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각오
좌완 파이어볼러.
최고 구속 158km에 달하는 강속구 투수에게 팬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피칭은 무엇일까?
아마도 강속구를 이용해서 시원시원하게 삼진을 잡고, 설사 실투가 나오더라도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 누르는 모습일 것이다.
유현은 후자의 경우 더러 보여 줬지만 전자의 경우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2018시즌에 100개가 넘는 탈삼진을 수확하긴 했지만, 파이어볼러 특유의 구위를 앞세운 피칭으로 탈삼진을 잡은 게 아니라 타자들과의 수싸움에서 허를 찌르는 식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유현이라고 탈삼진 머신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구종의 한계로 인해서 허를 찔러 삼진을 잡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유현에게는 오프 스피드 피치도, 브레이킹 볼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잡으려면 잡을 수 있겠지만 투구 수가 늘어나기에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추구하는 유현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끔 보여주기 식으로 마음먹고 삼진을 잡을 때가 아니라면 억지로 삼진을 잡으려 노력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랬던 유현이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스플리터를 배우며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
스플리터는 삼진을 잡기에 최적화된 구종이다.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유현의 스플리터는 포심 패스트볼과 10km 내외 구속 차이가 났다.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궤적으로 들어오지만 10km 느리고,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는 무브먼트를 보여 줬다.
건드리지 않으면 볼이 되는 구종이지만 제대로 구사됐을 때는 예측하지 않는 한 스윙을 참아내기 힘든 구종이 스플리터다.
유현을 상대하게 된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은, 유현이 신무기인 스플리터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삼진을 잡으려 들 거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유현의 스플리터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기에는 표본이 너무 적다는 것.
그리고 전력분석이 제대로 됐다고 한들 치기 힘든 공을 던지는 투수를 공략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거였다.
유현의 투구 패턴은 단순했다.
2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나 존을 살짝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이 두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며 1사 1․2루 위기를 벗어났다.
이어진 7회 초에도 유현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의 상대로 삼진 세 개를 솎아낸 뒤 이닝을 마무리했다.
다섯 타자 연속 탈삼진.
정확히 20구를 던지면서 유현은 자신의 임무를 깔끔하게 끝마쳤다. 팀의 리드를 지키며 서울 레오파즈에게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 아니면 스플리터.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서울 레오파즈의 타자들은 유현에게 당하고 말았다.
알고 있으면 뭐하겠는가.
상대의 공이 너무 좋고 제구마저 완벽해서 타이밍을 잡기조차 어려운데 말이다.
‘저 자식 지난 시즌보다 제구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작년에도 좋긴 했지만 이렇게 칼같이 제구를 하진 않았었는데…….’
‘x발. 하이 패스트볼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던지는데 안 휘두를 도리가 있냐고.’
‘저 새끼는 어떻게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냐.’
‘아. 그냥 이번 시즌 안 치르고 빨리 메이저리그로 꺼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꺼져줬음 좋겠다.’
가뜩이나 구위만으로도 난공불락인데 지난 시즌에 비해 제구마저 좋아졌다.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 입장에선 유현을 상대하는 과정 자체가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현이 1과 3분의2이닝만 투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는 거였다.
아마 유현이 계속 마운드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반격의 찬스 따윈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닝이 교체되기 전, 유현 선수가 5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은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세 개의 탈삼진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완벽하게 떨어지는 스플리터로 헛스윙을 유도했습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KBO리그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연습 경기를 현장에서 보면서도 느꼈지만, 유현 선수가 엄청난 신무기를 장착한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의 피칭 스타일에 변화가 생길까요?
-그러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지난해 유현 선수는 선발 등판 시 평균 이닝 1위를 기록했지만, 투구 수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땅볼 유도를 통한 효율적인 피칭을 선호한 결과인데요, 스플리터를 추가했다고 해서 갑자기 스타일을 바꿀 가능성은 낮습니다. 다만…….
-다만?
-주요 상황에서 지난해보다 삼진을 수월하게 잡을 겁니다. 그 차이가 유현 선수를 더 강하게 만들 거고요.
해설위원의 말이 맞았다.
유현은 피칭 스타일에 변화를 줄 생각이 없었다. 땅볼 유도를 주 무기로 삼으며 삼진으로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피칭을 통한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매 경기 목표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클래식한 스타일의 볼 배합을 가지고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다른 구단들의 관심을 끌려는 거였다.
내가 이렇게 사기적인 스플리터를 던지는데 견제 안 할 거냐, 빨리 스카우팅 리포트를 스플리터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하라 말하고 있는 거다.
관심이 스플리터에 쏠려야 페넌트레이스에서 보다 편하게 투구할 테니까.
* * *
9전 전승.
대전 펠컨스는 시범경기에서 전승을 내달리며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시범 경기의 성적이 정규 시즌 성적과 항상 정비례하진 않지만, 전승을 거둔 팀이 지난해 한국 시리즈 우승 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은퇴와 FA로 인해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중 일부가 이탈했음에도, 연습경기에 이어 시범 경기에서도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대전 펠컨스 팬들은 창단 이후 줄곧 염원했던 그것을, 첫 통합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대전 펠컨스는 지금껏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통합 우승은 하지 못했다.
전성기였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정규 시즌 1위를 여러 번 차지했음에도 한국 시리즈 준우승에 머무르며 고배를 삼켰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달랐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강태영과 FA 계약을 하지 않은 이영우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시리즈 우승 주축 멤버에 큰 변화가 없는데다가,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를 거치며 주전 경쟁을 해 줘야 하는 유망주들이 상당수 가능성을 보여 줬다
지난해 안용석 감독은 항상 5할 승부를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시즌 초부터 승수 쌓기를 통해 1위 경쟁을 꿈꿨다.
