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3화 (73/155)

73화 다 보여 준다 (1)

유현은 프런트를 통해 사비로 표를 구입해서 6월 1일 경기에 부모님뿐만 아니라 고향 어르신들까지 한꺼번에 초대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대전 펠컨스의 프런트가 많은 편의를 봐줬다.

어르신들이 하룻밤 묵고 가실 호텔 숙소까지 사비로 예약한 뒤, 유현은 프런트 직원에게 안내를 부탁하고서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호텔 예약해 놨으니까 짐 풀고 천천히 오세요. 버스는 편해요?”

-그럼. 우리 아들이 비싼 돈 써서 태워 준 건데 당연히 편하지. 근데 호텔까지 다 예약했으면 너무 돈 많이 쓰는 거 아니야?

“그렇게 돈 많이 안 썼어요. 그 호텔 펠컨스에서 운영하는 거잖아요. 직원 할인가로 적용해 주니까 싸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

“호텔 뷔페 맛있으니까 식사 하시고 천천히 넘어오시면 돼요. 프런트 직원이 안내해 줄 거예요.”

부모님과 통화를 끝마친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땅의 정령이 말을 걸었다.

-너 오늘 500만 원 넘게 쓰지 않았나?

“그것보다 더 썼지. 뭐…… 부모님을 위한 건데 그 정도면 많이 안 쓴 거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군. 그나저나 한 달여 만에 직관을 오는 건데 빅 매치라니, 타이밍 한번 죽이는데?

“모처럼 재밌는 경기가 될 것 같아. 솔직히 이번 시즌에 내가 압박감을 느낄 만한 경기가 딱히 없었잖아. 이번에는 압박감 좀 느끼지 않을까?”

-보통 타자들이 다득점을 해 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반대로 압박감을 느끼기를 원하다니 넌 미친놈이 분명하다.

“응. 나도 알아.”

유현이 탈삼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투수 지표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김정수가 탈삼진 1위에 대부분의 지표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시즌이라면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와 MVP를 동시 석권할 정도로 엄청난 2년 차 시즌을 보내는 중인 김정수이지만, 유현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투수 지표 상당 부분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투수는 누구일까?

바로 서울 레오파즈의 중고 신인인 우완투수 송명현이었다.

5월 마지막 등판까지 9승 2패 방어율 1.55 87탈삼진을 기록한 그는, 투수진의 붕괴로 고생 중인 서울 레오파즈 마운드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매김했다.

5월 중순까지는 유현과 맞대결 할 일이 없었지만, 우천 취소로 한 경기를 쉬는 동안 로테이션이 조정되며 마침내 유현과 맞대결을 하게 됐다.

송명현의 신인왕 수상은 유력하다.

투타 모두에서 잠재력을 드러내는 선수들이 더러 보이긴 했지만, 이미 5월까지 9승을 챙긴 송명현에 비할 만한 선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 레오파즈 팬들은 송명현에게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중고 신인이 에이스로 자리잡아줘서 고마운 한편, 리그를 씹어 먹고 있는 대전 펠컨스의 미친 투수 두 명이 없었다면 MVP를 노려봐도 될 정도로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이번 시즌이 끝났을 때 그가 가져갈 수 있는 타이틀은 신인왕 외엔 없을 확률이 높으니까.

물론 그와 별개로 많은 야구팬들과 기자들은 유현과 송명현이 맞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관심을 드러냈다.

이번 시즌.

유현을 상대한 모든 팀들은 단 1득점도 만들어내지 못하기도 했지만, 투수들이 대전 펠컨스의 막강한 타선을 버티지 못한 채 무너지며 일찌감치 경기를 내주는 일이 잦았다.

점수가 벌어진 상황에서 유현을 상대하는 타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의욕적으로 타석에 임하기보다는 대기록을 내주지 않는 선에서 만족하는 모습까지 더러 나왔다.

송명현이라면 타율 1위, 타점 1위로 맹타를 휘두르는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침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유현을 상대로 팽팽한 투수전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많았다.

그리고 유현 또한 송명현을 신경 썼다.

