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기록과 기록 사이 (2)
삼진을 피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미칠 듯한 선구안을 통해 볼넷을 만드는 것?
나쁜 방법은 아니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아무리 선구안이 뛰어난 타자라도 보더라인에 완벽하게 걸치는 공까지 분간할 수는 없다. 때문에 선구안 좋은 타자들이 볼을 고르다가 루킹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나온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공략해서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안타일지 범타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삼진을 당하지 않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을 때, 파울이 아닌 타구를 만들어 내는 순간 아웃 여부와 상관없이 삼진은 당하지 않게 되는 거니까.
문제는 이 방법이, 스트라이크를 당하지 않는 방법임과 동시에 스트라이크를 당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기습 번트를 통한 내야 안타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타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윙을 해야 하다.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을 모두 쳐낸다고는 하지만 확률이 100퍼센트는 아니고, 브레이킹 볼에 속을 확률 또한 존재하기에 완벽한 대처 방법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모두 쳐낸다는 생각으로 타격했다.
어차피 방법이 없었다.
공격적인 투구를 선호하는 유현을 상대로 공을 지켜보는 건 무의미한 행위였다. 지켜보다가 루킹 삼진을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지난해에는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모두 쳐내는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유현에게 대량 득점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어떻게든지 안타를 뽑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지난해와 달리 올해의 유현에게는 스플리터가 존재한다는 거였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모두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이었고, 카운트가 몰리면 하이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로 헛스윙을 유도했다. 타자가 어쩌다 한 번 스윙을 참는 것 같으면, 지난해부터 쭉 그랬던 것처럼 귀신같이 한가운데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적극적인 스윙을 통해 타선의 물꼬를 트려던 서울 나인테일즈의 계획은 실패했다.
4회 말 첫 타자가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나며 연속 타자 탈삼진 타이기록을 내주는 건 막아냈지만, 8회까지 유현에게 단 하나의 안타도 만들어 내지 못하며 계속해서 끌려 다녔다.
8이닝 0피안타 무사사구 14탈삼진 무실점.
압도적인 피칭을 한 유현은, 9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했다.
8회까지 투구 수는 85개였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하이 패스트볼의 구속이 156km였을 정도로 여전히 힘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8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KBO리그 최초의 대기록에 아웃카운트 단 세 개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어떤 감독이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컨디션 죽이는데?
어느새 유현의 머리 위에서 안용석 감독의 머리 위로 갈아탄 땅의 정령이 유현의 피칭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구위, 제구, 수싸움. 모두 흠잡을 데가 없어.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건 뭐건 통할 리가 없지. 애초에 수준 자체가 다른데.
좌투수를 상대로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통하는 건, 우타자가 해당 투수의 공을 쳐낼 수 있을 때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나마 만들어지는 타구가 포수 팝플라이 아니면 내야 땅볼인 상황이다.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꺼내든 의미가 퇴색되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서울 나인테일즈가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땅의 정령은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봤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삼진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개막 이후 서울 나인테일즈 좌타자들의 타격 지표가 멘도사 라인에서 놀고 있었으니까.
-흐음. 녀석이 이번 시즌에 양학을 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양학을 하는 걸로 끝나면 한 시즌 더 뛰는 의미가 없잖아.
땅의 정령은 어떻게 하면 유현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매일같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대전 일대의 땅을 관리하는 그에게 대전 펠컨스의 야구를 보는 건 일종의 유흥거리였고, 지난해부터는 유현이라는 피지컬 좋지만 야구 지능이 조금 떨어지고 자신의 장단점조차 모르는 투수를 가르치는 데에 맛이 들렸다.
뭐, 요즘 하는 걸 보면 야구 지능이 떨어진다는 말도 무색하지만 말이다.
-누가 가르쳤는데 잘해야지. 아웃카운트 세 개 남았다.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불화산 족발 먹으러 가자.
* * *
2018시즌에 타율 8위를 기록했던 대전 펠컨스의 타선은, 2019시즌에는 타율 1위, 홈런 1위, 타점 1위를 기록하며 펄펄 날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타격 폼 변경과 벌크업을 통해 장타자 변신을 노리고 있는 최수환과, KBO리그에 적응을 끝마친 펠릭스 곤잘레스가 존재했다.
시즌 초이기는 하지만 최수환이 강태영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완해 주고, 5번을 맡은 펠릭스 곤잘레스는 빗맞아도 홈런이 나올 정도로 괴력을 뽐냈으며, 두 선수 사이에는 지난해 30-30을 기록한 제라드 캠프가 있다.
현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의 클린업 트리어는 리그 최고의 클린업 트리오라고 봐도 무방했다.
각각 출루율 4할 2푼 5리와 4할 8리를 기록 중인 정장혁과 장영학 테이블 세터가 밥상을 차려줬을 때, 대전 펠컨스의 클린업 트리오는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긁어먹었다.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시즌 5차전.