Falcons takes all.
대전 펠컨스는 2019시즌을 맞이하며 내건 캐치프레이즈처럼, 모든 걸 다 가져올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미디어데이에서도 선수들이 아니라 안용석 감독이 가장 먼저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대전 펠컨스 감독으로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팀을 정상 궤도로 올리려면 제 임기가 다 끝날 즈음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 예상보다 빨리 팀이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더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난해의 커리어가 반짝 활약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무리캠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했습니다.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제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아쉽게 놓쳤던 통합 우승, 올해는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펠컨스! 펠컨스! 펠컨스!]
[나는 행복합니다~]
안용석 감독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미디어데이를 직관하러 온 대전 펠컨스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암흑기를 보내면서 미디어데이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거였다.
상당수의 팀들이 돌아가며 우승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전 펠컨스는 항상 포스트 시즌만을 바라보았고 해설위원들은 늘상 하위권으로 시즌을 끝마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18시즌을 치르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서울 레오파즈를 제치고 해설위원들이 뽑은 우승후보 1순위가 대전 펠컨스였고, 팬들이 뽑은 우승후보 1순위 또한 대전 펠컨스였다.
거기에 감독은 포스트 시즌 진출을 당연하기라도 하다는 듯 우승을 천명했다.
막힌 속이 뻥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2019시즌 주장 완장을 차게 된 최수환과, 명실상부한 KBO리그 최고의 투수로 자리매김한 유현 또한 한 마디를 보탰다.
“태영 선배가 빠졌지만 대전 펠컨스는 여전히 강팀이라는 걸, 이제는 정말로 전과 다르다는 걸 이번 시즌에 확실하게 보여주겠습니다. 솔직히 다른 팀들이 저희를 상대할 때마다 지난해 레오파즈를 상대할 때처럼 벌벌 떨게 만드는 게 주장으로서의 목표입니다.”
“개인 타이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 목표는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실점으로 긴 이닝을 책임지는 것뿐입니다. 개인 승수가 관계없이, 제가 등판하는 모든 경기에서 팀의 승리를 견인하는 투수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시범 경기에서 5할 타율을 기록하면서 타격 폼 변경에 성공한 최수환과, 한 경기에 등판했을 뿐이지만 새 무기를 장착하며 2019시즌에는 더 무서워질 거라고 예고한 유현.
두 선수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들으며 대전 펠컨스 팬들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 * *
2019년 3월 30일.
KBO리그 개막이 다가왔다.
대전 펠컨스는 홈인 펠컨스타디움에서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개막 2연전을 치르게 됐다.
펠컨스타디움으로 출근하기 전.
유현은 땅의 정령과 함께 소파에 앉아서 양손을 꽉 움켜쥔 채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TV에서는 메이저리그 개막전, 정확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를 대한민국의 한 케이블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방송해 주고 있었으니까.
강태영은 시범 경기에서 2할의 타율에 홈런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며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다행히 그는 부진에도 불구하고 3번 타자로서 개막전에 선발 출장할 기회를 잡았고, 첫 타석에서 초구를 공략해 그린 몬스터를 훌쩍 넘기는 2점 홈런을 만들어 내며 펜웨이 파크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9회 말.
강태영이 찬스에서 타석을 맞이했다.
-강태영 선수가 9회 말 2사 만루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강태영 선수는 4타수 2안타 1홈런 3타점을 기록하며 개막전부터 펄펄 날았습니다.
-문제는 강태영 선수의 맹활약에도 불펜이 무너지며 9대9,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는 거죠. 그리고 강태영 선수에게 경기를 자신의 손으로 끝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KBO리그에서 강태영 선수는 만루 찬스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대 팀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만루에서 고의 사구가 나온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메이저리그에서 맞이한 첫 만루 상황에서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요?
-볼넷을 내주는 순간 경기가 끝납니다. 결국 투수 입장에서도 정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강태영 선수 입장에서는 확실한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가는 게 좋겠죠. 이를 테면 상대 투수의 전매특허인 커터가 있겠군요.
-초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 2구째. 강태영 선수가 호쾌하게 배트를 휘두릅니다. 큽니다! 큽니다! 커요! 담장을…… 넘어갑니다! 끝내기 그랜드 슬램! 강태영 선수가 펜웨이 파크의 영웅이 됩니다!
5타수 3안타 2홈런 7타점.
데뷔전부터 맹활약을 하는 강태영을 보며 유현은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쳤다.
“진짜 미쳤다, 미쳤어. 적응 잘 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개막전부터 펄펄 날아다니네.”
-내가 말했잖아. 강태영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무난하게 적응할 거라고.
“저 정도면 무난한 수준이 아니지 않나?”
-무난한 게 아니라 미친 거지. 보스턴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겠군.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미국 여행 갈 일 있으면 보스턴으로 가세요! 보스턴은 안전합니다!
“잘하는 거 보니까 보기 좋네.”
-너도 오늘 잘해야지?
“당연하지.”
안용석 감독은 개막전 선발로 유현과 김정수를 나란히 예고한 상황이다.
지난해 선발로서 많은 경기를 치르며 선발 등판에는 익숙해진 상황이지만, 오늘 유현은 사뭇 남다른 감정으로 경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개막전 선발이기 때문에?
아니었다.
유현은 개막전 선발이건 한국시리즈 선발이건 투수로서의 소임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의 투수였다. 그에게 있어 어떤 무대인지는 피칭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현이 살짝 들떠 있는 이유는…….
차영석이 모처럼 펠컨스타디움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