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스프링캠프 (3)
유현이 1회 초를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가뿐하게 막아 내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어진 1회 말.
딱!
3번 타자로 나선 최수환이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떨어지는 포크볼을 받아쳐 솔로 홈런을 만들어내며 대전 펠컨스가 선취 득점을 올렸다.
세이부 라이온스 코칭스태프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작이었다.
유현이 KBO리그를 초토화시킨 투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스프링캠프 막바지라 컨디션이 덜 올라온 상태이니만큼 1회부터 충분히 득점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분석 또한 충분하게 했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모두 일품이지만, 아직 컨디션이 덜 올라온 상황이라면 충분히 공략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세 가지였다.
예상 이상으로 유현의 컨디션이 빨리 올라온 상태였다는 것,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을 154km까지 끌어올린 상황에서 제구마저 완벽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카우팅 리포트에 존재하지 않는 구종을 던진다는 거였다.
스플리터.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는 이 구종에 타자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스플리터를 던질 거라고 예상이라도 하지 않는 한, 포심 패스트볼과 육안으로 구분이 안 되는 이 구종이 제대로 구사됐을 때 배트를 참는 건 불가능했다.
2회 초.
유현을 상대하기에 앞서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스플리터는 스카우팅 리포트에 없었는데……. 진짜 저걸 몇 개월 만에 습득한 거야?”
“그러겠지. 쓸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숨겨 뒀을 이유가 없잖아.”
“진짜 미쳤네. 무슨 구종을 찍어 내듯이 배우면서 저렇게 완벽하게 던져?”
“공략법은?”
“존 안에 들어오는 걸 다 노려야지.”
“그러다 스플리터가 들어오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던가, 아니면 삼진 당하던가. 방법이 없잖아.”
대화를 나눴지만 뚜렷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을 모두 쳐낸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임하는 것, 그리고 스플리터가 들어올 타이밍을 예상하고서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참는 것 정도였지만…….
-쟤들 싹 다 걷어 낼 생각이네.
‘스플리터는 타이밍을 예측해서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스플리터는 결국 참으면 볼이 되니까.
‘어휴. 그럼 안 던져야지. 스플리터 던지다가 볼넷 내주면 큰일이잖아.’
문제는 상대 투수가 KBO리그에서도 심리전의 달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스플리터는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꺼낸 카드라는 거였다.
사실 유현이 이날 경기에서 준비한 결정구는 스플리터가 아니라 커터였다. 우타가 여섯에 좌타자 셋인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을 상대로 커터를 이용해 땅볼 유도 위주의 피칭을 할 생각이었다.
1회 초에 세 타자를 모두 스플리터로 잡아낸 건 일종의 작전이었다.
타자들의 머릿속을 커터가 아니라 스카우팅 리포트에 존재하지 않는 스플리터로 가득 채우기 위해 한 행동이었고, 결과적으로 유현과 땅의 정령의 판단은 주효했다.
1회 초와 달리 2회 초는 세 타자가 모두 땅볼로 허무하게 물러나면서 이닝이 끝난 것이다.
유현이 선택한 결정구는 모두 커터였다.
3회 초에도 세 타자 모두 땅볼로 잡아내며 3이닝 퍼펙트를 허용한 상황에서,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저런 투수가 왜 KBO리그에 남아 있는 거야? 강태영이랑 같이 메이저리그에 갔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부상 때문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진출하려고 해도 아직 1년 남았다던데?”
“KBO리그 타자들이 불쌍하네.”
“대전 펠컨스 타자들이 타격 상위권에 줄줄이 이름을 올린다면, 그건 아마도 저 투수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거야.”
* * *
[세이부 타자들 유현한테 말린 듯.]
[ㅇㅇ. 저건 빼박 말렸다.]
[암. 저래야 유현답지. 타자들 빡쳐서 쌍욕 좀 하게 해줘야지!]
[난 아직도 안대하 성질내다가 차영석한테 욕 한 바가지 먹고 더그아웃으로 얌전히 들어가던 거 생각남.]
[세이부 타자들 ㅂㄷㅂㄷ 떠는데?]