지난해부터 대전 펠컨스 타선은 유독 유현이 등판할 때면 집중력을 끌어올려 상대 투수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더러 보여 줬다. 각 팀의 에이스들을 상대하면서도 끝끝내 승리에 필요한 득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번 시즌은 에이스고 뭐고 상관없이 대부분의 투수들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송명현을 제외하고 말이다.

5월 중순에 송명현을 한 번 상대했던 대전 펠컨스는 당시 그에게 9이닝 5피안타 1사사구 7탈삼진 1실점 완투승을 허용하며 모처럼 빈타에 허덕였다.

그리고 다시 송명현을 상대하게 된 상황에서, 심지어 유현이 등판하는 경기이니만큼 다득점을 하기 위해 타자들은 일찌감치 펠컨스타디움에 출근해서 타격감을 조율했다.

그렇게 시작된 1회 초.

딱!

2아웃을 잡은 상황에서 유현은 펜스 끝을 통타하는 2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홈런이 됐을지도 모르는 큼지막한 타구였다.

-유현 선수가 2루타를 허용합니다. 그거 아십니까? 방금 전 허용한 2루타가 이번 시즌 유현 선수가 허용한 첫 장타입니다. 참고로 오늘은 유현 선수의 시즌 12번째 등판이고, 앞선 11경기는 모두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제구가 잘 된 투심 패스트볼이었는데 타자가 잘 쳤다고 봐야 합니다. 유현 선수 입장에서는 방금 전 2루타를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하게 투구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 실점을 허용하진 않았다.

다음 타자에게 스플리터를 던져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면서 깔끔하게 위기를 벗어났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땅의 정령에게 물었다.

‘가운데로 몰렸나?’

-아니. 제구는 잘 됐어. 방금 전 2루타는 그냥 타자가 잘 친 거다.

‘흐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맞다. 투구하다 보면 완벽하게 구사된 공이 맞을 때도 있는 법이야. 신경 쓰지 않고 네 투구를 해.

‘당연히 그래야지.’

2루타를 허용했지만 유현과 땅의 정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실투라 아니라 제구가 잘 된 투심 패스트볼을 타자가 잘 받아친 거였고, 다음타석에서 확실하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1회 말.

마운드에 오른 송명현은 연습 투구 후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 투구를 시작했다.

송명현이 구사하는 구종은 크게 세 가지였다.

최고 구속 153km에 다다르는 포심 패스트볼, 최고 구속 145km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포크볼, 최고 구속 143km에 각이 크고 예리한 슬라이더까지.

컨디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탈삼진 능력이 있는 투수였다.

제구보다는 구위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

송명현은 대부분의 구단들이 어째서 강속구 투수들을 선호하는지를 제대로 보여 주는 투수였다. 제구가 조금 부족해도, 압도적인 구위로 찍어 누르니 상대 타자들이 맥을 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가운데로 몰리는 공을 수시로 던지거나 볼과 스트라이크의 구분이 명확할 정도로 제구가 안 좋은 것도 아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어느 정도 로케이션이 가능하다.

애초에 강속구와 제구력을 동시에 지닌 유현과 김정수가 미친 거지, 송명현 정도면 구위에 비해서는 제구가 준수한 편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송명형은 1회 말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마쳤다.

그리고는 대전 펠컨스의 더그아웃을, 더 정확히는 음악을 듣고 있던 유현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 보소?

‘왜? 무슨 일 있어?’

-투수가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잡고서 널 쳐다보며 마운드에서 내려갔어.

‘흐음. 도발하는 건가?’

-저건 누가 봐도 도발이지. 난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잡았는데, 넌 이 정도로 삼진 잘 잡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잖아.

‘재밌네.’

그 순간.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송명현이 자신을 도발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펠컨스타디움으로 오며 예상했던 것처럼 재밌는 경기가 될 것만 같았다.

‘대놓고 도발하는데 받아 줘야지.’

유현은 포스트 시즌이 아니라면 굳이 상대 팀을 도발하거나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데 괜히 도발하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그러다가 괜히 벤치클리어링이라도 일어나서 다치면 자신만 손해 아니겠는가.

하지만.

