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4화 (74/155)

74화 다 보여 준다 (2)

유현이 3연속 유격수 앞 땅볼로 5회 초를 삼자범퇴로 틀어막은 그 순간, 송명현의 시선은 유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러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유현의 모습을 말이다.

“저거 도발하는 거 맞죠?”

“그런 거 같은데? 네가 탈삼진으로 도발하니까 땅볼로 도발하나 보다. 굳이 받아줄 필요 없어.”

“으음. 아뇨, 받아 줄래요.”

송명현이 미소를 지었다.

유현은 당당하게 자신의 도발에 응하고 오히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이제는 그가 화답을 할 차례였다.

“땅볼 유도라…… 해보죠, 뭐. 저도 맞춰 잡는 거라면 저도 나름 자신 있어서요.”

송명현이 결심했다.

그 동안 주요 상황에서 가끔씩만 꺼내들며 꽁꽁 숨겨뒀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기로 말이다.

동시에 유현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보며 갈고 닦은 이 구종으로, 당신보다 더 좋은 피칭을 보여 주겠다고.

* * *

6회 말.

송명현이 첫 타자를 상대로 3구째에 패스트볼을 던져 3루수 앞 땅볼로 아웃을 잡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

유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른 선수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유현은 확실하게 알아보았다. 방금 전 송명현이 던진 구종은, 패스트볼이긴 하지만 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고 말이다.

변화가 심하지 않아서 구분하기 힘듦에도 유현은 확신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송명현이 던진 구종은, 지금의 유현을 있게 만들어 준 전매특허 구종이니까.

‘방금 그거…….’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두고 있었을 줄이야.’

유현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기 위해 배트를 집어든 최수환에게로 다가갔다.

“수환아. 저 자식 투심 패스트볼 던진다.”

“투심 패스트볼이요?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투심 패스트볼에 대한 이야기가 없던데요.”

“아마 구분이 잘 안 돼서 그럴 거야.”

“구분이 잘 안 된다고요?”

“어. 내가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2~3km 정도 나면서 볼 끝의 변화가 심하잖아? 근데 송명현이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구속 차이가 없이 아주 살짝 변화하는 것 같아.”

“히팅 포인트를 살짝 빗겨나갈 정도로만요?”

“응. 미묘한 변화지만 그 변화 덕분에 정타를 허용할 확률이 낮아지는 거야. 나중에 쿠세가 발견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구분이 힘들 것 같아. 그래도 일단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야.”

“으음. 네. 제가 한 번 직접 상대해 본 다음에 다 함께 이야기해 볼게요.”

유현의 지적은 정확했다.

송명현이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전혀 없는 대신,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면서 아주 살짝 변화하며 히팅 포인트를 살짝 비껴 나갔다.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타자들이 육안으로 분간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송명현의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 또한 타자들이 분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훗날 약점이 발견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투구 자세만으로는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구분하는 건 야구의 신이 오더라도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불가능해 보였지만…….

-저거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투구 폼의 차이가 없는데 구분을 할 수 있다고? 진짜?’

-어. 가능해. 궁금하면 가르쳐 줄까?

‘응. 말해 줘.’

-방법은 간단해. 일단…….

먹성 좋은 햄스터는 가능했다.

땅의 정령은 유현에게 송명현의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구분할 방법을 가르쳐 줬다.

유현이 유심히 송명현의 투구를 지켜보았다.

땅의 정령이 가르쳐준 대로 하니까 보였다. 투구를 하기 전에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구분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의 구분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건 비밀로 하는 게 좋겠지?’

-당연하지. 한 경기 이기자고 이 좋은 정보를 지금 풀면 지능을 의심해 봐야지. 혹시나 한국 시리즈에서 레오파즈를 만나게 되면 그때 써먹으면 되고, 안 만나면 메이저리그 가기 전에 살짝 알려주고 가면 되지.

‘맞는 말이야. 어차피 올해 안에 전력분석원들이 이걸 찾아낼 가능성도 낮아 보이고.’

-절대 못 찾지. 저 습관은 고귀한 존재인 이 몸이라서 볼 수 있었던 거다. 메이저리그라면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지.

송명현의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구분할 수 있는 건 엄청난 정보다.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있기에 그것만으로 완벽한 공략을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허를 찌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6월이라는 것이다.

한국 시리즈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팀의 에이스의 상대법을 벌써부터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이왕이면 최대한 늦게, 중요한 상황에서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이면에는 자신감이 존재했다.

타자들에게 송명현의 약점 따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가 더 잘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게다가…….

‘투심 패스트볼이 완벽해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유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송명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아직 미완성으로 보였다.

* * *

두 미친 투수의 싸움에 양 팀의 타자들은 무기력함을 느꼈다. 한 명은 구위로 찍어 누르고 다른 한 명은 안정적인 제구로 보더라인을 집요하게 공략하니 타자들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좋은 피칭을 했냐고 물어보면, 9회 초까지는 유현이었다.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3탈삼진 무실점.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줬다.

8회까지 5피안타를 허용하며 14개의 탈삼진을 잡은 송명현은, 9회 말 마운드에 오르며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무조건 세 타자 모두 삼진으로 잡는다.’

땅볼 대전은 유현의 승리였다.

유현은 6회부터 9회까지 1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허를 찌르는 루킹 삼진을 제외하면 모두 땅볼 유도를 통해 아웃을 만들어냈다.

반면 송명현은 땅볼 유도를 하다가 주자를 출루시키면 탈삼진을 잡아내며 위기를 벗어났다.

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지만 변화가 크지 않다 보니 원하는 대로 땅볼 유도를 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고, 제구 또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결국 땅볼 유도를 포기했다.

