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개막전 (3)
“현!”
“유현 선배, 괜찮아요?”
“비켜, 엄마 없는 놈들아!”
펠릭스 곤잘레스와 최수환이 나란히 유현을 향해 달려갔다. 김형주와 양수안이 유현에게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는 걸 보고 반쯤 죽일 듯한 기세로 마운드를 향해 내달렸다.
두 선수의 압도적인 기세에 뒤엉켜 있던 서울 나인테일즈와 대전 펠컨스 선수들이 움찔하며 길을 터줬다.
두 선수의 표정은 심각했다.
만에 하나 유현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김형주와 양수안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정작 유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친데 없으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 마. 다치기는 형주 선배랑 수안이가 다친 거 같은데, 앰뷸런스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저 나쁜 새끼들! 엄마 없는 애들이 유현 괴롭혔어.”
“그런 말 누가 가르쳤어?”
“태영하고 영석이!”
“…….”
유현이 슬쩍 VIP석을 바라보았다.
VIP석을 뚫고 나올 듯한 기세로 뭔가를 외쳐 대고 있는 차영석의 모습이 보였다.
‘영석 선배 뭐라 말하고 계신 거야?’
-김형주랑 양수안 뚝배기를 반으로 쪼개 버릴 거라는 게 가장 약한 욕인 정도?
‘음. 확실히 영석 선배 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긴 했지. 그나저나 곤잘레스한테 패드립을 가르치다니…….’
-원래 외국어를 배울 때는 욕부터 배워야지 습득이 빠른 법이다. 너도 알리사한테 그렇게 영어 배우고 있잖아.
‘으음. 알리사의 색다른 반전 매력을 알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지.’
-아. 망할 커플. 미안한데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펠컨스타디움에서 꺼져 줄래?
차영석이 인천 그리핀스의 안방마님이었을 때, 상대 팀들은 설사 인천 그리핀스가 매너 없는 플레이를 하더라도 트러블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는 순간 철저하게 팀 선수들의 보호에 신경 쓴 채 상대팀 선수들을 압박하고 필요하면 출장 정지 징계마저도 불사하는 차영석의 존재로 인해 부담을 느낀 거였다.
지난 해.
대전 펠컨스는 차영석 덕분에 벤치클리어링을 단 한 번도 겪지 않고 시즌을 치렀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상대 팀 고참 선수들이 차영석에게 하소연을 했고, 그럴 때마다 차영석이 중재를 하거나 일침을 놓으며 벤치클리어링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 팀들이 차영석으로 인해 억지로 참고 넘어간 상황도 몇 차례 있었다.
때문에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이번 시즌 몇 차례 벤치클리어링을 겪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다.
설마 차영석이 은퇴하자마자 상대 팀에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유현이 김형주와 양수안을 바라보았다.
김형주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양수안은 오른손을 움켜쥔 채로 앰뷸런스를 외치며 연신 고함을 내질렀다.
송현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다급히 유현의 상태를 살폈다. 여차하면 교체를 시킬 생각으로 불펜에도 연락을 해놓은 상태였다.
“다친 데 없어? 어디 아픈 데 있으면 말해. 불펜 대기시켜 놨으니까.”
“괜찮아요. 최소 8회까진 불펜 대기시킬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정말 괜찮아요?”
“네. 멀쩡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원래 좀 용가리 통뼈거든요.”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 두 명은 다쳐서 앰뷸런스에 실려서 정밀 검진을 위해 병원으로 떠났고, 정작 유현은 아무 이상 없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걱정해야 하는 건 부상을 입은 두 선수가 아니라, 마운드 위의 괴물을 막아 내는 거라는 걸 말이다.
* * *
5회 초의 벤치클리어링 이후.
유현은 연기를 하는 걸 그만뒀다.
더 이상 제구가 흔들리는 척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필요가 없었다.
제라드 캠프를 맞춘 것에 대한 보복은 위협구를 던지는 걸로 끝났고, 겸사겸사 상대 선수 두 명이 자신을 때리려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유현은 상대 선수를 위협하는 행동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주먹을 피하고 몸을 틀어 방어를 한 게 전부다.
