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64화 (64/155)

64화 개막전 (2)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몸이다.

건강한 몸으로 최선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게 프로 선수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니까.

프로 선수들에게 있어 부상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거지만, 다른 선수의 고의로 인해 자신이 부상을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했을 땐 느끼는 감정이 남다르다.

1회 말.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제대로 화가 났다.

테이블 세터인 정장혁과 장영학이 연속으로 중견수 플라이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3번 타자 최수환과 4번 타자 제라드 캠프가 나란히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것이다.

최수환은 그나마 변화구를 맞았고 엉덩이 쪽이라서 괜찮았지만, 패스트볼에 무릎을 강타당한 제라드 캠프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몇 분 만에 일어나 1루 베이스를 밟은 제라드 캠프는 결국 교체된 뒤 곧장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진을 받게 됐다.

무릎이 워낙 예민한 부위이니만큼 통증이 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전시키지 않고 검사를 해보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발투수 제이미 소시아가 최수환과 제라드 캠프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제라드 캠프가 제이미 소시아를 향해 화내고 욕설까지 내뱉은 뒤에 교체됐다는 거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실투가 아니라 고의로 자신을 맞췄다는 걸.

제이미 소시아는 고의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5번 타자 펠릭스 곤잘레스에게도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위협구를 던졌다.

위협구를 피한 펠릭스 곤잘레스가 욕설을 내뱉으며 배트를 내려놓은 채 마운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순간.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양 팀 주장들 간의 대화로 벤치클리어링이 마무리됐고, 펠릭스 곤잘레스는 제구 잘 된 체인지업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젠장!”

한 손으로 배트를 땅으로 내리찍어 반 토막 낸 펠릭스 곤잘레스는, 더그아웃에 들어온 이후에도 한참 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리고 타자들과 굳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곤잘레스. 고의로 던진 거 같아?”

“나한테 던진 건 흥분해서 빠진 걸로 보였는데, 캠프한테 던진 건 100퍼센트 고의야. 패스트볼을 정확히 노려서 던졌어.”

“도대체 왜?”

“소시아 저 새끼 캠프랑 원수라도 졌어?”

“혹시…… 그거 때문일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거? 그게 뭔데?”

“작년에 나인테일즈하고 마지막으로 붙을 때, 캠프가 30홈런 기록하고 세레모니를 조금 크게 했잖아요. 그거 때문에 화난 거 아닐까요?”

“……그거 때문에 무릎을 맞춘다고?”

“근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2회 초.

다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끝마친 유현이 타자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굳은 표정으로 땅의 정령과 대화를 나눴다.

‘수환이랑 캠프를 맞춘 게, 고의라는 거지?’

-최수환은 모르겠지만 제라드 캠프는 고의 맞아. 내가 아까 들었거든. 지난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제라드 캠프가 30홈런 기록하고 세레모니 크게 한 게 거슬린 거 같더라고. 아. 물론 고의로 무릎을 맞추려 한 건 아니었을 거야. 펠릭스 곤잘레스에게 위협구를 던진 것도 고의는 아니었을 거고. 원래 제구가 들쑥날쑥한 투수잖아?

‘중요한 건 캠프를 고의로 맞췄다는 거지. 부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맞는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유현이 슬쩍 송현수 투구코치를 바라보았다.

송현수 투구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도의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마운드로 올라갔다.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가 고의로 몸에 맞는 볼을 던졌는지 아닌지 가장 먼저 아는 건, 타석에 서 있는 타자고 그 다음이 같은 투수들이다.

손에서 볼이 빠지거나 제구가 안 돼서 몸에 맞춘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몸에 맞춘 건지는 자세히 관찰하면 티가 나는 법이다.

그리고 유현이 봤을 때, 땅의 정령이 말한 것처럼 제이미 소시아가 제라드 캠프를 맞춘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세레모니를 조금 크게 했다는 게, 개막전에서 152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몸에 맞출 만한 명분일까 싶었다.

