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5화 (75/155)

75화 다 보여 준다 (3)

5회 초가 끝났을 때.

투구 수를 확인한 유현이 계산을 했다.

그리고 확신을 가졌다.

투구 수 조절을 잘하면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유현은 선발로 전향한 이후 10회에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굳이 10회에 마운드에 오를 일 자체가 없었다.

유현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의 타선은 항상 승리에 필요한 만큼의 득점 지원을 안겨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원하는 대로 삼진을 잡을 만큼 송명현의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고민 끝에 유현은 결론을 내렸다.

상황에 따라 10회 초에도 등판할 수 있도록 투구 수를 최대한 아끼자고 말이다.

그때부터 의도적으로 땅볼 위주의 피칭을 하면서 최대한 투구 수를 아끼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송명현을 도발하는 척 퍼포먼스를 하면서 상대 투수를 흔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명현은 유현의 도발에 넘어가 어울리지 않는 땅볼 유도 위주의 피칭을 하며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지만, 다시 삼진 위주의 피칭으로 돌아가면서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9회 말까지 125구를 투구한 송명현이 10회 말에 마운드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유현은 95구로 투구 수 관리를 잘한 덕분에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대전 펠컨스 팬들의 엄청난 환호성 속.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울 레오파즈의 클린업 트리오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

‘선발로 10회에 마운드에 오르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

-왜? 타자들이 원망스럽기라도 해? 1점도 못 뽑아 줘서 화나?

‘그럴 리가 있나. 지금껏 해준 게 얼마인데.’

-10회 말에 점수 못 내도 화 안 낼 거야?

‘11회 말이든 12회 말이든 좋으니까 이기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승리투수 못 됐다고 내 가치가 폄하되는 건 아니잖아?’

-크으. 멘탈 좋아진 거 보소. 역시 내가 교육 하나는 제대로 잘 시켰다니까.

‘뭐래. 난 원래 멘탈은 좋았거든? 실력이 없어서 문제였던 거지.’

유현은 2019시즌 들어 지금까지 자신이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됐다. 그리고 그건, 유현이 좋은 투수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자들의 꾸준한 득점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상대 팀의 에이스 투수에게 막혀서 한 경기 득점하지 못했다고 원망할 생각 따윈 없었다.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르기를 자청한 건 승리투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3연전에서 불펜 소모가 심했던 팀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기 위해서, 팀이 조금이라도 승리에 가까워지도록 공헌하기 위해서였다.

승리투수가 되면 좋고, 되지 못하더라도 팀이 연장 승부에서 이길 수 있다면 괜찮았다.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10이닝 동안 완벽한 투구를 보여 준 투수의 가치가 폄하될 일은 없을 테니까.

팡!

“스트라이크!”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가 선택한 초구는 존을 살짝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타자의 방망이가 크게 헛돌았다.

동시에 전광판을 바라본 타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미친. 10회 초에 157km를 던지는 게 사람이야?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고.’

9회 말.

송명현은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148km에 머물렀고, 슬라이더와 포크볼의 무브먼트도 경기 초반에 비해 살짝 무뎌져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보통 투수들은 80구 내외부터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100구부터는 정신력으로 던진다는 말이 나올 만큼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96구째인데 힘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0회 초임에도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여전히 157km가 찍혔고, 붕 떠오르는 궤적에 타자가 움찔할 정도로 수직 무브먼트 또한 좋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낸 뒤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109구를 던져 10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6탈삼진 무실점.

완벽한 투구에 화답하듯, 대전 펠컨스 팬들은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유현을 향해 한참 동안 기립 박수를 쳤다.

-유현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결국 10회 초까지 단 1점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선수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보여 줄 게 있을까 싶었지만, 오늘 경기를 보고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10이닝 무실점 투구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마치 선동열 선수와 최동원 선수의 빅 매치를 보는 것 같은 치열한 투수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유현 선수가 조금 더 빛난 무대였습니다.

