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팬 퍼스트 (1)
어떻게 하면 유현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유현으로부터 득점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할까?
유현이 연속 경기 완봉승 기록을 늘려 갈수록, 각 팀의 전력분석원들은 어떻게 해야 유현을 공략할 수 있을지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풀스윙을 해서 얻어 걸린 홈런이 나오기를 바라거나, 상대의 실책성 플레이를 통해 득점을 쥐어짜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만이 반복됐다.
문제는 유현이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앞둘 때까지 허용한 장타라고는, 6월 1일 송명현과 맞대결 할 당시 1회 초에 허용한 2루타 하나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피홈런은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
잘 맞은 타구마저도 구위에서 밀리며 워닝트랙 앞에서 잡히는 통에,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2019시즌에 장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구위에 밀리더라도 힘과 타격 기술을 통해 장타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타자가 KBO리그에 머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야수들의 실책성 플레이를 통한 득점을 기대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지난해 팀 실책이 리그에서 3번째로 적을 만큼 수비력이 탄탄해졌던 대전 펠컨스는, 이번 시즌에는 가장 적은 실책을 기록하며 수비에서마저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용석 감독은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항상 기본을 강조하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지난해에도 타격이 아무리 뛰어난 타자래도 수비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주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지명타자 제도가 타자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현대 야구에서, 수비를 못하는 타자의 활용도는 급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대전 펠컨스에는 타격 실력은 준수하지만 수비에서 약점을 보인 타자들이 여럿 있었고, 주전 타자들의 부상일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 2019시즌 들어 수비에서마저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며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가뜩이나 수비 지표가 좋아진 마당에, 대전 펠컨스 야수들은 유독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호수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에이스를 돕기 위해 집중력을 끌어 올린 것이다.
유현의 압도적인 투구와 야수들의 수비 시너지가 더해지자 엄청난 대기록이 만들어졌다.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앞둔 상황에서, 유현은 2019시즌 163이닝을 투구해 18승 무패 방어율 0 160탈삼진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전반기에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유현은 완봉승을 거뒀다. 한두 경기도 아니고 무려 18경기를 연속으로 완봉승을 기록했다.
야수들의 도움과 리그의 수준을 벗어난 투수인 유현의 합작품이었다.
삼진도 무려 160개를 잡아냈지만, 180개를 기록하며 역대 탈삼진 기록을 싹 다 갈아치울 기세인 김정수에게 밀려 2위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그 외의 지표는 모두 1위였다.
김정수가 14승 3패 방어율 1.35 180탈삼진으로 리그를 초토화시키고 있고, 최수환이 전반기가 끝나가는 시점임에도 무려 35홈런을 기록하며 거포로의 변신에 완전히 성공했음에도 MVP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건 모두 유현 때문이었다.
7월 12일.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앞둔 시점에서 유현은 185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50이닝 연속 무실점일 때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들은 그럴 수도 있다 했고, 100이닝이 됐을 때는 이제 슬슬 기록이 깨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실점 이닝은 점점 늘어나서 185이닝까지 늘어났다.
이쯤 되니 야구 관계자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과연 0의 행진이, 정신 나간 완봉승이 이번 시즌 내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그리고 설사 내일 당장 기록이 깨지더라도, 유현이 세운 185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이 뛰어넘는 투수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한 기자는 유현에게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에 유현은 솔직하게 답했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200이닝을 채우고 싶습니다.”
200이닝 연속 무실점.
어쩌면 KBO리그가 문을 닫을 때까지 절대로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대기록을 세우고 싶었다.
* * *
6월 1일의 맞대결 이후.
송명현은 유현이 등판하는 날마다 꾸준히 코코아톡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 내용은 제각각 달랐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선배님. 오늘 경기 최고였습니다. 커터로 타자들 배트 부러트릴 때마다 짜릿했습니다.]
[선배님. 오늘 최고였습니다. 전 언제쯤 선배님처럼 하이 패스트볼을 잘 던질 수 있을까요.]
[선배님. 전 오늘 1실점 완투승을 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안타를 일곱 개 허용했고 볼넷도 세 개나 내줬습니다. 반면 선배님은 안타 두 개를 내준 게 전부였죠. 항상 존경합니다. 선배님처럼 될 수 있게 오늘도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 저도 오늘 선배님 따라서 완봉했습니다! 삼진도 15개 잡았습니다!]
