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개막전 (4)
투구 수 관리를 신경 쓰지 않은 채 탈삼진 잡기에 주력한 유현의 피칭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120구를 투구하긴 했지만 9이닝 1피안타 19탈삼진 무실점,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웠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원래 계획과 다른 스타일의 피칭을 하긴 했지만, 유현은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바로 자신이 어떤 스타일로 던지더라도 KBO리그에서는 다 통한다는 거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한 구속 빠른 투수들이 KBO리그에 와서 성공하는 가장 큰 이유는, 150km 이상의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출 수 있는 타자가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두 번 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봤을 때 150km 이상의 강속구의 피안타율은 150km 미만의 피안타율과 제법 차이가 난다. 150km 이상의 강속구가 KBO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무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괜히 많은 스카우터들이 외국인투수를 뽑을 때 구속을 최우선으로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심지어 유현은 최고 구속 158km의 강속구를 던지면서 제구마저도 된다. 리그의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투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타자들이 강속구에 약하다는 게 막 던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끔씩은 괜찮지 않을까?’
-오늘 같은 경기나 기선제압을 할 필요가 있을 때, 혹은 특정 의도를 가지고 던질 때 정도는 괜찮겠지. 아, 물론.
‘물론?’
-KBO리그에서는 아무렇게나 던져도 되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을 대비해서 매 경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말도록.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난 항상 최선을 다하거든? 어제도 최선을 다해서 위협구 던지는 거 못 봤냐. 혹시나 타자들 맞을까 봐 완벽하게 제구해서 위협만 되게 던졌잖아.’
-와. 인성 보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던지건 호투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KBO리그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투수가 됐다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구위로 찍어 누르는 피칭을 계속해서 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예상 못한 비매너 행위로 인해 일종의 쇼를 한 거였지, 원래 유현은 땅볼 유도를 베이스로 하면서 스플리터로 허를 찔러 간간히 삼진을 잡아낼 계획이었다.
경기가 시작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변화를 준 거였고, 다음 경기에서는 원래 스타일대로 피칭을 할 예정이었다.
다만 가끔씩 계획을 가지고 구위로 압도하는 피칭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경기가 끝난 뒤.
유현과 펠릭스 곤잘레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제라드 캠프가 정밀 검진을 받고 있는 병원에 들려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는 차영석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정밀 검진 결과 제라드 캠프의 무릎에서는 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저녁식사를 위해 이동한 족발집에서, 경기 중 VIP석을 뚫고 나올 듯한 기세로 분노하던 차영석은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였다.
“아오! 내가 현역이었으면 출장 정지고 나발이고 제이미 소시아를 반 죽여 놨을 텐데.”
“그 대신에 형주 선배랑 수안 선배가 반 죽었죠. 형주 선배는 허리 부상, 수안 선배는 손가락 골절이라고 하던데요.”
“자업자득이야. 미친놈들이 어딜 감히 마운드에 있는 투수를 때리겠다고 달려들어? 석한아. 다음부터 그런 짓 하는 놈들 있으면 선배고 나발이고 일단 땅바닥에 내다 꽂아 버려. 그런 놈들은 선배 대접을 해줄 필요가 없다고. 동업자 정신 밥 말아먹은 양아치 같은 새끼들.”
“좀 쓰레기 같긴 했죠.”
유현은 차영석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했다.
부상을 입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무릎에 맞는 공을 던진 건 자칫 잘못해서 선수 생명과 연결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심지어 제이미 소시아는 최수환과 제라드 캠프를 연달아 맞추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고의 여부도 문제지만 사과조차 하지 않으며 동업자 정신을 실종한 게 유현과 선수단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제라드 캠프는 무릎에 큰 이상이 없었지만, 선수 보호를 위해 일단 1군에서는 제외됐다. 딱 열흘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1군으로 올라오기로 코칭스태프와 이야기가 끝났다.
반면 김형주와 양수안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김형주의 경우 뇌진탕과 허리 부상으로 인해 최소 4주, 양수완의 경우 검지와 중지 골절로 인해 최소 6주 간 결장하게 될 전망이었다.
유현은 두 선수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벤치클리어링 상황에서 두 선수가 유현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 마운드로 달려오지만 않았더라도 부상을 입지 않았을 테니까.
개막 2차전 훈련이 끝난 직후.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제라드 캠프와 면담을 하고 휴식을 위해 집으로 돌려보낸 안용석 감독이 선수단을 소집했다.
그리고 대뜸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행동에 선수단이 당황하는 사이 안용석 감독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어제 그런 행동을 한 건, 우리 팀을 만만하게 생각한 건 결과적으로 내 잘못이다. 우리 팀을 조금 더 강팀 이미지로 만들었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팀이란 인상을 심어 줬으면 어제 같은 일도 없었겠지. 결과적으로 타박상을 입는 데에 그쳤지만 제라드 캠프의 선수 생활을 좌우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고, 유현이 선수 두 명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할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에 대해 수장으로서 큰 책임을 느낀다.”
안용석 감독은 전날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만만하게 보도록 지난 시즌 강한 팀 킬러를 만들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일순간 선수단이 숙연해졌다.
몸에 맞는 볼과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건 안용석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그럼에도 안용석 감독은 모든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앞으로는 그 어느 팀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자. 우릴 만날 때마다 벌벌 떨도록, 패배 의식에 젖도록 만들자. 성적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강팀이 되자. 다시는 어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네! 알겠습니다.”
