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기록과 기록 사이 (3)
유현은 자신이 강심장이라고 자부했다.
땅의 정령을 만나기 전에도 주요 승부처에서 긴장으로 인해 제 공을 던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공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오랜 시간 부진을 겪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웃카운트가 두 개 남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대기록을 앞두고 긴장해서?
아니었다.
유현의 심장이 요동친 건 기뻐서였다.
노히트노런, 연속 이닝 무실점, 9이닝 최다 탈삼진 등, 지난해부터 다양한 기록을 세우며 KBO리그를 초토화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달성하지 못한, 그리고 어쩌면 선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기록이 존재한다.
수많은 사이영 상 수상자들도 은퇴할 때까지 달성하지 못하기도 하는 기록, 27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는 게 아니라면 투수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는 기록.
퍼펙트게임.
KBO리그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웃카운트는 고작 두 개 남았다.
그 사실이 유현을 기쁘게 만들었다.
최초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현의 심장이 기쁨의 요동을 치고 있었다.
‘실수하지 않는다.’
유현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마운드에 설 때마다 땅의 정령이 늘 하는 말이다. 머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약점을 생각하고 수싸움을 그려 나가되, 절대 흥분하지 않고 계획대로 투구하라고 조언했다.
유현은 이성적으로 투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웃카운트 두 개를 가장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연속 삼진이지만, 마지막 아웃카운트 두 개는 삼진을 잡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야수들을 믿었다.
9회 말 1아웃까지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는 동안, 극한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도움을 준 야수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도움을 주리라고 확신했다.
가끔 그런 투수들이 있다.
수비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공이 좋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삼진을 잡기 위해 피칭을 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투수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야구가 투수놀음이라고는 하지만, 투수는 결국 야수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27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잡을 수 없는 존재다.
수비가 불안하더라도 결국에는 야수들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다면 좋은 투구를 보일 수 없다.
팡!
“스트라이크!”
유현은 초구로 스플리터를 선택했다.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모두 노리고 있던 타자가 헛스윙을 한 덕분에 손쉽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한 수 있었다.
2구는 타자의 몸 쪽으로 기가 막히게 파고드는 커터를 던졌다.
빠각.
이번에는 타자가 타이밍을 맞췄다. 살짝 늦긴 했어도 배트에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배트 안쪽에 맞았다는 것.
그리고 오늘 유현의 구위가 너무 좋아서 배트가 부러지며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힘없이 굴러간 타구가 3루수 방향으로 향했다.
타자가 전력 질주를 했다.
공을 잡은 최수환이 반쯤 넘어지면서 1루를 향해 송구했다.
-아웃! 타자주자의 발보다 최수환 선수의 송구가 빨랐습니다. 어려운 타구를 매끄럽게 수비해 줬습니다!
-수비 좋아요, 정말 좋아요. 유현 선수 같은 그라운드 볼러에게는 내야 수비가 중요하거든요. 암흑기의 대전 펠컨스와 비교했을 때 지난 시즌부터의 대전 펠컨스가 달라진 게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수비가 안정되니 투수들이 마음 편하게 투구하고, 결과적으로 여러 투수들의 포텐셜이 폭발하며 마운드가 안정화됐거든요.
-요즘 대전 펠컨스의 야수들은 잊을 만한면 기가 막힌 호수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게 다 기본기가 탄탄해서 가능한 겁니다. 호수비는 결국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비를 해야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유현이 머리 위로 팔을 들어 올려 박수를 쳤다. 최수환을 양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까지 하며 기가 막힌 수비를 칭찬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지석한이 초구부터 공격적인 사인을 냈다.
고개를 끄덕인 유현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서 투구를 했다.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향했다.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다.
한가운데로 몰릴 것 같던 공은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더니 바깥쪽으로 살짝 떨어지며 휘어졌다.
투심 패스트볼.
자신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줬던 최고의 결정구를 던져 땅볼 유도를 할 생각이었다.
딱!
타자가 투심 패스트볼을 건드렸다.
배트 끝에 걸렸고 구위에 밀리면서 정타가 되지 못했다. 타구는 유격수 하지성이 있는 방향으로 느릿느릿하게 굴러갔다.
유현이 등판할 때마다 가장 많이 몸을 움직이는 야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전 펠컨스 팬들은 주전 유격수인 하지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유현이 유도하는 땅볼의 반 이상을 유격수 하지성이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처리하지 못한 타구도 더러 있었고, 가끔은 실책이 나오기도 했지만 유격수 하지성의 수비는 리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리고 오늘.
KBO리그 최초의 대기록을 앞두고 최고의 집중력을 끌어 올린 유격수 하지성은, 느린 땅볼을 보자마자 앞으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가볍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타구였지만, 갑자기 불규칙 바운드가 튀면서 공이 하지성의 머리 위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하지성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응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틀고 넘어지듯이 점프를 하면서 타구를 잡아낸 것이다.
그 상태에서 지체없이 2루수 장영학에게 공을 넘겼고, 장영학이 1루수 김태성에게 송구했다.
“아웃!”
불규칙 바운드가 튀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격수 하지성의 수비에는 문제가 없었다. 타이밍이 살짝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려운 타구를 잘 잡아내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만들었으니까.