애초에 송명현은 타자의 허를 찌르는 용도로 투심 패스트볼을 사용해 왔다.

투심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꺼내든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고, 자신이 너무 오만했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투심 패스트볼은 주 무기로 사용할 정도로 완벽한 무기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포심 패스트볼과의 구속 차이는 없지만 변화가 없다 보니 주 무기로 사용할 정도가 못 됐다.

동시에 솔직하게 인정했다.

유현이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라고 말이다.

‘포심 완벽해, 땅볼 유도를 위한 투심과 커터도 완벽해, 헛스윙 유도용 스플리터도 완벽해. 진짜 부럽다. 나도 저렇게 던지고 싶다.’

어째서 많은 투수들이 유현만 만나면 족족 무너지는지, 유현을 상대하면서 기가 질린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유현의 피칭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자신이 던질 줄 아는 모든 구종을 완벽하게 구사했고, 타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완벽한 볼 배합까지 선보였다.

자신도 저렇게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완벽한 투수가 될 수 있다면 마운드 위에서 얼마나 짜릿할까?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승부욕 또한 생겼다.

‘땅볼 유도에서는 졌지만 삼진 잡는 것만큼은 자신 있단 말씀.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확실하게 집중하겠어. 투심은 아직 선배님처럼 던지지 못하지만, 탈삼진 능력만큼은 선배님보다 제가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드리죠.'

9이닝 17탈삼진.

송명현은 시범경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던 고지에 도전하기 위해 마운드 위에서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모두 포크볼을 이용해 헛스윙 삼진을 유도한 송명현이 유현처럼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면서 짜릿함을 만끽했다.

유현처럼 완벽하진 못했지만 17탈삼진을 잡았고, 실점을 하지 않으며 경기가 연장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등판이었다.

9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음에도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괜찮았다. 세부 내용에 차이는 있어도 어쨌거나 나란히 9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마운드에서 내려가게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했건만…….

[와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펠컨스타디움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런 미친.”

10회 초.

마운드에 오른 대전 펠컨스의 투수를 보며 송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경기가 시작한 이후.

대전 펠컨스의 불펜에서는 단 한 명의 투수도 몸을 풀지 않았다. 10회 초임에도 여전히 한 명의 투수가 홀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죠?

-제대로 보고 계신 게 맞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유현 선수가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9회 초까지 95구를 투구한 상황에서, 팀의 승리를 위해 10회 초에도 마운드를 지킵니다!

-같은 9이닝 무실점이지만 유현 선수는 95구, 송명현 선수는 125구를 던졌습니다.

-아마 6회부터 땅볼 위주의 피칭을 하며 송명현 선수를 도발한 건 의도한 행동일 겁니다. 아니, 아마가 아니라 확실합니다. 유현 선수라면 투구 수 조절을 위해 일부러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을 겁니다.

-아무래도 오늘의 투수전은, 유현 선수의 판정승으로 끝날 것 같아 보입니다. 유현 선수가 10회에 실점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 * *

흔히 야구를 좋아하는 골수팬들은 야구의 꽃이 투수전이라고 말한다. 시원시원한 타격전도 좋지만, 팽팽한 투수전의 묘미 또한 일품이었다.

물론…….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의 부모님 입장에서는 팽팽한 투수전의 묘미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1점.

단 1점도 만들어 주지 못한 채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타자들이 원망스러울 뿐.

9회 말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이 나온 상황에서, 결국 유현의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괜찮아서 완전히 극복했다 생각했던 트라우마가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쓸데없이 팽팽한 투수전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서 경기를 보기 힘들어진 거였지만 말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타자들이 일찌감치 대량 득점을 해준 상황에서 아들이 편하게 투구하는 걸 보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 아니겠는가.

경기 초반에는 그러려니 했다.

6회까지만 하더라도 후반에 집중력이 뛰어나니까 득점을 해줄 거라고 믿었다.

9회 말이 끝났을 때는 욕부터 먼저 나왔다.

상대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그렇지, 1득점 올리지 못하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휴, 진짜. 난 불안해서 못 보겠다. 먼저 호텔 가 있을 테니까 다들 이따가 보자고.”

“아따, 형님 또 그러신다. 아직 경기 안 끝났으니까 차분하게 좀 지켜봐요.”

“차분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타자들 선풍기 돌리는 거 못 봤냐? 투수가 9회까지 2피안타 무실점 호투해 줬으면 1점은 뽑아줘야지.”

“상대 투수가 너무 잘 던져서 그런 거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저거 저놈 125구 던졌으니까 10회에는 못 올라올 거예요.”

“그럼 뭐해. 우리 현이도 못 올라올 건데. 내 살다 살다 우리 아들이 9이닝 무실점을 하고도 승패 없이 물러나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형님.”

“뭐! 나 말리지 마! 이따가 호텔에서 보자고!”

“아뇨. 그게 아니라…… 현이 또 마운드에 오르는데요?”

“……뭐?”

유현의 아버지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었다.

정말로 유현이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다.

“9회까지 95구였지? 투구 수 관리를 워낙 잘 해놔서 10회에도 올라오나 보네.”

“어쩐지 중간부터 삼진을 잡지 않더라니, 투구 수 관리하려고 그랬구나.”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180도 바뀔 수 있는지. 재작년에 방출됐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 형님 엄청 마음고생…… 형님?”

유현이 마운드에 오르는 걸 본 순간, 유현의 아버지 귀에는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유현의 모습만이 보였다.

팀의 승리를 위해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그 모습에, 유현의 아버지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펠컨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환호성에, 아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만원 관중들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 아들 파이팅! 네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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