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0화 (70/155)

70화 기록과 기록 사이 (4)

퍼펙트게임이라는 KBO리그 최초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유현의 피칭에 대한 칭찬과 분석 기사를 내놓았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유현의 퍼펙트게임에 주목했다.

이때다 싶었던 메켄 코퍼레이션은 퍼펙트게임을 비롯해 이번 시즌 유현이 5경기 연속 완봉승과 10탈삼진 이상 경기를 펼쳤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몸값 올리기에 나섰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그리고 자기 전에는 항상 알리사 메켄과 통화했다. 몇 분도 좋았고 몇 시간이라도 상관없었다. 알리사 메켄과 통화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팍팍 풀렸기에 통화는 필수였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일찍 야구장으로 향했다. 홈 경기 원정 경기 가리지 않고 항상 비슷한 시간에 출근해서 훈련을 하며 루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는 루틴을 지키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현은 땅의 정령이 가르쳐 준 훈련법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저녁에는 몇몇 선수들과 식사를 하거나, 그게 아니면 집이나 숙소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다. 아무리 경기가 늦게 끝나도 땅의 정령을 위해 반드시 저녁 식사를 챙겨 먹었다.

-넌 금발 여자랑 음담패설 하는 게 인생의 낙이지? 난 먹는 게 인생의 낙이야. 그러니까 불만 가지지 말고 꼬박꼬박 맛있는 걸 사주란 말이야!

‘누가 음담패설을 했어? 내가? 유언비어 유포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아주 영어 마스터하고 나니까 드립이 물이 올랐던데? 그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참았냐.

‘어떻게 참았긴. 알리사랑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니까 참았지.’

-……젠장, 말을 말자.

그리고 땅의 정령과는 늘 그렇듯이 별거 아닌 주제로도 티격태격하며 나름 잘 지냈다.

4월 27일.

유현의 시즌 여섯 번째 등판이 확정됐다.

울산 알바트로스를 상대로 치르는 주말 3연전 두 번째 경기에, 유현은 퍼펙트게임 이후 직관을 하고 싶다고 말하던 부모님을 초대했다.

대전 펠컨스 프런트는 유현의 부모님이 직관을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VIP석 표를 두 장 가져다줬다. 명실상부 리그 최고의 투수가 된 유현을 위한 배려였다.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하기 전.

유현의 부모님이 오피스텔에 들렸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유현보다 더 부모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겼다.

-너희 부모님 너무 좋다. 반찬 너무 맛있어. 식당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예전에 이모랑 잠깐 했다가 그만뒀어.’

-왜 그만둬? 계속했으면 대박 났을 건데?

‘대박이야 났지. 이모는 아직도 식당 하고 있는데 연 매출 10억 넘어. 엄마는 진상 손님들 꼴 보기 싫다고 손 땐 거고, 가끔 이모가 도와달라고 하면 가서 도와주는 정도야.’

-집안이 음식 솜씨가 좋은 거였군. 훌륭해. 다음에 고향 내려가면 이모 식당 가서 밥 먹으면 안 되나?

‘올스타 브레이크 때 잠깐 가던가, 아니면 시즌 끝나고 들리던가 하지.’

-바람직한 생각이다.

유현을 만난 이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삶의 낙이 된 땅의 정령에게 있어, 음식 솜씨가 뛰어난 유현의 어머니는 최고의 손님이었다.

물론 당장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땅의 정령이 음식을 먹는 건 부모님이 돌아간 이후, 혹은 저녁 식사 자리가 될 터였다.

유현은 부모님을 대전의 한 호텔에 데려다드린 뒤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푹 쉬다가 경기가 시작할 무렵 펠컨스타디움으로 올 예정이었다.

유현은 루틴대로 몸을 움직였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땅의 정령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잘 할 수 있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보통 대기록을 세운 다음에는 이상하리만큼 컨디션 난조를 보이거나 경기가 꼬이면서 무너지는 투수들이 많거든. 혹은 방심하거나.

‘내가 그럴 거 같아 보여?’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퍼펙트게임.