강팀이 되자.
앞으로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팀 킬러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자.
안용석 감독의 짧았던 선수단 소집은, 결과적으로 선수단을 한데 뭉치게 하고 성적에 대한 확실한 동기 부여를 해 줬다.
몇 시간 후 진행된 개막 2차전.
대전 펠컨스는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무려 15대0으로 압도적인 영봉승을 거뒀다.
-대전 펠컨스가 개막 2연전을 모두 승리로 가져갑니다.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서는 매너도 지고 경기도 진 최악의 2연전이었습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 팀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대전 펠컨스의 기세는 매섭습니다. 시범경기 전승이 얻어 걸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는 것처럼 선수단 전체가 똘똘 뭉쳐 짜임새 있는 야구를 보여 줬습니다. 마치 2018시즌 전반기 서울 레오파즈가 단독 질주를 할 때를 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질 것 같지 않은 야구를 하고 있어요.
-대전 펠컨스 팬들이 좋아할 것 같은 발언입니다.
-참고로 전 대전 펠컨스가 이번 시즌 통합 우승을 할 거라고 예상, 아니 확신하고 있습니다. 펠컨스 여러분. 펠컨스는 이제 강팀입니다. 어깨 쭉 펴고 당당히 응원하셔도 좋습니다.
개막 2차전의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김용우는 삼진을 다섯 개 잡는 데에 그쳤지만, 적절한 땅볼 유도를 통해서 7이닝 4피안타 1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리고 삼진을 잡을 때마다 가슴팍을 때리는 세레모니를 의도적으로 크게 하며 서울 나인테일즈를 자극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타선에서는 제라드 캠프를 대신해 4번 타자로 출장하게 된 최수환이 5타수 4안타 2홈런 5타점, 5번 타자 펠릭스 곤잘레스가 5타수 3안타 2홈런 4타점으로 펄펄 날았다.
투타의 완벽한 조화로 승리를 거뒀지만 안용석 감독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는 서울 나인테일즈 선수단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수단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던,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인 목표를 되새겼다.
‘이번 시즌, 무리한 기용을 하지 않는 선에서 나인테일즈 전은 모두 잡는다.’
지난해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던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무리를 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경기를 잡을 수 있게 노력해 포스트 시즌 진출을 어렵게 만드는 것.
안용석 감독은 그것이 전날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복이라고 생각했다.
* * *
개막 2연전이 끝난 다음 날.
화요일에 있을 인천 그리핀스와의 3연전을 치르기 위해 인천으로 향하기 전, 유현은 일찌감치 하루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차영석과 짧게나마 시간을 보냈다.
“딸내미가 사오라는 게 몇 개 있었는데, 난 이게 도통 뭔지 모르겠다.”
“제가 같이 찾아드릴까요?”
“오. 그럼 땡큐지.”
“후다닥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죠.”
차영석의 미국 코치 연수와 딸의 유학이 동시에 확정되면서, 졸지에 차영석의 가족은 단체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지 생활을 하게 된 딸이 한국에서 구해다달라고 부탁한 물건이 제법 많아서 쇼핑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딸 바보로 유명한 차영석은 미리 작성해 온 구매 리스트를 유현과 함께 기분 좋게 쇼핑했다.
이후 두 사람은 공항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차영석이 비행기에 타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선배님.”
“응? 왜?”
“내년에는 메이저리그에서 뵙겠습니다.”
“우리 팀으로 올 거 아니면 아예 내셔널리그로 가라. 아메리칸리그로는 오지 마. 너 자주 상대할 생각 하니까 끔찍하다.”
“하하하.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틀 동안의 펠컨스타디움 방문을 마친 차영석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으로 향가는 길.
유현과 땅의 정령이 대화를 나눴다.
-늙은 포수가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고 하니 허전하군. 작년 내내 붙어 다녔는데 말이야.
‘그러게. 뭐…… 선배가 말한 대로 나중에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 다시 만나면 되겠지.’
-넌 절대 양키스는 가면 안 되겠더라. 차영석이 정말로 널 죽일지도 몰라.
‘양키스 갈 생각 없었는데?’
-그럼 보스턴 가려고?
‘아니. 보스턴도 안 가.’
-그럼 어디 가려고? 몸값만 놓고 생각하면 두 팀이 가장 메리트 있잖아.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고 봤을 때도 확률이 높은 팀들이고.
‘뭐래. 내가 어느 팀으로 갈지 마음을 굳힌 건 순전히 너 때문인데, 모른 척하겠다 이거야?’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당시.
유현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메이저리그 진출 시 어느 팀으로 갈지 얼추 마음을 굳혔다.
계약 규모가 조금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조건만 맞춰 준다면 해당 팀과 계약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음을 굳힌 가장 큰 이유가 땅의 정령의 지속된 설득 때문이었다.
함께 지낸 지 대략 1년.
땅의 정령은 어떤 식으로 유현을 설득해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했고, 시카고 피자 두 판을 혼자서 먹어치우는 사이에 유현의 설득에 성공했다.
-역시 그게 재밌겠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대기록을 남기기 위한 도전. 그것만으로도 그 팀에 갈 이유는 차고 넘치지.’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
아직 1년이 남았지만, 그를 위해 유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KBO리그의 기록이란 기록을 싹 다 갈아엎은 뒤에, 온갖 주목을 다 받으면서 화려하게 메이저리그 데뷔를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