-게임 셋! 경기가 끝납니다! 세상에……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꿈이 아닙니다. 시청자 여러분. 드디어 KBO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이 나왔습니다. 2군이 아니라 1군에서 나온 대기록입니다. 오늘, 잠실 베이스볼 파크에서 유현 선수가 최초의 대기록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 됐습니다!
-최초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는 선수가 있다면 유현 선수일 거라는 말이 많았는데, 결국 유현 선수가 해냈습니다!
-오늘, 프로야구의 주인공은 유현 선수입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간 그 순간.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너 나 할 거 없이 KBO리그 최초의 대기록을 축하해 줬다.
* * *
다섯 경기 연속 완봉승.
다섯 경기 연속 10탈삼진 이상.
다섯 경기 연속 2피안타 이하.
2019시즌 45이닝 연속 무실점, 2018시즌 포함 67이닝 연속 무실점.
스플리터 장착으로 한층 업그레이드가 된 유현은 온갖 기록을 양산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퍼펙트게임은 유현에게 유독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통산 방어율 5점대의 선수가 퍼펙트게임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통산 방어율 2점대에 사이영 상을 네 번 수상한 한 선수는 퍼펙트게임은 물론이고 노히트노런과도 인연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운이 따르지 못하면 만들어 낼 수 없는 대기록이다. 야수들의 도움에 행운까지 따라야 만들어지는 기록이다.
그래서 경기가 끝난 후까지도 대기록의 달성으로 인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인터뷰에 시달리고 몇몇 선수들과 저녁을 먹으러 갈 즈음에야 유현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즈음에야 땅의 정령이 다시 유현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경기 내내 안 보이더니 어디에 있었어?”
-감독 머리 위에 있다가 포수 머리 위에 있다가, 유격수 머리 위에도 있었지.
“여러 사람 머리 돌아다니니까 좋던?”
-아니. 역시 네 머리가 제일 푹신하다.
유현의 정수리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으며 땅의 정령이 속삭였다.
-퍼펙트게임 축하한다. 최고의 피칭이었다.
“음. 솔직히 아직도 조금 얼떨떨하긴 해. 사실 9회 말 1아웃이 돼서야 아웃카운트 두 개를 더 잡으면 퍼펙트게임이란 걸 알았거든.”
-피칭에 고도로 집중할 때 경기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네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 그래서 기분이 어때? 좋아?
“당연히 좋지. 아버지한테 부재중 전화가 20통이 넘게 온 거만 봐도 행복해 미치겠다. 아. 말 나온 김에 아버지에게 전화 좀 드려야겠다.”
유현은 부재중 전화를 20통이나 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주를 한 잔 했는지 살짝 혀가 꼬부라진 유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퍼펙트게임을 했다는 걸 동네방네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듯 영상 통화로 동네 주민을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휴대폰을 가로챘다.
[요즘 너 등판할 때마다 마을회관에 모여서 같이 야구 보는데, 너 퍼펙트게임 달성했다고 오늘은 본인이 쏘겠다고 난리다. 네가 이해해라. 아. 좀 조용히 좀 해요! 확 정자에다 묶어두고 집에 들어갈까 보다.]
“하하하. 정정하시니까 좋네요.”
[정정하기는. 병원에서 술 좀 그만 먹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 저러다 어디 한 군데 심하게 아파봐야 정신 차리지. 정신없을 텐데 지금 전화해도 괜찮아?]
“네. 선수들이랑 저녁 식사하려고 이동 중이었어요. 운전 중이라 휴대폰을 못 쳐다봐서 그렇지 통화는 지장 없어요.”
[그래. 조만간 반찬 만들어서 올라갈게. 사랑한다, 우리 아들. 오늘 정말 멋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유현은 부모님과의 짧은 통화를 끝마쳤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내내 유현은 땅의 정령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땅의 정령은 유현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딱!
식당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차에서 내리려던 유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기며 땅의 정령을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내놔.”
-뭘 내놓으라는 말이냐.
“보상 내놓으라고.”
-너무 좋아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건가? 최근에 보상을 지급할 일이 없었을 텐데?
“기억 안 나?”
-난 최근에 보상 지급한다고 한 적 없다니까 그러네.
“최근이 아니라 작년이지?”
-작년? 작년이라고? 아…….
“이제 생각났나 봐?”
-젠장. 기억났다.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지난 해.
땅의 정령은 유현이 전반기에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면 외국어 1개를 마스터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현은 전반기에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지 못했다.
문제는 해당 미션에 허점이 있다는 거였다.
전반기라고 말하긴 했지만 어느 시즌인지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프링캠프 당시 지나가는 듯한 말로 해당 미션에 대해 언급했던 유현이,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자 잊지 않고서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꺼냈다.
보상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보상 내놔. 알리사랑 영어로 밤새 통화할 거니까 영어 마스터 시켜 줘. 롸잇 나우.”
-……앞으로는 미션을 주더라도 계약서 쓰듯이 구체적으로 세부 조항을 명시할 것이다.
“알았으니까 얼른 영어 마스터 시켜 줘.”
-일단 밥부터 먹자. 밥 먹고 나면 알아서 마스터가 되어 있을 거다.
“오케이. 보상 잘 받을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킨다. 아아. 이젠 망할 커플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염장을 지르겠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날 새벽.
유현은 완벽한 영어 구사로 알리사 메켄을 놀라게 만들고서 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가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퍼펙트게임과 영어 마스터.
최고의 하루를 보낸 유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