심지어 다른 부위도 아니고 무릎을 맞췄다.

의도하고 무릎을 맞춘 건 아니겠지만 선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고, 제이미 소시아는 그에 대해 사과의 제스처조차 취하지 않아서 대전 펠컨스 선수단의 분노를 샀다.

보복구를 던질까 했지만 그만뒀다.

팀이 원한다면 언제든 보복구를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선수단은 유현이 보복구를 던지는 걸 원하고 있지 않았다.

이럴 때 유현이 해야 하는 건 한 가지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을 압도하는 것.

그리고…….

보너스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에게 너희도 언제든지 맞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 주는 것.

* * *

1회 초.

유현은 땅의 정령이 시킨 대로 제구가 흔들리는 척 하면서 아웃카운트를 잡아 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땅의 정령이 어째서 그런 권유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이미 소시아는 제라드 캠프가 지난해 마지막 경기에서 세레모니를 크게 했다는 이유로 몸에 맞는 볼을 던졌고, 그 결과 제라드 캠프는 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고 있다.

부상 여부나 의도적으로 무릎을 맞추려 했는지는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제이미 소시아가 의도적으로 제라드 캠프를 맞췄고, 유현은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에게 그에 대한 복수를 해주고 싶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똑같이 몸에 맞추는 건 1차원적인 복수였다.

유현이 원하는, 그리고 제라드 캠프의 부상 위험으로 화가 난 땅의 정령이 원하는 복수는 그런 1차원적인 것이 아니었다.

유현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2회 초를 마무리했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4-5번 타자인 김형주와 양수안에게 몸 쪽으로 과하게 붙는 볼을 던지면서 제구가 흔들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중요한 승부는 바깥쪽으로 하며, 제구보다는 구위로 찍어 누르려는 모습을 보였다.

몸 쪽 승부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제구가 흔들리는 척을 해야 타자들에게 몸 쪽으로 붙는 위협구를 던질 수 있을 테니까.

몸에 맞는 공은 한순간의 아픔으로 끝난다.

하지만 최고 구속 158km의 라이징성 무브먼트를 보이는 포심 패스트볼이 제구가 안 된 채 몸 쪽으로 붙는다는 것만으로도,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타자들을 위축되게 만들고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의도적으로 위협구를 던지는 건 수준급 타자를 상대하는 전략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들은 자신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최고 구속 158km의 포심 패스트볼, 2~3km 차이 나는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거기에 7~10km 차이 나는 스플리터를 던지는 투수가 있다.

KBO리그에서 그 선수가 제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구위로 찍어 누르려고 한다 해서 제대로 공략하는 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이미 소시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제구 문제로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KBO리그에 온 이후 제구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게 아님에도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발 투수로 변모했으니까.

제이미 소시아보다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유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유현은 제구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척하고 있는 거였기에, 몸 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구위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집요한 보더라인 투구를 할 때보다 살짝 존 안으로 몰리게 던졌고, 가운데로 몰리는 건 철저하게 존을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만 던졌다. 타자가 적극적으로 스윙을 할 것 같은 타이밍에는 스플리터를, 스윙을 참을 것 같으면 의도적으로 몰리는 공을 던져서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4회 초까지.

유현은 무려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제구가 흔들리는 척하는 것과 별개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압도했다.

그 과정에서 몸 쪽 높은 코스를 살짝 벗어나는 위협구를 여섯 번이나 던졌다.

그즈음.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확신했다.

“유현 저 자식 제구가 안 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흔들리는 척하는데 주요 상황에서는 기가 막히게 제구가 되고 있잖아. 집중력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간극이 너무 커.”

“의도적으로 몸 쪽 제구가 흔들리는 척 위협구를 던지면서 승부하고 있다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뭐긴 뭐야. 제라드 캠프 맞춘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 보복하려는 거겠지. 겸사겸사 경기도 수월하게 풀어 나갈 생각이고.”

