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개막전 (1)
2018시즌.
유현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차영석과 호흡을 맞췄다. 호쾌하면서도 투수 리드에 일가견이 있는 차영석은 유현이 편안하게 투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줬고, 가끔씩은 사인을 주고받지 않고 투구해도 완벽하게 공을 받아줬다.
차영석과 호흡을 맞추지 않았더라도 좋은 성적을 기록했을 테지만, 차영석 덕분에 마음 편하게 투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차영석은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자마자 일찌감치 발표했던 것처럼 미련 없이 은퇴를 했다.
친정팀인 인천 그리핀스에서 코치직 제안을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전 펠컨스에서의 1년을 제외하면 인천 그리핀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기에,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자신을 떠나보낸 친정 팀에 대한 배신감 또한 커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대신 강태영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통해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전 펠컨스 프런트의 권유에 따라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더블A에서 코치 연수를 받게 됐다.
‘태영이를 통해 전해 듣기로는 구단의 평가가 긍정적이래. 잘하면 다음 시즌에는 트리플A에서 연수받을 수도 있다던데.
-워낙 친화력 좋고 영어도 수준급으로 하는 데다, 수비 실력 탄탄하고 볼 배합에 일가견이 있으니 더블A 수준에서는 금방 인정받았겠지.
‘이번 시즌 끝나고 펠컨스로 돌아올까?’
-모르지. 근데 차영석이 레드삭스에서 배터리 코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그 후에 대전 펠컨스로 금의환향하는 거지. 1군 배터리 코치나 수석코치를 하다가 안용석 감독의 뒤를 이어 펠컨스의 감독을 맡는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지잖아.
‘확실히 그것도 의미가 있긴 하겠지.’
차영석이 더블A에서 얼마나 코치 연수를 받을지는 알 수 없다. 1년을 채운 뒤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차영석의 은퇴 기념행사를 인천 그리핀스가 아니라 대전 펠컨스에서, 짧게나마 개막전에서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전 펠컨스는 차영석이 지도자로서 팀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인천 그리핀스가 아니라 대전 펠컨스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쌓아 나갈 거라는 거였다.
불과 1년이었지만 차영석이 대전 펠컨스에 끼친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자리를 잡지 못했던 투수들을 다독이고 자신감을 심어 주면서 주전으로 도약하게 도왔고, 데뷔 이후 도합 50경기에 출장한 게 전부였던 포수 지석한의 성장에도 큰 도움을 줬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유현이나 강태영처럼 눈에 띄는 스타들의 활약이 부각됐지만, 코칭스태프가 평가하는 공헌도 1순위는 단연 차영석이었다.
애초에 차영석이 없었다면 전력이 갖춰지지 못했던 전반기에 5할 싸움 자체를 하지 못했을 거라고 봤다. 포수로서도 베테랑으로서도, 차영석은 2018시즌 몸값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일까?
개막전에 차영석이 돌아온다는 말에 유현을 비롯한 다수의 선수들이 기대감을 품었다.
모처럼 차영석과 만나는 게 진심으로 좋았다.
오후 2시 무렵.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차영석은 이전에 비해 얼굴이 꽤나 타 있었고, 이전보다 몸이 더 좋아져서 은퇴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선배님!”
“영석 선배님!”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미국 음식 입에 안 맞으면 한식 좀 보내드릴까요?”
“마이너리그는 음식이 잘 안 나온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삐쩍 마르셨네. 한국 온 김에 몸보신 단단히 합시다.”
“영어는 할 만 해요? 인종차별 하는 새끼들 있는 건 아니죠?”
“메이저리그 야구는 뭐가 좀 달라요?”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질문 공세를 받던 차영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명이 넘는 선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말을 거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한 명씩 말해 이것들아. 고작 몇 달 만에 보면서 뭐 이렇게 호들갑들이야.”
“반가워서 그렇죠!”
“반가우면 개막전 시원하게 이기고 저녁에 삼겹살이나 배 터지게 먹자.”
“크흐흐. 삼겹살에 시원하게 소주 한 잔?”
“응, 콜라 한 잔. 소주는 나 혼자서 마실 테니까 너희들은 음료수나 드세요. 개막전부터 술 마시면 감독님한테 말해서 2군에 짱박아 두라고 할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역시나 차영석은 차영석이었다.
젊은 선수건 베테랑이건 가리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며, 몇 달이 아니라 어제까지 얼굴을 본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선수들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차영석이 유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였다.
“여어. 펠컨스의 에이스. 스플리터 기가 막히던데? 세이부 라이온스 애들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거 보니까 3일 연속 치즈버거 먹고 더부룩했던 속이 뻥 뚫리더라.”
“그걸 또 챙겨 보셨습니까?”
“당연히 봐야지. 내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우리 팀에 올 수도 있고, 라이벌 팀에 올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분석해 놔야 할 거 아냐. 아마 오늘 경기도 최소 10팀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널 보기 위해서 올 걸?”
“좋은 소식이네요.”
유현은 일찌감치 2019시즌이 끝나면 구단의 동의하에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할 거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해왔다.
그래서일까?
시즌이 시작하기 전임에도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연습경기와 마지막 시범경기에서의 등판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제법 관심을 받았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유현의 새 무기인 스플리터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스플리터를 제대로 장착해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유현의 가치가 지난해보다 더 올라갈 거라는 게 대부분 스카우터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물론 유현은 자신과 관련된 스카우터들의 평가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값을 부풀리는 건 메켄 코퍼레이션이 알아서 할 일이다. 유현이 할 일은 몸값은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부상 없이 2019시즌을 치르며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거였다.
