상품 판매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팬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받은 사랑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종합병원을 방문해 소아병동 환자들에게 선물을 주고 소규모 사인회를 열자는 홍보팀 직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런 유현에게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팬들의 사랑에 보답할 기회가 두 번 더 찾아왔다.

하나는 대전 펠컨스에서 준비한 대전 펠컨스 선수들의 단체 사인회였다.

당연하지만 유현에게 가장 많은 팬들이 모였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기가 많은 하지성이나 김태성보다도 더 많은 팬들이 유현의 사인을 받기 위해 펠컨스타디움 주차장에서 줄을 섰다.

유현은 다른 선수들보다 무려 2시간을 더 사인을 한 뒤에야 사인회를 끝마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올스타 투표가 끝난 이후 홍보팀의 제안으로 만든 개인 SNS를 통해 진행한 하나의 이벤트였다.

[안녕하세요, 팬 여러분. 대전 펠컨스의 77번 유현입니다. 올스타 득표 1위를 기념해서 한 가지 이벤트를 할까 합니다. 제가 올스타전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주세요.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의 요청 사항을 올스타전에서 그대로 하겠습니다. 최다 추천을 받은 댓글을 작성해 주신 분께는 제가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갈 예정입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이벤트에는 많은 야구팬들이 참여했다. 댓글 수가 무려 2만 개가 넘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중 5만 개가 넘는 추천을 받으며 당당히 추천수 1위에 오른 댓글은, 올스타전에 임하는 유현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 * *

올스타전 당일.

유현은 나눔 팀의 선발투수로서 1회 초에 마운드에 올랐다. 유현과 함께 호흡을 맞춘 포수는 전반기에 타율 2할 7푼 4리 14홈런 55타점을 기록하며 차영석이 은퇴한 이후 대전 펠컨스의 안방마님 자리를 확실하게 꿰찬 지석한이었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

공 11개를 던져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낸 유현이 홈 팬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유현은 그런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손을 흔들며 화답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이날 유현의 임무는 아웃카운트 세 개가 전부였다.

올스타전이니만큼 다른 투수들에게도 등판 기회가 주어져야 했고, 안용석 감독은 투수들에게 1이닝씩을 맡길 거라고 약속했었다.

대전 펠컨스 팬들의 입장에서는 유현이 더 많은 이닝을 던지길 바랐겠지만, 다른 팀 팬들을 위해서는 유현이 양보하는 게 맞았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의 표정은 미묘했다.

올스타전이니만큼 기분 좋게 웃으며 즐기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다소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앉아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유현에게 홈런 1위를 내달리고 있는 최수환과, 시즌 32홈런으로 홈런왕 경쟁을 하고 있는 울산 알바트로스의 4번 타자인 박명우가 양옆으로 앉으며 물었다.

“흐흐흐. 기분이 어때?”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아니에요?”

“……토할 것 같은데요.”

“마운드 위에서는 타자들 전부 다 죽일 것 같은 기세로 투구하는 놈이 긴장을 해?”

“투구랑 타격은 다르니까요. 저 진짜 고등학교 이후로 타격 해보는 거 처음이에요.”

SNS를 통해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바로, 유현이 타격하는 걸 보고 싶다는 거였다.

이에 안용석 감독은 흔쾌히 답했다.

나눔 팀이 어느 리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득점권 상황이 아닐 때 유현을 대타로 한 타석 기용할 거라고 말이다.

졸지에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타격을 하게 된 유현은, 일찌감치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내 타격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조금 하다 보니 배팅볼을 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고, 간혹 잘 맞은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는 모습 또한 보였다.

문제는 배팅볼을 치는 것과 대타로서 타석에 서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마운드에 설 때는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던 유현이, 대타로 출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유독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이렇게 된 이상 뭐?

‘큰 거 한방 노린다.’

* * *

“현아. 대타 준비해라.”

“끄응…… 네, 알겠습니다.”

“편하게 하고 와. 네가 헛스윙 삼진 당하는 걸 보면 팬들은 몰라도 선수들은 좋아할 거다.”

“그 모습 보기 싫어서라도 큰 거 한 방 치고 와야겠어요. 지금 놀리는 것만으로도 짜증나거든요.”

2회 말.

나눔 팀이 5타자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기분 좋게 4득점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안용석 감독은 일찌감치 유현을 대타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나눔 팀의 세 번째 투수인 김정수가 삼진 두 개와 중견수 플라이로 3회 초를 깔끔하게 막아 낸 상황에서, 안용석 감독이 유현을 대타로 기용하며 선두타자로 내보냈다.

김정수가 임무를 끝마칠 즈음부터 유현은 더그아웃 앞에서 보호대를 착용한 채 스윙 연습을 해댔다. 그리고 그런 유현을 향해 원정 팀 더그아웃에서 송명현이 목청껏 외쳤다.

“선배님, 파이팅!”

“그래. 시원하게 한 방 치고 올게.”

“시원하게 선풍기 돌리는 게 아니고요?”

“선풍기 돌리면 내가 저녁 사고, 큰 거 한 방 치면 네가 저녁 사는 거 어때?”

“저야 좋죠! 저녁 잘 먹겠습니다!”

“누가 살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스윙 연습을 수차례 하는 사이 공수 교대가 끝이 났다. 이제는 유현이 타석에 들어설 때였다.

[아모르 댄스~]

유현은 자신의 등장 곡으로 울려 퍼지는 트로트 음악에 맞춰 막춤을 추며 타석으로 향했다.