KBO리그에서 처음 나온 대단한 기록인 건 맞지만 유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정확히 하루 좋아한 게 다였다.

그 이후로는 퍼펙트게임 달성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평소처럼 루틴을 지키며 다음 등판을 준비해나갔다. 시즌 첫 맞대결을 하게 된 울산 알바트로스의 전력 분석 자료를 수없이 보며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했다.

페넌트레이스는 길다.

이제 겨우 다섯 번 등판한 상황에서, 퍼펙트게임 때문에 일희일비 할 생각 따위 없었다.

무엇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퍼펙트게임보다 더 위대한, 어쩌면 프로야구가 없어질 때까지도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울 생각인데 퍼펙트게임 때문에 흔들리면 쓰나. 그럴 거면 메이저리그 진출을 입에 담지도 않았을 거다.’

-멘탈이 멀쩡한 거 같아 다행이군. 좋아. 모처럼 물어보는 거 같은데, 오늘의 목표는?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 무실점이지.’

* * *

18승 6패로 대전 펠컨스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의외로 2위는 서울 레오파즈가 아니라 울산 알바트로스였다.

울산 알바트로스는 여전히 불펜이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평균 이상의 선발진과 압도적인 화력의 타선을 바탕으로 16승 8패를 기록하는 마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차전에서는 울산 알바트로스가 압도적인 화력으로 5선발 윤기준을 4이닝 11피안타 3피홈런 3사사구 8실점으로 무너트리며 11대 6으로 승리를 거뒀다.

부산 유니콘스와의 주중 3연정을 스윕하며 기세를 끌어 올렸던 대전 펠컨스의 입장에서는, 선발투수가 일찌감치 무너지며 경기를 내준 게 못내 아쉽긴 했다.

사실 안용석 감독은 윤기준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수도 없이 교체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아직 시즌 초반인데 굳이 무리하게 승리를 쥐어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투수들을 최대한 아끼며 깔끔하게 패배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결국 윤기준에 이어 투수 두 명만을 기용한 채로 대전 펠컨스는 1차전을 내줬다.

이어진 2차전.

연패를 하면 안 되는 책임감을 안은 채로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대기록 후의 후유증?

유현에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1회 초부터 강속구를 던지며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했다.

최고 구속은 157km가 나왔고,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구위와 제구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커터를 거의 던지지 않았다.

2회 초 6번 타자를 상대로 하나 던지긴 했지만 가운데로 살짝 몰리는 실투가 나왔고, 결과적으로 땅볼이 되긴 했지만 이후로는 커터를 배제한 채 볼 배합을 가져갔다.

그리고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은 유현이 커터를 안 던지는 걸 확실하게 눈치 챘다.

“저 자식, 오늘은 커터를 안 던지는데?”

“아까 하나 던졌어. 던졌는데 가운데로 몰리니까 그 뒤로는 안 던지더라고.”

“흐음. 오늘은 커터가 안 좋다 이건가?”

“그럼 뭐해. 커터 없어도 미친놈인데.”

“하긴…….”

“그래도 구종 하나 제외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커터가 안 좋아도 유현은 유현이었다.

4회까지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은 채 5탈삼진을 곁들이며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더 큰 문제는…….

커터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던지지 않았다는 거다.

5회 초.

2회 초에 이어 다시 한 번 박명우를 선두타자로 상대하게 된 상황에서 유현이 이 날 경기에서 두 번째로 커터를 꺼내들었다.

딱!

“허…….”

몸쪽으로 들어오는 커터를 제대로 노려 친 박명우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커터가 안 좋기는 개뿔. 저게 안 좋은 거면 다른 투수들 전부 다 은퇴해야 돼.’

제대로 쳤지만 힘에서 밀렸다.

천하의 박명우가, 다섯 시즌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거포가 힘에서 밀리며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강속구에 약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타이밍을 빠르게 가져가면서 어느 정도 만회했다. 심지어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았다.

그런데도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박명우는 확신했다.

포심 패스트볼도 좋고 투심 패스트볼도 좋고 커브도 좋지만, 오늘 유현에게 있어 가장 좋은 공은 바로 커터라는 걸 말이다.