-오늘 경기를 통해 유현 선수의 몸값이 더 올랐을 겁니다. 투구 수 관리와 스태미나까지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유현 선수는 메이저리그 진출 전에 자신의 능력의 전부 다 보여 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여 줄 게 더 있다니까 무서운데요?

-유현 선수라면 더 있을 겁니다. 항상 예상 그 이상을 보여 주는 투수니까요.

* * *

완벽했다.

완벽하다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최고의 피칭이었다.

대놓고 삼진을 잡는 피칭을 했음에도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1회와 다를 바 없는 압도적인 구위와 보더라인에 걸치는 완벽한 제구까지, 타자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공을 던졌다.

송명현은 그런 유현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반드시 저런 투수가 되고 말겠어.’

신인왕 수상이 유력한 슈퍼 루키, 서울 레오파즈 마운드의 구원자, 비운의 3인자.

송명현은 1군 데뷔 이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면이 없잖아 존재했지만, 유현을 상대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현과 같은 투수가 되고 싶었다.

구위와 제구, 타자들의 심리를 꿰뚫는 야구 지능, 거기에 빈틈없는 수비 실력까지.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투수가 되기 위해서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오늘 사인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내일 훈련하면서 따로 말씀드려야겠다.’

지난 시즌.

데뷔 시즌 이후 부상과 방출을 반복하던 유현이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맹활약을 하자 팬을 자청하는 선수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나 유현은 2군 선수들의 희망이었다.

나도 열심히 하면 유현처럼 될 수 있다, 1군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2군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송명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유현에게 사인을 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 송명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 *

10회 말.

서울 레오파즈는 125구를 투구한 송명현을 대신해 마무리투수 한대주를 올렸다.

4월 달에는 블론 세이브 세 개를 기록하며 불안함을 노출했던 한대주는, 5월에는 11경기에 등판해 11세이브를 기록하며 지난해 34세이브를 거뒀던 위용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있었다.

늪 야구의 진수를 보여 줬던 지난해.

대전 펠컨스는 모든 구단의 마무리 투수들에게 블론 세이브를 선물해 줬다.

한대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2018시즌, 한대주가 기록한 세 번의 블론세이브 중 두 번이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허용한 것이었을 정도로 대전 펠컨스에게 애를 먹었다.

반면 대전 펠컨스의 타선은 지난해의 좋은 기억 덕분인지 자신감이 넘쳤다. 한대주를 상대로 득점을 뽑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공격이 시작하기 전.

대전 펠컨스 야수진의 최고참인 1루수 김태성이 타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현이가 10회까지 책임졌어. 근데 우리가 10회 말까지 1점도 못 만들어 내면, 당분간 당당하게 현이 얼굴 볼 수 있겠어?”

“어휴. 양심 찔려서 절대 못 보죠.”

“우리 팀 타율 어제까지 얼마였지?”

“3할 1푼 1리였을 걸요? 리그 1위죠.”

“그치? 거기에 팀 타점과 팀 득점권 타율도 1위잖아. 근데 오늘 1점도 못 만들어 냈단 말이야. 9회까진 송명현에게 막혀서 그랬다고 치자. 10회에 상대할 건 한대주야. 한대주가 송명현보다 무서워?”

“송명현에 비하면 약하죠.”

“좋아. 우리의 목표는 더도 덜도 말고 1점이다. 타석에서 확실하게 노림수 가지고 들어가. 눈 야구에 자신 있는 거 아니면 어설프게 볼 보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스윙하란 말이야.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팀을 위해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우리의 미친 에이스에게 선물을 안겨 주자고.”

6번 타자 하지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제법 벗어나는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오자, 하지석은 스트라이크 존을 좁힌 채 한 가지 구종만을 노렸다.

슬라이더.

지금의 한대주를 있게 해 준 구종.

초구가 한참 빠질 정도라면 제구를 잡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릴 거라고 판단, 이른 카운트에서 승부를 볼 생각을 했다. 한대주가 제구를 잡는 순간 공략이 힘들어질 걸 알고 있었다.

