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기록과 기록 사이 (1)
2018시즌 유현의 방어율은 0.48이었다.
2019시즌 첫 경기를 1피안타 완봉과 19탈삼진으로 화려하게 포문을 연 유현의 2019시즌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방어율 0의 행진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는 것.
다른 투수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오만이었겠지만, 유현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스플리터를 장착하기 전에도, 제구가 지금보다 완벽하기 전에도 185.1이닝을 투구하며 방어율 0.48을 기록한 괴물 아니던가.
지난해와 같은 퍼포먼스만 보여 주더라도 전 구단의 경계대상인 마당에, 오히려 더 발전했고 그 결과물을 개막전에서 제대로 보여 줬다.
4월 1주에 4승 2패.
4월 2주에 5승 1패.
4월 3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4승 1패.
개막전 2승을 포함해 4월 20일까지 15승 4패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를 내달렸다.
세미 제이슨이 아직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중이고, 열흘 동안 4번 타자 제라드 캠프가 빠진 상황에서도 날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유현-김용우-김정수 선발 라인업의 활약이 기대 이상이었다.
김용우의 경우, 4경기에서 3승 1패 방어율 1.50을 기록했다. 지난해의 깜짝 선발 데뷔 이후 호투했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을 거란 이야기가 더러 나왔지만, 제구를 가다듬고 투심 패스트볼의 장착하면서 보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김정수의 경우 4경기에서 4승 무패 방어율 0.28을 기록하며 선발투수 전향에 성공했다.
완봉승을 한 번 기록했고, 32이닝 동안 단 1실점만을 내줬을 정도로 안정감이 넘쳤다. 거기에 매 경기 10탈삼진 이상을 수확하며 새로운 탈삼진 머신으로서의 위용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현의 성적은…….
개막전 9이닝 1피안타 19탈삼진 무실점 완봉승.
4월 5일 금요일 9이닝 1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 완봉승.
4월 11일 목요일 9이닝 2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 완봉승.
4월 16일 화요일 9이닝 1피안타 1사사구 13탈삼진 무실점 완봉승.
네 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며 53탈삼진을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허용한 안타는 한 경기에 기록했다 생각해도 믿을 정도로 적은 5개였다.
36이닝 동안 5개의 안타를 허용했다는 건, 그 선수가 해당 리그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고 해석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기록이었다.
실제로 이번 시즌 들어 대부분 타자들은 유현의 공에 타이밍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지난해와는 전혀 달랐다.
제구가 더 좋아졌고 스플리터까지 장착했다 보니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여환진에 대한 객관적인 칼럼으로 미국 현지에서도 화제가 됐던 한 기자는, 유현에 대해 칼럼을 쓰며 이렇게 평가했다.
[유현은 지금 메이저리그에 가도 15승 이상을 할 수 있는 투수다. 적응만 제대로 한다면 사이영 상 경쟁을 할 수 있는 괴물이다. KBO리그의 구단들은 지난해 특별 조항을 만들어 유현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할 것이다. 2019시즌 유현을 KBO리그 타자들이 공략하는 건 그들의 수준에서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어쩌면 우린 유현이 시즌 내내 단 1점도 내주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KBO리그 타자들에게 묻겠다. 유현을 공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신에게 빌어라. 유현이 심각한 컨디션 난조를 겪기를.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0점대가 아니라 방어율 0을 기록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것이다.
다른 선수에게 그런 평가를 했다면 칼럼리스트의 자격이 없다고 온갖 욕을 종합세트로 먹었겠지만, 유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네 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자신이 그럴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중이니까.
모든 구단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유현의 약점이나 습관을 찾아보려 전력분석 팀들이 눈에 불을 켰지만, 지난해라면 모를까 올해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구력 보완과 스플리터의 추가로 약점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아주 작은 습관마저도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스프링캠프를 거치며 완전히 뜯어 고쳤으니까.