[커터 노리는 것 같으니까 하이 패스트볼로 다시 삼진 잡는 거 보소. 나 같아도 욕 나올 듯.]
[근데 저건 유현이 잘하는 게 아니라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이 못하는 거 아님? 뭐 저런 똥볼에 헛스윙하고 ㅈㄹ임?]
[응. 아니야.]
[응. 재팬 시리즈 우승 멤버야.]
대전 펠컨스와 세이부 라이온스의 연습 경기 인터넷 중계창의 채팅은 대부분 유현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었다.
유현을 비난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워낙 여론이 긍정적이라 티도 나지 않았다.
경기를 보던 한국 야구 팬들은 대전 펠컨스 팬이건 대전 펠컨스 팬이 아니건 목 놓아서 유현을 응원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아무리 연습 경기라고 하지만 한국 시리즈 우승 팀과 재팬 시리즈 우승 팀 간의 맞대결이 자존심 대결이라 생각한 게 첫 번째, 2019시즌을 끝으로 유현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게 두 번째였다.
자고로 한일전에서는 응원 팀을 가리지 않고 잘하는 선수가 최고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가 잘하면 한 목소리로 응원하지 않던가.
시즌이 시작하면 대전 펠컨스를 제외한 다른 구단 팬들에게 유현은 악마가 될 테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 시리즈에서 패배한 서울 레오파즈 팬들마저도 유현을 응원했다.
그리고 유현만큼이나 야구팬들의 응원을 독차지하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바로 최수환이었다.
1회 말 2아웃 상황에서의 솔로 홈런 이후, 4회 말에는 선두타자로 나와 다시 한 번 솔로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덕분에 스코어가 0대2까지 벌어졌다.
[최수환 타격감 미쳤네. 바깥쪽으로 제구 잘 된 슬라이더였는데 그냥 넘겨 버리네.]
[이번 시즌 앞두고 벌크 업하고 타격 폼 수정했다더니 효과 좀 보는 듯?]
[오. 그러고 보니 몸 좀 좋아진 것 같네.]
[최수환 올해 포텐 터지는 거냐?]
[근데 알바트로스 산 타자 중에서 밥값 못하는 타자는 여태껏 없었음]
[ㅇㅈ. 알바트로스가 타자를 잘 키우긴 하지.]
[최수환 힘내라. 알바트로스를 떠났지만, 알바트로스 팬들은 널 응원한다. 대신 우리 만나면 좀 살살해 줘. 너 한국 시리즈에서 좀 무섭더라.]
대전 펠컨스 팬들과 울산 알바트로스 팬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최수환 덕분에 대전 펠컨스가 앞서나가는 사이.
4회까지 투구 수 42개를 기록하며 단 한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은 유현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아무래도 6회까진 힘들겠지?’
-투구 수가 애매해서 교체할 듯?
‘그럼 5회에 그냥 전력투구 해야겠다.’
팡!
유현이 초구로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빠르게 날아간 포심 패스트볼이 뜨는 듯한 무브먼트를 보이자 타자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덕분에 유현은 손쉽게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4km.
1회 초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최고 구속을 기록하며 전력투구를 할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유현이 던진 하이 패스트볼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반응하지 못한 세이부 라이온스의 4번 타자 마쓰이 아이토는 자존심이 제대로 상했다.
그는 세이부 라이온스 타선의 핵심이자 지난해 51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한 거포였다.
거기에 컨텍트가 뛰어나서 타율 3할 3푼 5리를 기록했고, 심지어 발까지 빨라 25도루를 기록했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
같은 좌익수에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다 보니 강태영과 종종 비교되곤 했고, 실제로 2019시즌 이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거라 선언했다.
하지만 강태영만큼 주목받진 못했다.
강태영의 경우 KBO리그와 일본 출신 타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강속구에도 줄곧 강한 모습을 보여 온 반면, 마쓰이 아이토는 강속구에는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게다가 존에 따른 약점이 뚜렷하지 않은 강태영과 달리 마쓰이 아이토는 데뷔 이후 줄곧 몸 쪽 높은 코스가 약점이라고 지적받았다.
마쓰이 아이토는 메이저리거도 아닌 KBO리그 투수의 하이 패스트볼에 움찔했다는 게, 두 번째 타석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게 화가 났다.