안 좋아서 안 던진 게 아니었다.

경기 중반부터 투구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 일부러 던지지 않고 있었던 거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투수 출신 해설위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유현 선수는 정말 똑똑한 거 같습니다. 커터가 좋은데도 일부러 숨기다가, 5회부터 커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습니다. 저러면 커터를 배제하고 있던 타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유현 선수가 결국 5회에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마운드를 넘겼습니다. 벌써 19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 도대체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겁니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떨어지거나, 실투를 던져주기를 바라거나,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서 실책성 내야 안타가 나오기를 바라야 합니다. 아니, 한 부분만 정정하겠습니다. 지금 컨디션이라면 실투가 들어와도 못 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오늘 유현 선수의 공은 타자들이 정타를 타이밍을 잘 맞춰도 힘에서 밀리며 범타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힘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박명우 선수마저도 밀렸으니 말 다했죠.

-유현 선수는 그냥 수준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벌써부터 내년에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됩니다.

7회 초 2아웃 상황.

해설위원이 말한 대로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안타가 나오며 유현의 퍼펙트 행진은 20과 3분의2이닝에서 멈췄다.

물론 유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을 때도 딱 하루 좋아하고 말았던 유현이다. 비공식 기록에 연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정작 유현이 신경 쓰고 있는 기록은 안타를 허용했음에도 계속 이어져 나갔다.

9회 초 1아웃 상황에서도 내야 안타를 하나 허용하긴 했지만, 이후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6-4-3 병살타를 유도하며 유현이 경기를 끝냈다.

92구를 투구해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0탈삼진 무실점.

여섯 경기 연속 완봉승, 여섯 경기 연속 10탈삼진 이상, 여섯 경기 연속 2피안타 이하.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워 나가고 있었지만 유현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기록이 있었다.

2019시즌 한정으로 54이닝 연속 무실점, 2018시즌을 포함했을 때는 76이닝 연속 무실점.

그랬다.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유현은 몇 이닝 연속으로 무실점 피칭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향해 되물으며 도전하는 중이었다.

이미 지난해에 자신이 갱신한 신기록은 다시 갱신하고도 한참 이닝을 추가한 상황.

그럼에도 유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경기 후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아나운서는 연속 경기 완봉승과 탈삼진 페이스에 주목했지만, 유현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몇 경기 연속으로 완봉승을 할지, 탈삼진을 몇 개나 더 추가할지는 관심 없습니다.”

“의외네요. 선수에게 완봉승과 탈삼진 페이스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나요?”

“네. 상징적인 의미가 있긴 하지만 전 그보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전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은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현 선수는 현재 76이닝 연속 무실점 피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얼마나 더 늘려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경기에서 선두타자에게 초구 홈런을 허용할 수도 있고, 다시 한 번 퍼펙트게임을 기록할 수도 있는 게 야구니까요. 그래도 이왕 목표를 잡아 본다면…….”

“잡아 본다면?”

“100이닝을 넘기고 싶습니다. 최대한 길게 기록을 연장해서, 그 어떤 선수도 넘보지 못할 기록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 또한 있습니다.”

유현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난 해에는 인터뷰 때에 비교적 겸손한 발언을 많이 했지만 이번 해에는 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모두 다 하는 모습을 보였다.

팬들은 그런 유현에게 열광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실력으로 확실하게 입증을 해버리니 인기를 얻는 게 당연했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 갱신.

유현의 확고한 목표를 들은 타 구단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백날 전력 분석을 해도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해 공략이 안 되는 투수가 대놓고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노린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몇몇 구단들은 진심으로 빌고 있었다.

유현이 자신들을 상대로 등판해야 하는 날, 비가 왕창 쏟아져서 우천 취소가 되라고 말이다.

나중에 다시 상대할지언정, 지금 당장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공략법을 내걸기에는 유현의 컨디션과 페이스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유현이 다음 등판에서 만나게 될 팀은…….

이번 시즌 유현에게 무려 두 번의 대기록을 헌납한, 4월 28일을 기준으로 10승 16패를 기록하며 9위에 머물고 있는 서울 나인테일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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