더그아웃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 긴장이 되더니, 막상 3회 말 선두타자로 나가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귀신같이 긴장감이 사라지며 차분해졌다.

스윙 연습을 하면서 유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큰 거 한 방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날 거라 생각하는 타자들을 당황시킬 수 있을지.

-홈런! 홈런! 홈런!

‘……시끄러워.’

-이왕 큰 거 한 방 노릴 거면 홈런 치는 게 좋잖아. 타이밍은 얼추 맞는 것 같던데?

‘해봐야지. 실패하면 선풍기 돌리고 저녁밥 사면되는 거고, 성공하면 타자들 넋 나간 표정 볼 수 있어서 재밌을 거고.’

-시원하게 홈런 한 방 가즈아!

유현의 목표는 확실했다.

이왕 대타로 타석에 선 거, 큰 거 한 방을 쳐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3회 말에 올라온 드림 팀의 투수는 2회 말 2아웃 상황에서 올라와 1․3루 상황에서 추가 실점의 위기를 틀어막은 인천 그리핀스의 에이스 이광훈이었다.

다양한 구종을 던지기는 하지만 153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에 고속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하는 투수였다.

정상적으로 승부한다면 유현이 이광훈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현은 고등학교 이후 타격 훈련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타자고, 이광훈은 토미존 서저리를 받으며 공백이 있긴 했지만 이번 시즌 전반기에만 10승을 수확하며 2.5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정상급 투수이니까.

물론 정상적으로 승부한다면 말이다.

타석에 선 투수를 상대로 마운드 위에 선 투수가 치밀한 볼 배합을 가져갈 거라고 보기 어려웠다. 정상적인 볼 배합을 가져갈 확률이 높았다.

이광훈은 유현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초구 몸 쪽 하이 패스트볼을 선호하는 강심장이자 싸움꾼, 타자와의 승부를 절대 피하지 않는 승부사.

그래서 유현은 확신했다.

이광훈이 자신에게 초구로 몸 쪽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고 말이다.

딱!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예상한 코스로 예상한 공이 들어온 덕분에 유현이 뜬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다만 구위에서 밀리며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나 큼지막한 홈런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구위에서 밀린 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좌익수 정면으로 날아갔어야 할 타구가 애매한 위치에 뚝 떨어졌고, 3루수와 유격수와 좌익수 중 그 누구도 타구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사이 유현이 가볍게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유현 선수가 이광훈 선수를 상대로 초구를 공략해 행운의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작정하고 노리고 있었던 것 같죠?

-네, 맞습니다. 이광훈 선수가 초구에 몸 쪽 승부를 즐긴다는 걸 알고 과감하게 풀스윙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네요.

-유현 선수는 타격에도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고등학교 이후 타격 훈련을 한 적 없는 타자가, 이광훈 선수의 타구에 타이밍을 맞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그걸 해냈습니다. 여환진 선수도 고등학교 이후 타격을 해본 적 없었는데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타석에서도 좋은 모습을 종종 보여 주는 걸 보면, 결국 야구는 잘하는 선수가 잘하는 것 같습니다.

1루 베이스를 밟은 유현이 리드 폭을 넓게 잡았다. 형식적인 견제가 한 번 들어왔지만, 이광훈과 포수 양학진은 유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게 당연했다.

행운의 안타로 출루를 하긴 했지만, 투수가 도루를 할 거라고 그 누가 예상하겠는가.

물론 유현과 땅의 정령의 생각은 달랐다.

‘장타를 못 만든 이상, 발로 만회한다.’

-타이밍 알지?

‘슬라이더를 던질 때 뛰어야지.’

-정답.

장타를 못 쳤으니 발로 만회한다.

이광훈이 2구로 슬라이더를 선택한 그 순간.

-지금!

땅의 정령의 외침과 동시에 유현이 2루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포수 양학진이 2루를 향해 공을 던지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이미 유현이 1루 베이스와 2루 베이스 사이를 3분의 2 이상 내달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유현은 여유롭게 2루 베이스를 훔쳤다

그 모습을 보며 포수 양학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허. 뭐 저렇게 빨라?”

투수니까 당연히 도루를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자체는 틀린 게 아니었다.

문제는 유현이 평범한 투수가 아니라는 거였다.

스프링캠프 전 체력 테스트에서 타자들을 모두 제치고 100m 달리기 1위를 기록했고, 고등학교 때도 타격은 시원치 않았지만 도루로 제법 이름을 날렸을 정도로 발이 빨랐다.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메이저리그가 아닌 KBO리그에서, 투수가 타석에 설 일이 거의 없는데 어떤 전력분석원이 투수의 발이 빠른 걸 이야기하고 있겠는가.

내친 김에 유현은 3루까지 훔쳤다.

유현의 빠른 발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도루를 막지 못했을 만큼 유현의 발이 빨랐고, 정확한 도루 타이밍을 재는 판단력이 돋보였다.

선두타자로 나온 투수가 연속 도루로 3루까지 들어가며 무사 3루 찬스를 만들어 버렸다.

양학진은 기가 찼다.

투수로서 유현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온몸의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인데, 타석에서 안타를 치는 걸로도 모자라 연속 도루까지 해내 버렸다.

펠컨스타디움이 떠내려가라 들리는 환호성에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팬서비스로는 충분하겠지?’

-충분한 게 아니라 최고지. 투수가 연속 도루를 성공시키는 걸 어디서 또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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