‘어디 한 번 몸 쪽 높은 코스로 다시 한 번 던져봐. 이번에는 제대로 쳐줄 테니까.’
그런 마쓰이 아이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는 2구 또한 몸 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었고, 마쓰이 아이토는 거침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결과는 큼지막한 파울 홈런이었다.
‘포심 자체만 놓고 보면 못 칠 정도는 아니야. 배트가 살짝 밀리기는 해도 타이밍만 제대로 잡으면 충분히 넘길 수 있어.’
유현의 공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코스로 들어올지 예측한다면, 타이밍만 잘 맞출 수 있다면 큰 거 한 방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홈런을 만들어서 KBO리그를 씹어 먹었다는 저 건방진 투수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딱! 딱!
각오를 다진 마쓰이 아이토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3구와 4구는 각각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을 가볍게 받아쳐서 파울을 만들었다.
이어진 5구째.
‘스플리터다. 이번엔 스플리터야.’
마쓰이 아이토는 스플리터가 들어올 거라 예상했다.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집요하게 쳐내는 타자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게,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 같은 구종이니까.
유현의 손끝에서 공이 떠났다.
일단 스트라이크 존까지는 궤적이 똑같았다.
하지만 스플리터라 예상하고 배트를 휘두른 마쓰이 아이토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현이 던진 5구는 떨어지지 않고 떠오르는 듯한 무브먼트를 보였다.
그리고 몸 쪽 높은 코스에 꽉 차게 들어갔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플리터를 던질 거라는 예상을 깨고 다시 한 번 과감하게 몸 쪽 높은 코스로 찔러 넣는 유현의 심리전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헛스윙 삼진을 잡자마자 유현은 본능적으로 어퍼컷 세레모니를 했다.
콧김을 씩씩 내뱉은 마쓰이 아이토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한 손으로 배트를 땅바닥에 휘둘러 박살 내고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와. 힘 하나는 진짜 장사네. 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한국말로 번역해 줘? 아오. 저 x발 새끼 진짜 공 x같이 던지면서 세레모니도 x같이 하네. 뭐 이 정도?
‘이따 경기 끝나고 인사해야겠다.’
-뭐라고?
‘칭찬 고맙다고 해야지. 투수한테 공 x같이 던진다는 말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어.’
* * *
유현이 5이닝 호투를 했고 최수환이 4타수 4안타 2홈런 3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을 했지만, 대전 펠컨스는 5대4로 패배하고 말았다.
중심 타선에서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최수환의 맹활약 외에는 하지성의 1타점 3루타가 유일한 득점이었을 정도로 타선이 꽁꽁 막혔다. 거기에 유현이 5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이후 분풀이라도 하듯이 3점 홈런을 만들어 낸 마쓰이 아이토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1점 차 석패를 했음에도 대전 펠컨스 선수단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재팬 시리즈 우승 팀을 상대로 접전을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코칭스태프는 오늘의 연습 경기가 선수단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확신했다.
반면 승리를 거둔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단의 표정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이기긴 했지만 5회까지 유현에게 압도당했고, 마쓰이 아이토의 홈런이 없었다면 경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거기에 리그의 수준 차이까지 감안한다면 이기긴 했지만 사실상의 패배였다.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은 경기 결과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안용석 감독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오늘 연습 경기 좋았습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희 선수단에게 큰 경험이 될 겁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내일도 연습 경기를 함께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의 기습 제안에 안용석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은 공교롭게도 대전 펠컨스와 세이부 라이온스 양 팀 모두 연습 경기가 없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전 펠컨스는 일부러 연습 경기를 잡지 않았다.
혹여나 세이부 라이온스와 연습 경기를 한 번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고, 설사 연습 경기를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훈련과 휴식을 병행하면 되니 문제될 건 없었으니까.
다행히 바라던 바가 이뤄졌다.
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기회를 거절하는 건 덜떨어진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저희야 좋지요. 내일, 같은 시간에 홈 어웨이를 바꿔서 하도록 하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대전 펠컨스와 세이부 라이온스의 두 번째 연습 경기가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