“저거 살인미수 아니에요? 저 빠른 공을 타자 머리 쪽으로 던지는 건 솔직히 아니지 않아요?”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유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투구하는지 명확하게 눈치 챘다.

-슬슬 눈치챈 것 같은데? 위협구 그만 던질래?

‘아니. 계속 던질 거야.’

-그러다가 벤치 클리어링 일어날지도. 너 싸움 못 한다면서?

‘걱정하지 마.’

유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난 다칠 생각도, 징계 먹을 생각도 없어. 징계 먹고 다치는 건 나인테일즈 선수들일 거야.’

-뭐 어떻게 하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싸움을 잘 못해서 말이야. 무서우니까 때리려고 하면 막거나 피해야지. 그 과정에서 상대 선수가 다치면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난 피하고 방어만 한 건데.’

-바람직해. 내가 왜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줬는지 잊지 말도록.

‘잊을 리가 있나. 캠프가 무릎을 맞은 그 순간부터 이걸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 이왕 준 거 실컷 이용해 먹도록.

‘오케이. 열 받은 타자들 더 열 받게 해보자고.’

* * *

4회까지 퍼펙트에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

유현의 구위에 압도당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 어떻게든지 유현으로부터 안타를 만들어 내며 퍼펙트 행진에 제동을 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또다시 유현이 위협구를 던졌을 때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생각이었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1회 말에 있었던 연속 몸에 맞는 볼과 펠릭스 곤잘레스에게 위협구를 던진 건 명백한 제이미 소시아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우현의 거듭된 유협구가 정당화될 순 없다고 판단했다.

“스트라이크!”

유현이 4번 타자 김형주를 상대로 초구 바깥쪽 커터를 던져서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2구째.

다시 한 번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이 몸 쪽 높은 코스에서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2km.

전력투구를 할 때에 비하면 구속이 나오지 않았고, 유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드물게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드러냈다.

‘망할 새끼. 계속 가지고 놀겠다 이거지?’

앞선 이닝에서는 속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현의 제구가 흔들리지 않다 확신하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위협구를 던진다고 판단했다.

김형주는 화를 억눌렀다.

1회 말 제이미 소시아가 잘못한 부분이 명백하니 일단 한 번은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3구 스플리터에 헛스윙을 한 상황에서, 4구째에 다시 한 번 위협구가 날아온 그 순간.

김형주가 유현을 노려보았다.

유현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자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이 새끼가!”

김형주가 배트를 내팽개치고서 마운드를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유현의 얼굴을 주먹으로 몇 대 때려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대전 펠컨스 선수들과 서울 레오파즈 선수들이 동시에 더그아웃에서 쏟아져 나왔다.

문제는 그들보다 김형주가 마운드에 도착하는 게 빨랐다는 거였다. 김형주는 죽일 듯한 기세로 유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동시에 유현이 몸을 숙였다.

타격할 목표를 잃은 김형주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달려오면서 주먹을 휘두르다 보니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리며 무게 중심을 잃었다.

유현이 다시 몸을 들었을 때.

쿵!

김형주는 등 뒤에 대자로 뻗은 상태였다. 유현이 주먹을 피하는 척 자연스럽게 김형주를 넘겨 버린 것이다.

-아. 미안. 실수로 땅을 조금 단단하게 다져버렸지 뭐야. 허리 괜찮니? 대답 없네. 기절했나?

김형주가 뻗어 버리자 서울 나인테일즈의 5번 타자 양수안이 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더그아웃에서부터 계속 유현이 위협구를 던지는 것이 살인 행위라고 펄펄 뛰던 선수였다.

“이 개새끼야아아아!”

양수안이 유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징계를 먹고 벌금을 내도 상관없으니 코뼈 정도는 박살 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유현이 몸을 비틀었다.

얼굴을 맞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비틀며 오른팔 상완으로 양수안의 주먹을 막아 냈다.

빠각.

동시에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현의 팔이 아닌 양수안의 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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