많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큰 거 한 방.

한 방이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에서, 2구째에 기다리고 있던 슬라이더가 들어오자 하지성이 거침없이 스윙을 했다.

딱!

제구가 되지 않아 살짝 몰린 슬라이더를 하지성은 놓치지 않고 제대로 받아쳤다.

동시에 한대주는 고개를 숙였다.

투구하는 순간 느꼈다.

바깥쪽으로 빼려다가 가운데로 몰린 저 슬라이더를, 하지성이 놓칠 리가 없다고 말이다.

-타구가 쭉쭉 뻗어 갑니다. 쭉쭉, 쭉쭉 넘어갑니다! 호오오오런! 끝내기 홈런! 하지성 선수가 대전 펠컨스에게, 그리고 유현 선수에게 승리를 안겨 줍니다!

-한대주 선수가 5월 이후 페이스가 좋았는데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이렇게 무너집니다. 마무리 투수들은 대전 펠컨스를 상대하는 게 곤욕일 것 같습니다. 만날 때마다 무너트리니까요.

-올해는 그나마 초반부터 대량 득점이 많이 나와 마무리 투수가 등판할 일이 없다는 걸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요?

-하하하. 마무리 투수들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경기 후반에 유독 집중력이 상승하는 대전 펠컨스 타자들을 상대하는 건 끔찍하거든요. 참고로 대전 펠컨스 타선은 이번 시즌 9회에 타율 4할 5푼 5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으로 들으니까 더 끔찍하군요.

하지성의 타구가 넘어가는 그 순간.

무덤덤해 보이던 유현은 어퍼컷 세레모니를 한 뒤, 가장 먼저 유격수 하지성에게로 달려 나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팀의 승리를 축하했다.

땅의 정령은 눈에 띄게 기뻐하는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승리투수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싫다고는 안 했다.’

한국 시리즈를 보는 듯한 팽팽한 투수전의 최종 승자는 대전 펠컨스, 그리고 유현이었다.

* * *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의 관심은 끝내기 홈런을 친 하지성이 아니라,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팽팽한 투수전을 펼친 유현과 송명현에게로 집중됐다.

송명현은 경기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답했다.

“제가 졌고 유현 선수가 이겼습니다. 유현 선수를 보면서 2군에서 꿈을 키웠고, 저도 저렇게 마운드에서 빛이 나는 투수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훈련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건 유현 선수 덕분입니다. 존경합니다, 유현 선수. 하지만 다음에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리고 송명현의 그 말은 유현에게 전해졌다.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는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최고의 투수전을 함께 펼쳤던 투수가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영광입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제가 이길 겁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만나도 제가 이길 겁니다.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만나더라도 제가 이길 겁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더라도 송명현을 상대로 질 생각 따윈 없었다. 송명현보다 0.1이닝이라도 더 던지고, 안타 하나라도 덜 맞아서 팀의 승리를 위해 공헌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선수들 중 가장 일찍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유현이 러닝을 하고 있을 때, 한 선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바로 송명현이었다.

“저 선배님,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인이야 어렵지 않는데…….”

유니폼과 사인펜을 받아든 유현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송명현을 바라보았다.

“야. 근데 왜 네 유니폼에 내 사인을 해 달라고 해? 보통은 내 유니폼을 가져오거나 종이에 해달라고 하지 않냐?”

“전 제 유니폼에 받고 싶어요. 선배와 제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뭐라는 거야.”

“선배님.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더 완벽한 투수로 선배님보다 좋은 투구를 할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 참. 제 슬라이더랑 포크볼 그립 가르쳐 드릴까요? 사인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송명현은 원래부터 유현과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굴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러닝 후 트레이닝 룸에서 웨이트를 할 때도, 샤워 후 식사를 할 때도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유현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한참 동안 송명현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땅의 정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또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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