[선배님.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서도 완봉승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 이제 200이닝 연속 무실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이번 시즌 내내 완봉승을 하며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실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선배님이라면 300이닝 연속 무실점도 가능합니다.]
항상 선배님으로 코코아톡을 시작했고, 대부분 유현의 피칭에 대한 존경심과 부러움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6월 1일의 맞대결 당시.
1회 말부터 과감하게 도발을 하는 걸 보고 뭐 저런 놈이 있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유현의 극성팬이었던 송명현은 부모님과 알리사 메켄과 강태영 다음으로 유현에게 많은 연락을 해댔다.
-야. 이 정도면 사생팬 아니냐.
‘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뭐…… 그래도 나한테 좋은 영향을 받아서 발전하는 걸 보고 있자니까 나쁘지는 않네.’
-이러다 투심 패스트볼 그립도 가르쳐 주겠는데?
‘못 가르쳐 줄 건 없지. 다른 선수들한테도 많이 가르쳐 줬으니까. 아. 물론 한국시리즈 끝나고 가르쳐 줄 거야. 그 자식한테 가르쳐 주면 왠지 시즌 끝나기 전에 습득해서 괴물이 될 거 같거든.’
-확실히 야구 지능이 뛰어나더군. 그 동안 1군에서 보이지 않았던 건 고등학교 때의 혹사로 팔꿈치가 망가져서 첫 시즌에 15경기 등판하고 수술, 그 후에는 재활과 군 복무로 시간을 보내다가 올해가 돼서야 빛을 본 거고.
‘토미존 서저리 후 구속이 오른 케이스이기도 하고. 아무튼, 가르쳐 주더라도 한국시리즈 이후에 가르쳐 줄 거야.’
-가르쳐 주기는 하겠다는 거네.
‘기특하잖아.’
첫 맞대결 당시.
다음 날에 만나 사인을 해 주면서 유현은 송명현에게 하이 패스트볼을 잘 사용하는 팁을 줬다.
그리고 그때부터 송명현은 슬라이더와 포크볼뿐만 아니라 하이 패스트볼을 통한 삼진 또한 자주 잡아내기 시작했다.
아마 투심 패스트볼도 가르쳐 주면 빠르게 습득할 가능성이 높았다. 땅의 정령이 야구 지능이 뛰어나다고 공언한 이상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유현은 이번 시즌 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시즌 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사항이고, 유현이 비정상적으로 엄청난 시즌을 보내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으면 특별 규정을 만들어 강제로 쫓아낼 것만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유현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마운드를 지배하는 투수들이 있기를 바랐다. 좋은 성적을 거둔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를 바랐다.
김정수라는 괴물 신예가 있긴 하지만, 라이벌 한 명 정도는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매번 연락을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기특하기도 했고 말이다.
야구가 되지 않을 때, 조금이라도 잘하기 위해서 선배들에게 묻고 또 물으며 노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송명현에게 시즌이 끝난 뒤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은 유현이,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준비했다.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앞둔 유현의 목표는 단 하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200이닝에 가깝게 늘리는 거였다.
이왕이면 완봉승도 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유현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고의 피칭을 보여줬다.
9이닝 3피안타 1사사구 10탈삼진 무실점.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땅볼 유도를 하는 것 같다가도, 하이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며 경기 내내 타자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다.
유현이 172이닝을 투구해 19승 무패에 170탈삼진을 기록하며 전반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방어율은 여전히 0이었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이 194이닝까지 늘어났다. 이제 단 6이닝만 더 늘리면 200이닝 무실점이 가능한 상황이 됐다.
“후반기 첫 등판에서 200이닝 연속 무실점을 달성하고 싶습니다. 기록을 달성한다면 기분이 남다를 거 같습니다. 한 시즌 내내 무실점 피칭을 한 것과 마찬가지인 기록이니까요. 올스타 브레이크는 휴식을 취한다는 기분으로 즐기고, 후반기에도 좋은 피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수훈선수 인터뷰를 끝낸 유현이 더그아웃에서 몇몇 짐을 챙겨 라커룸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홍보팀 직원 한 명이 말을 거는 통에, 가방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말이다.