결국 유현을 상대해야 하는 상대 구단들은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로테이션을 조정해서라도 유현을 상대할 때 원투펀치를 되도록 소모하지 마라. 한 경기를 내주고 나머지 두 경기를 잡는다고 생각해라.
2-3선발을 맡고 있는 김용우와 김정수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쉽지 않지만, 유현이 난공불락인 상황에서 다른 팀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 건 분명했다.
4월 21일 일요일.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개막 이후 3주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서울 나인테일즈 또한 같은 전략을 취하려고 했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가 금요일 경기와 토요일 경기를 내리 잡았다는 거였다.
일요일 경기까지 내주면 대전 펠컨스에게 시즌 5연패를 당하게 되는 상황.
2019시즌 19경기에서 7승 12패로 7위인 상황에서, 팀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을 수 있는 스윕만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유현의 컨디션이 너무 좋다는 건데…….
결국 고민 끝에 서울 나인테일즈 코칭스태프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지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보자.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절대 대기록만큼은 헌납하지 않게 노력하자.”
지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기록만큼은 헌납하지 말자.
수년 전 여환진에게 9이닝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헌납했던 서울 나인테일즈는, 유현과의 시즌 첫 만남에서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다시 한 번 갱신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심지어 제이미 소시아의 빈볼 논란과 김형주와 양수안의 비매너 논란으로 구단 안팎이 소란스러웠고, 결국 팀의 4번 타자와 5번 타자는 부상으로 5월 중순이 돼야 돌아올 예정이다.
그사이 서울 나인테일즈는 7위에 머물며 좀처럼 반등의 여지를 만들지 못하며 총체적 난국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유현을 만나는 건 그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한 코칭스태프는 집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비가 오기를 빌었을 정도다.
물론 비가 오는 일은 없었다.
너무나도 화창한 날씨 속 오후 2시, 잠실 베이스폴 파크에서 대전 펠컨스와 서울 나인테일즈의 시즌 5차전이 열리게 됐다.
수비에 나서는 서울 나인테일즈의 야수들은 진심으로 바랐다.
1선발 제이미 소시아가 지난 맞대결과 달리 사고를 치지 않은 채 호투해 주기를, 그리고 낮 경기이니만큼 유현의 컨디션이 좋지 않기를 말이다.
문제는…….
딱! 딱! 딱!
-백투백투백 홈런! 대전 펠컨스의 클린업 트리오가 1회 초부터 제이미 소시아를 난타합니다. 스코어는 5대0! 제이미 소시아는 아직까지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지난 등판에서 7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 줬는데,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는 1회부터 고생하고 있습니다. 대전 펠컨스가 제이미 소시아의 천적이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보다는 요즘 대전 펠컨스 타선이 너무 뜨거운 게 문제 아닐까요?
-하하하. 그렇긴 하죠. 그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지난해 타율 8위를 기록했던 팀이 비록 시즌 초이긴 하지만 타율 1위가 될 거라고 말이죠.
-심지어 강태영 선수가 없는데도 현재 홈런 1위는 대전 펠컨스 선수입니다. 그것도 무려 11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최수환 선수를 보고 차세대 거포가 될 거라 생각하는 지도자는 거의 없었을 겁니다. 원래부터 타격 실력은 인정받던 선수였지만, 벌크 업과 타격폼 수정이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회 초.
대전 펠컨스는 백투백투백 홈런을 포함, 안타 여섯 개를 기록하며 제이미 소미사에게 무려 7실점을 안겼다. 겨우겨우 이닝을 틀어막긴 했지만 1회부터 45구를 투구하며 7실점을 한 건 경기 흐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불펜에서는 일찌감치 투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문제는 서울 나인테일즈의 불펜투수들이 4월에 방어율 6.50을 기록하며 안정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거였다.
1회 말.
-경기 전부터 다들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1회부터 7점을 뽑아 버렸네?