걸어오는 도발이나 시비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개막전에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에게 계속해서 위협구를 던졌던 것처럼, 유현은 송명현의 도발에 투구 패턴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 * *

2회 초.

마운드에 오르기 전 유현은 포수 지석한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석한아. 탈삼진으로 가자.”

“도발에 응해 주려고요?”

“싸우자고 하는데 받아 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철저하게 탈삼진 위주로 사인 낼게요.”

“응. 부탁한다.”

압도적인 1위이고 별 문제가 없다면 결국 페넌트레이스 1위로 한국시리즈 직행을 할 가능성이 높은 대전 펠컨스이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팀을 상대로 4승을 거둬야만 한다.

그리고 지난 4년 내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서울 레오파즈는 유력한 파트너 중 하나다.

유현은 하위권 팀을 상대할 땐 확실한 피칭 스타일을 가져가는 반면, 상위권 팀을 상대할 때는 타자의 성향과 상황에 따른 투구 패턴의 변화를 주는 걸 선호한다.

1회 초가 딱 그랬었다.

앞선 두 타자를 땅볼과 포수 팝 플라이로 처리하고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2루타를 허용한 뒤, 득점을 위해 공격적으로 스윙하는 4번 타자에게는 스플리터를 이용해서 헛스윙을 유도했다.

하지만 2회 초에는 달랐다.

유현과 지석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삼진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다른 경우의 수를 배제한 채 오로지 삼진만을 생각한 피칭을 했다.

그 결과.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 두 개와 루킹 삼진 하나로 네 타자 연속 탈삼진을 만들어 낸 유현이 이닝을 깔끔하게 끝마쳤다.

2회 말에 마운드에 올라온 송명현은 4번 타자 제라드 캠프를 상대로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이후 세 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으며 2회까지 도합 6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송명현 선수, 오늘 컨디션이 확실히 좋아 보입니다. 포크볼이 뚝 떨어지고 슬라이더가 예리합니다. 이런 날의 송명현 선수는 유독 삼진을 많이 잡는 편이거든요?

-맞습니다. 중요한 건 유현 선수 또한 2회 초에는 삼진을 잡기 위해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다는 겁니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위주의 볼 배합을 가져단다는 건, 삼진을 잡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보여 준 거라 보면 됩니다.

-송명현 선수가 1회 말 3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은 뒤 대전 펠컨스 더그아웃을 바라보았던 게 유현 선수를 자극한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1회 초와 2회 초의 피칭 스타일이 다르다는 건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5회까지.

두 투수는 각각 11개와 1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타자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건 유현이 송명현보다 삼진을 하나 더 잡았다는 거였다.

한 투수는 5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1탈삼진 무실점, 다른 투수는 5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10탈삼진 무실점.

비슷한 성적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삼진을 하나 더 잡은 건 유현이었다.

게다가 투구 수에서도 유현이 우위에 있었다.

송명현은 5회까지 74구를 투구한 반면, 유현은 고작 58구를 투구했을 정도로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하며 삼진까지 잡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1회에 두 개 뒤쳐져 있었는데 5회가 끝났을 하나 앞서 있는 거면, 네 판정승이라고 봐야겠지.

‘좋아. 그럼 이제 반대로 내 쪽에서 도발을 해볼까? 탈삼진 능력은 검증했으니까 다른 능력도 한 번 검증해 보자고.’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주 무기인 놈을 상대로? 가만 보면 너도 참 악랄하다니까.

‘무슨 소리야. 상대가 먼저 도발을 했으니 끝까지 받아 줘야 할 거 아냐.’

-그렇긴 하지. 확실하게 짓밟아 줘라.

‘밟히지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이어진 6회 초.

유현은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다.

방금 전까지는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을 기세더니, 6회 초에는 세 타자 모두에게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현이 서울 레오파즈의 더그아웃을 슬쩍 쳐다본 뒤, 정확히는 송명현을 응시하다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행동과 눈빛으로 물었다.

난 너보다 탈삼진을 하나 더 잡았는데, 넌 나처럼 땅볼 유도 잘 할 수 있어?

도발에는 도발로 응한 유현이었다.

탈삼진 대전 다음은 땅볼 대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