다만 그 당시 유현의 몸이 땅의 정령 덕분에 엄청나게 단단해져 있었던 게 문제가 됐다.
유현은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선수는 유현을 때리기 위해 마운드로 달려왔다. 심할 경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을 초래한 건 그들이지 유현이 아니었다.
남을 다치게 하려다가 자신들이 다쳤을 뿐.
여하튼.
벤치클리어링 이후 연기를 그만둔 유현을 상대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자신들과 유현의 수준 차이를 절감해야만 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코너워크에 신경 쓰다가 존 아래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나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하이 패스트볼이 결정구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제대로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연신 헛스윙을 해댔다.
타이밍을 잘 맞춰 타격해도 문제였다.
구위에 밀려서 타구가 멀리 뻗지 못했고, 죄다 내야 플라이나 땅볼 타구가 되고 말았다.
7회 초 2아웃 상황에서 내야 안타를 만들어 낸 게, 이날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유현을 상대로 만들어 낸 안타의 전부였다.
퍼펙트 행진을 깼다는 안도감도 잠시.
“스트라이크 아웃!”
루킹 삼진으로 7회 초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들어간 직후,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미친. 벌써 14개째야. 오늘 아예 작정하고 삼진 잡으려는 거 같은데?”
“봐봐. 저 새끼 제구 안 되는 척하는 거 구라였다니까. 벤치클리어링 이후 제구 잘 되는 거 봐봐. 심지어 구속도 다시 올라왔어.”
“그래서 뭐, 또 벤치클리어링 일으키자고? 이번에 몇 명이 실려 나가게?”
“그건 아니지만…….”
“잘 들어.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건 우리의 잘못이 크고, 지금은 유현이 연기를 했냐 마냐를 따질 때가 아니야. 매너에서도 진 건 좋아. 오늘 경기를 내주는 것도 그렇다 쳐. 하지만 대기록을 헌납할 수는 없잖아?”
“죽더라도 어떻게든 타구를 만들어 내자. 이거죠?”
“어. 크게 휘두를 생각하지 마. 투수 코앞으로 가도 좋으니까 일단 맞추는 데에 집중하자.”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쉽지 않아도 해야지.”
크게 휘두르지 않고 맞추는 데에만 집중한다.
말은 쉽지만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최고 구속 158km의 강속구를 던지면서 보더라인 피칭을 즐겨 하며 수싸움의 달인인 저 괴물 같은 투수를 상대로 파울이 아닌 타구를 만들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7회 초까지 14탈삼진.
잘못하면 9이닝 최다 탈삼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일단 타구를 만들어 내는 거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배트를 짧게 쥔 채 집중을 했음에도 유현은 8회 초 2개의 삼진을 추가했으니까.
-8회 초까지 102구를 투구한 유현 선수가 9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점수 차가 10대0으로 벌어진 상황이지만,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마운드에 오를 수밖에 없겠죠.
-유현 선수가 1개의 탈삼진을 추가하면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 번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을, 2개 이상을 기록하면 신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오늘 컨디션을 보면 신기록을 세울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습니까?
-네. 벤치클리어링 이후 제구가 안정을 찾았고, 구속 또한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156km가 나오고 있습니다. 라이징성 무브먼트까지 보이는 걸로 보면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어 보입니다. 기껏 배트에 맞춰도 죄다 파울이 되고 있으니 말 다 했죠.
-오늘, 유현 선수는 1피안타만을 허용한 상황에서 16개의 탈삼진을 잡았습니다. 이제 남은 세 개의 아웃카운트에 신기록 수립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대기록은 헌납하지 말자.
지더라도 대기록만큼은 절대 안 된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어떻게든지 삼진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러기에는 삼진을 잡으려고 작심한 유현을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제구가 안 되는 척했을 때도 9타자 연속 탈삼진을 허용했는데, 대놓고 코너워크에 신경 쓴 채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략을 해내는 게 가능하겠는가.
유현은 9회 초,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9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19탈삼진 무실점.