5회에 이미 18대0으로 스코어가 벌어지고 말았다. 1루 응원석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서울 나인테일즈의 마운드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더 많은 득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도 대전 펠컨스 타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지 않았다.
18점이면 득점은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건 추가 득점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1루 베이스를 밟지 못하게 만드는 거였다.
유현의 탈삼진 페이스가 워낙 좋다 보니 야수들이 할 일이 거의 없긴 했다.
문제는 그럴수록 더욱 수비에서 집중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타구가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을 푸는 순간 치명적인 실책이 나오곤 하니까.
유현이 8회까지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수비에서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어려운 타구를 안정적으로 처리해 준 야수들이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9회 초.
대전 펠컨스 타자들이 세 타자 연속 초구를 공략하고 빠르게 아웃을 당했다.
길게 시간을 끌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집중력이 유지될 때 유현이 마운드에 오르기를 바랐다.
반면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달랐다.
일부러 느리게 공수교대를 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대화를 나눴다.
“젠장. 이제 아웃카운트 3개밖에 안 남았어. 도대체 저 자식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거야?”
“방법은 그거밖에 없는 것 같은데?”
“욕먹어도 일단 출루하자고?”
“이번 시즌에만 두 번째 대기록을 헌납하는 게 좋아, 아니면 욕을 먹더라도 일단 대기록을 깨고 보는 게 좋아?”
“……좋아. 시도해 보자고.”
이미 승패는 기울어졌다.
9회 말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유현을 상대로 18점 차를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패전투수를 마운드에 올려도 아웃카운트 세 개 안에 18점 차를 뒤집는 건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한다.
결국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드러난 작전은,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대기록을 내주기 않기 위한 거였다.
-9회 말. 유현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오릅니다.
-3만 5천 명이 들어서 있는 잠실 베이스볼 파크가 고요합니다.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더그아웃만이 요란스럽습니다.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파이팅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반면 유현 선수는 무덤덤합니다.
-어쩌면 유현 선수는 지금 상황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네. 노히트노런을 만들어 냈을 당시에도 워낙 집중하느라 몰랐다 하더군요. 오로지 투구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뛰어난 집중력이 유현 선수을 더 무섭게 만드는 이유라고 봅니다. 다른 걸 신경 쓰지 않으니 떨리거나 흔들릴 이유가 없거든요.
남은 아웃카운트는 세 개.
어떻게든지 출루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나인테일즈의 7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초구에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파고든 커터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타이밍을 잘 맞췄더라도 배트 안쪽에 맞아서 땅볼이 됐을 법한 타구였다.
‘x발. 이걸 어떻게 치라는 거야?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최대한 매너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개막전에서의 비매너 논란도 있었고, 대기록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지켜줘야 할 몇 가지 불문율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매너? 불문율?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괜찮았다.
대기록을 내주는 것보다는 욕을 먹는 게 몇 백 배는 나으니까.
이미 개막전부터 대기록을 내준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서는, 어떻게든지 출루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가 존재했다.
‘욕하려면 해라. 난 출루할 테니까. 대기록 두 번 내주는 건 사양이라고.’
2구째.
딱!
타자가 다시 한 번 몸 쪽으로 파고든 커터에 번트를 댔다. 번트 아티스트라 부를 정도로 번트에 일가견이 있는 타자이다 보니, 어려운 타구임에도 3루 쪽으로 보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번트를 대자마자 타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루를 향해 내달렸다.
번트 방향과 타구의 속도가 나쁘지 않았다.
상대의 허를 찌른 번트였기에 1루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웃!”
결과는 아웃이었다.
타자가 번트 자세를 취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뛰어 나온 최수환이, 타구를 잡아 1루를 향해 재빨리 러닝 스로우를 한 것이다.
허를 찌르는 번트는 나쁜 작전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의 내야수들이 유현을 믿고서 살짝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2019시즌의 최수환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만점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거였다.
-아웃! 최수환 선수가 기습 번트 타구를 아웃 처리합니다! 번트 자세가 나오자마자 앞으로 뛰어 나오며 러닝 스로우를 선택한 본능적인 판단이 돋보이는 수비였습니다.
-올해 최수환 선수는 수비에서도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즘 보면 강태영 선수가 3루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전 펠컨스 팬분들은 참으로 행복하실 것 같습니다.
-작년과 올해는 진심으로 행복하겠죠?
-네. 분명 그럴 겁니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습니다. 타이밍이 애매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서는 불문율을 깼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습 번트를 통한 출루를 시도했던 겁니다. 비디오 판단을 통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죠. 하지만…….
-네. 전광판을 통해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좋으면서도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참는 대전 펠컨스 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유현 선수는 그 와중에도 무덤덤합니다.
유현은 비디오 판독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기가 막힌 수비를 보여 준 최수환에게 박수를 치고 다음 투구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의 환호성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전광판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됐다.
자신이 14개의 탈삼진을 잡고 25개의 아웃카운트를 지우는 동안, 단 한 번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두 개.
두근. 두근.
‘……어라?’
평온했던 유현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