그러면 몸값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믿었다.
-그래도 좋지? 메이저리그에서 벌써부터 너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니까, 막 대박 조짐이 보이고 그러지 않아?
‘좋긴 좋지. 근데 막 확 와 닿고 그러지는 않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잖아.’
-몸값은 메켄 코퍼레이션에서 열심히 홍보하면서 끌어 올릴 테니까, 넌 지난 시즌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돼.
‘당연히 그래야지. 영석 선배 공식으로 은퇴하는 날인데, 승리를 선물해 줘야 하지 않겠어?’
* * *
대전 펠컨스와 서울 나인테일즈의 개막전임에도 펠컨스타디움에는 인천 그리핀스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그들이 펠컨스타디움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인천의 레전드인 차영석의 은퇴를 축하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차영석은 그런 팬들을 위해 은퇴식이 열리기 전, 두 시간 동안 사인을 하면서 팬들과 은퇴 전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2시간 뒤.
마침내 차영석이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홈플레이트에 앉아 있는 건 포수 지석한이 아니라 유현이었다. 지난 해 차영석과 영혼의 호흡을 과시한 유현이 차영석의 시구를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팡!
유현이 살짝 빠진 차영석의 시구를 잡아낸 뒤, 마운드와 홈플레이트의 중간 즈음에서 만나 차영석과 가볍게 포옹했다.
“영석 선배, 다시 돌아오실 거죠?”
“내가 돌아오면 네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내가 보스턴 1군 배터리 코치까지 승격할 테니까, 같이 월드 시리즈나 가자.”
“같은 팀으로요, 다른 팀으로요?”
“다른 팀 갈 거면 월드 시리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너 상대할 거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영석은 훗날 유현과 월드 시리즈에서, 그것도 상대 팀으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강태영 대 유현.
두 선수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가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자신이 배터리 코치로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지금껏 해온 야구 인생이 헛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짧은 은퇴식이지만 차영석은 팬들과 마지막 시간을 가지며 현역 생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대전 펠컨스가 준비한 선물을 받은 차영석이 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VIP석으로 향하자, 그제야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팡! 팡! 팡!
유현이 연습 투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레오파즈와의 마지막 시범경기에서 체크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와 달리 오프 시즌부터 꾸준히 몸을 만들며 철저하게 시즌 준비를 했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신무기인 스플리터 또한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자신감은 차고 넘쳤다.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가볍게 개막전 승리를 팀에게 안겨 줄 생각을 했지만…….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혹시 너 싸움 잘해?
‘싸움? 입 터는 건 마음먹고 하면 평균치 정도는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아가리 파이터 말고 몸과 몸의 대화.
‘어릴 때 자꾸 농장 빠져나가려던 멍멍이 엉덩이 때린 거 말고는 누굴 때려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싸움은 왜?’
-오늘 경기가 묘한 분위기로 흘러갈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
-지나보면 알게 될 거야. 아무튼 싸움 못 한다 그거지?
‘어. 못해.’
-그럼 이 몸이 네게 선물을 주마.
[땅의 정령님의 특별 선물!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타 선수와 충돌 시 몸이 단단해져서 부상을 입지 않습니다! 충돌한 선수는 100퍼센트 부상을 입습니다!]
[광역 어그로를 끌어 서울 나인테일즈를 종합병동으로 만들어 보세요!]
유현은 어이가 없었다.
뜬금없이 싸움 잘하냐고 묻더니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겠다니, 앞뒤 설명도 없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땅의 정령의 셀프 안내말이 끝난 직후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감돌며 신체가 단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몸이 단단해졌지만 투구에는 일절 영향이 없는 게, 말 그대로 몸만 단단해진 상태였다. 외부의 충격에 몸을 보호하기 위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유현은 땅의 정령이 개막전부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어허. 의심하지 말고 기다려 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 몸에게 감사하게 될 테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난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아니. 몸 쪽 제구에 살짝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으면 해 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뭐, 네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으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한다. 컨디션 안 좋은 척할게.’
-바람직한 선택이다.
유현은 땅의 정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1회 초 세 타자를 모두 아웃으로 잡긴 했지만 외야 플라이 두 개와 2루수 라인 드라이브였다.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은 154km였지만 몸쪽으로 던진다는 게 자꾸 가운데로 몰렸고, 타자들이 실투를 노려 쳤지만 구위에 밀리며 외야 플라이가 두 개 연속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공 6개로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냈지만 유현은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선배님, 오늘 제구 안 되세요?”
“몸 쪽이 말을 잘 안 듣네. 이상하다. 연습 투구 때는 말을 잘 듣더니 왜 이러나 모르겠어. 이런 적이 별로 없어서 조금 당황스럽네.”
“바깥쪽 위주로 승부할까요?”
“아니야. 그대로 몸 쪽을 써야지. 한가운데로 몰리지 않도록 조심할게.”
“네, 알겠습니다.”
유현은 지석한에게도 몸 쪽 제구가 안 되는 것처럼 연기했다. 일부러 전력투구를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유도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지.’
그리고 1회 말.
유현은 땅의 정령이 무엇을 경고하려고 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개새끼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