기존의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갱신하며 개막전부터 압도적인 피칭으로 팀에게 2019시즌 첫 승리를 안겨 줬다.
[와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펠컨스타디움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유현은 모자를 벗어 관중석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지석한을 가볍게 껴안아주고서 선수들의 축하를 받았다.
물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제라드 캠프의 정밀 검진 결과를 전해 듣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경기가 끝난 후.
유현은 방송사 인터뷰를 통해 벤치클리어링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공이 손에서 빠져 위협구가 나와 저도 모르게 손을 까닥거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는데, 갑자기 김형주 선배님이 갑자기 마운드로 달려오셔서 당황했습니다. 덩달아 양수안 선배님도 마운드로 달려와서, 솔직히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건 페어플레이 정신을 위반한 비신사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프가 공에 맞는 것도 그렇고요.”
“유현 선수는 제라드 캠프 선수가 무릎에 공을 맞은 게, 고의였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다분히 자극적인 질문이었지만, 유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에서 어떤 식으로 떠들건,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의도했다고 봅니다. 솔직히 그 상황에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렇다고 보복구를 던질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팀이, 그리고 제가 원하는 복수는 압도적인 승리였으니까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화났을 때 어떻게 피칭하는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 *
개막전이 끝난 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건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서울 레오파즈의 대졸 신예 투수가 아니라 대전 펠컨스와 서울 나인테일즈의 경기였다.
정확히는 유현에게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다시 봐도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상완을 때렸는데 손가락이 골절되냐. 유현 몸이 튼튼한 거냐 때린 놈이 골다공증 있는 거냐.
-ㄹㅇ 용가리 통뼈인 듯;;;;
-유현 이러다 징계 먹는 거 아님?
-개소리 ㄴㄴ. 우리 아모르 형이 왜 징계를 먹음? 빈볼을 던진 것도 아니고, 선수를 때린 것도 아닌데. 김형주랑 양수안은 자기들이 유현 때리려다가 다친 거잖아?
-나인테일즈 애들 인터뷰 못 들음? 유현이 일부러 제구가 안 되는 척 위협구 던져서 화났다고 하잖아. ㅈㄴ 개매너 아님?
-증거도 없는 거로 뭐라고 하면 안 되지. 그렇게 따지면 두 타자 연속 몸에 맞는 볼에 다음 타자한테 위협구까지 던진 제이미 소시아부터 징계해야 하는 거 아니냐.
-ㅇㅈ. 원인 제공은 지들이 해놓고서 대기록 내주고 선수들 부상 입으니까 괜히 유현 탓하는 나인테일즈 팬들 클라스 보소.
-추하니까 작작 징징대라.
-나 레오파즈 팬들인데 펠컨스 선수들한테 감사한다. 우린 작년에 그 망할 살인 태클이랑 비매너 때문에 선수들 다쳤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열 받음. 참교육 감사함.
서울 나인테일즈 팬들은 위협구를 던지고 선수 두 명을 부상 입힌 유현을 징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금껏 해온 비매너 플레이 때문에 타 구단들의 공공의 적으로 몰리며 여론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대전 펠컨스 팬들도, 서울 나인테일즈 팬들도, 타 팀 팬들도 공통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근데 유현 피칭 진짜 예술이더라. 제구 안 될 때는 구위로 찍어 누르더니, 제구 되면서 코너워크 하기 시작하니까 답이 없던데?
-타자들이 아예 타이밍을 못 잡더라.
-애초에 유현 정도의 구속에 제구가 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타이밍을 맞출 수 있는 타자들이 많이 없을 건데, 크보 수준이면 말 다 했지. 작년에도 얻어 걸린 안타나 실투 아니면 유현 제대로 공략한 팀들 없었잖아.
-근데 올해는 작년보다 더 무서운 듯. 스플리터 장착하니까 완전 괴물임. 작정하고 탈삼진 잡으면 기록 싹 다 갈아엎을 것 같던데?
-제발 우리 팀이랑 펠컨스랑 만날 때 유현이 선발 등판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서울 나인테일즈는 16경기 내내 유현만 만나서 계속 퍼펙트게임 당하게 해주십시오.
유현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