“유현 선수. 혹시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따로 할 일 있으십니까?”
“고향에 잠깐 내려갔다 오는 거 말고는 집에서 푹 쉬려고 했는데요. 왜요?”
“으음. 혹시 아이들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죠. 아이들한테 사인해 주느라 홈경기 때마다 한참 동안 퇴근을 못 할 정도로요.”
“후우. 다행이군요. 실은 유현 선수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이요?”
“네. 그게…….”
홍보팀 직원은 유현을 찾아온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유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회를 포함해 작은 이벤트를 해달라는 거였는데, 홍보팀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의미가 남다른 행사인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선수가 떠올랐다.
“의미 있는 행사이니까 참여할게요. 아. 그 대신에 판을 좀 더 키워도 될까요?”
“판을요?”
“네. 정수랑 수환이 말고 다른 팀 선수가 참여해도 되는 건가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 하겠지만, 선수 본인이 동의한다면 절차상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한번 연락해 보세요. 전 선수한테 직접 전화해 볼게요.”
유현이 곧장 송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먼저 저한테 전화를 다 해주시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저 지금 선배님 목소리 녹음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모닝콜로 듣겠습니다.]
“미친 놈. 뭐하고 있냐?”
[선배님을 생각하며 오리불백 먹고 있었습니다. 오리불백 먹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오늘 경기도 잘 풀렸고 선배님 전화도 받고, 말 그대로 최고의 하루입니다.]
“맛있게 먹어라. 그나저나 너, 올스타 브레이크 때 따로 일정 잡아 둔 거 있냐?”
[선배님 만나러 대전에 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없다는 거지?”
[네. 없습니다.]
“그럼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선배님. 제가 선배님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수 대 선수로서 존경하는 겁니다. 사심이 없다는 걸 알아주시고, 이래봬도 제가 여자를 엄청 좋아하는데…….]
“미친놈아. 나도 여자 좋아해. 내 애인 금발 미녀니까 개드립 치지 마라. 다른 게 아니라…….”
유현은 홍보팀 직원으로부터 제안 받은 행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참여하는 선수는 총 세 명이었다.
유현, 김정수, 최수환.
거기에 유현은 송명현까지 참여하기를 바랐다.
2019시즌 MVP 후보 네 명이서 참여하는 행사라니,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좋은 행사네요.]
“그치? 나도 듣자마자 그 생각했다.”
[참여하겠습니다. 사비를 털어 선물이라도 좀 준비해야겠네요.]
“안 그래도 홍보팀 직원 통해서 선물로 뭘 사갈지 물어보려고 했다. 다 같이 만나서 선물 사러 가던지.”
[일정 잡고 연락 주십시오.]
“어. 알았다.”
* * *
62승 27패.
대전 펠컨스가 압도적인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2위 울산 알바트로스와도 7경기 차이를 벌렸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그 어떤 팀을 만나도 스윕을 당하지 않았고, 루징 시리즈를 당하면 다음 맞대결에서 반드시 되갚아줬다. 모든 팀을 상대로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가져며 약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팀 평균자책점 1위, 팀 선발승 1위, 팀 퀄리티스타트 1위, 블론 세이브 단 1개로 최소 1위, 팀 타율 1위, 팀 타점 1위, 팀 득점 1위, 팀 도루 1위, 팀 득점권 타율 1위.
투타 지표 상당 부분에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대전 펠컨스의 기세는 매서웠다.
유현과 김정수가 전반기에만 각각 19승과 17승을 수확했고, 5월부터 시즌을 시작한 세미 제이슨과 붙박이 선발로 자리 잡은 김용우도 각각 10승씩을 거뒀다.
전반기에만 무려 10승 투수가 네 명이 나왔다.
팀의 62승 중 56승을 선발투수 네 명이 책임졌을 정도로 마운드가 탄탄했다. 일각에서는 대전 펠컨스의 선발진을 ‘판타스틱4’라 부르기도 했다.
올스타 브레이크 첫날.
그 판타스틱4 중 두 명이, 19승과 17승을 합작한 좌완 듀오가 전반기 35홈런을 기록한 거포와 함께 대전의 한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뜻 깊은 이벤트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