‘어휴. 이러면 부담스러워서 호투할 수밖에 없잖아. 타자들이 7점을 내줬는데 내가 못 던지면 에이스로서의 면목이 안서니까.’
-타자들 표정이 왜 저러냐. 너 혹시 어제 저녁에 나 몰래 나인테일즈 타자들 만나서 팼냐?
‘정령님, 개소리 자제 좀 해주세요. 나 어제 호텔에서 너랑 불화산 치킨 먹고 새벽에 태영이 시즌 8호 홈런 때리는 거 보다가 잤거든?’
-근데 쟤들 표정이 왜 저래?
‘나 상대하기 싫은가 보지.’
-쯧쯧. 상대하기 전부터 저렇게 기가 죽어 있으면 쓰나. 지려고 작정했네.
‘기 안 죽으면 방법은 있고?’
-그게 되면 KBO리그에 있겠냐. 강태영처럼 진즉 메이저리그로 떠났겠지.
유현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땅의 정령이 말한 대로 대기 타석과 더그아웃에 보이는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표정이 중요한 경기에서 지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유현을 상대하기 싫으니까, 유현을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위축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태도로 유현을 공략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내야 안타건 빗맞은 안타건, 유현에게 안타를 때려낸 선수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타격을 한 선수들이었다.
시작하기 전부터 기가 눌린 선수들은 유현의 입장에선 아웃카운트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님, 오늘 공 좋습니다.”
“그래. 오늘도 잘 부탁한다.”
“네! 맡겨 주십시오! 파이팅!”
지석한이 호쾌한 파이팅과 더불어 유현이 투구를 시작할 준비를 끝마쳤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하기 전부터 의욕을 상실한 듯한 표정의 타자를 상대로, 유현과 지석한 베터리는 초구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팡!
“스트라이크!”
헛스윙 스트라이크를 허용한 타자가 슬쩍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7km.
초구부터 157km를 기록했다는 건, 유현의 컨디션이 낮 경기와 상관없이 미쳐 날뛰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x발. 어쩐지 타이밍을 못 잡겠더라니. 도대체 저걸 어떻게 치라는 거야? 저런 놈은 작년에 특별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메이저리그에 보내 버렸어야지 왜 못 가게 막는 거냐고.’
2018시즌이 끝난 뒤.
부상으로 고생 후 전성기를 연 유현이 한 시즌이라도 더 빨리 메이저리그에서 뛰도록 특별 규정을 만들어 포스팅 시스템의 혜택을 받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선발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는 건 리그의 수준에 맞지 않는 투수라는 뜻이니,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메이저리그에서 국위선양을 하도록 배려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구단이 반대하면서 해당 주장은 며칠 만에 묻히고 말았다.
구단들의 입장에서는 시즌을 치르며 공공의 적이 된 유현에게 특혜를 주는 게 못마땅했으리라.
그 결과.
유현이라는 정신 나간 황소개구리 투수가 시즌 초부터 KBO리그 생태계를 무참히 파괴하고 있었다.
유현은 선두타자를 상대로 포심 패스트볼만 세 개 던져서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며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두 번째 타자에게는 4구째에 스플리터를, 세 번째 타자에게는 하이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삼구삼진을 만들어 냈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작정하고 탈삼진을 잡겠다는 듯이 유현은 적극적으로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했다.
2회에도, 3회에도.
유현이 모든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연속 타자 탈삼진 타이기록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다짐했다.
일단 타구를 만드는 데에 집중하자. 안타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맞추기라도 하자. 그게 안 되면 번트를 대서라도 삼진은 면하자.
이미 시즌 첫 맞대결에서 대기록을 헌납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추가로 대기록을 헌납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든 배트에 맞추려고 하겠지?’
-이번에도 대기록 헌납하면 개망신일 테니까.
‘어휴. 노력이 안타까워 배트에 맞출 수 있게는 해 줘야지. 그게 안타가 될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야.’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생각이 유현에게 훤히 읽히고 있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