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스프링캠프 (2)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강태영과 개인 훈련을 할 당시.
땅의 정령은 유현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구속과 제구, 둘 중 원하는 걸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것에 따라 맞춤 훈련법을 가르쳐 줄 테니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구속이 더 끌리기는 한데…… 단점이 있을 거 아냐.’
-구속을 택하면 꿈의 100마일을 던질 수 있게 해줄 거다. 대신 투구폼의 변경으로 제구력이 지금보다 살짝 떨어질 거고, 부상 위험도가 약간 증가하겠지. 제구를 선택하면 지금 상태에서 제구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 훈련법을 가르쳐 줄 거고.
‘흐음…….’
꿈의 100마일.
제구력의 감소와 부상 위험도의 증가라는 단점이 있음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00마일의 강속구를 던지는 건 모두 투수들에게 있어 로망이니까.
하지만…….
‘제구력으로 하자.’
유현의 선택은 100마일이 아닌 제구력이었다.
제구력의 감소와 부상 위험의 증가라는 부작용까지 껴안으면서 구속을 올리느니, 지금 상태에서 제구를 더 가다듬는 게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땅의 정령이 미소를 지었다.
-구속을 선택했더라면 실망했을지도 몰라.
‘구속을 왜 선택하냐. 누가 보더라도 함정 카드인데. 구속은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제구력을 희생하고 부상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구속을 올릴 필요 없잖아?’
-정답이야.
선택지는 두 개였지만 애초에 답은 하나였다.
제구력이 떨어지고 부상 위험도까지 올라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구속을 올리는 건 바보짓이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유현의 공은 충분히 위력적이다.
구속을 올리기보단 제구력을 가다듬는 게 현실적이면서도 투수로서 더 발전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고, 오프 시즌부터 스프링캠프 내내 유현은 땅의 정령이 가르쳐 준 제구력 향상 훈련을 꾸준히 했다.
첫 자체 청백전에서는 그 효과를 제대로 보았다.
아직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도 제구로 수월하게 타자들을 잡아냈다. 보더라인에 절묘하게 걸치는 공에 타자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이전에도 유현의 제구는 수준급이었지만, 땅의 정령이 가르쳐 준 훈련을 반복하면서 유현은 컨트롤 아티스트의 반열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공 한 개에서 반 개 정도 차이로 원하는 모든 코스에 투구하는 것과 실투를 없애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목표였다.
100마일짜리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도 제구가 동반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게 메이저리그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원하는 공을 원하는 코스에 던질 줄 아는 제구력이 필수였다.
그걸 제대로 보여 준 게 여환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여환진보다 빠른 공을 던지던 KBO리그의 에이스들은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쓴맛을 맛보고 유턴했지만, 여환진만큼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의 생존 경쟁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다.
뛰어난 제구가 바탕이 되기에 가능한 거였다.
-네 목표가 뭐라고?
‘패스트볼 4종 세트로 타자들을 현혹하는 그렉 메덕스가 되는 것.’
-원한다면 브레이킹 볼이나 체인지업도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대신 부상 위험도가 증가하겠지?’
-패스트볼 4종 세트보다 위력적이지도 않을 거고.
‘그럼 필요 없어.’
땅의 정령은 가끔씩 유현에게 브레이킹 볼이나 오프 스피드 피치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그때마다 유현은 큰 고민을 하지 않고 거절했다.
패스트볼 4종 세트보다 위력적이지 않고 부상 위험까지 있는 구종을 굳이 새로 배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스플리터까지 추가한 마당에 새 구종 습득이 필요할까 싶었다.
결국 결론은 변화보단 기존의 것을 갈고 닦는 거였다.
스프링캠프 내내.
유현은 자체 청백전과 KBO리그 팀들과의 연습 경기에서 무실점 호투를 이어 가며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1차 스프링캠프가 끝나고 2차 스프링캠프가 열릴 오키나와로 향할 즈음, 유현은 구속을 150km까지 끌어올렸다.
오키나와에서는 실전의 비중을 늘려서 선수들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모든 팀들이 자체 청백전과 연습경기의 비율을 대폭 늘렸다.
KBO리그 구단들이 대부분 오키나와에 캠프를 차리는 건 다수의 일본 구단들과의 연습 경기를 잡기 위해서다. 비록 1군이 아니라 2군이지만 그마저도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적잖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년과 다를 바 없는 행보 속에, 대한민국 야구 팬들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2018시즌 한국시리즈 우승 팀인 대전 펠컨스와 재팬시리즈 우승 팀인 세이부 라이온스가 연습 경기를 한다는 거였다.
그것도 2군이 아니라 1군과 1군의 맞대결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이례적으로 생중계하기로 한 경기에 많은 야구 팬들이 관심을 가졌다. 정확히는 대전 펠컨스에서 선발로 예고한 투수에게 관심을 가졌다.
대전 펠컨스는 세이브 라이온스를 상대하기 위해 에이스 유현을 선발로 예고했다.
팀으로서도 연습 경기이지만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재팬시리즈 우승 팀인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이긴다면 선수단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 줄 것이고, 2019시즌을 치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코칭스태프는 늦은 새벽까지 최선의 라인업과 불펜 투입 시기를 고민했다.
2019년 2월 26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을 앞두고 유현이 마운드에 올라 연습 투구를 하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동시에 인터넷 중계 댓글 창이 유현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애리조나 자체 청백전과 연습 경기에서 전 경기 무실점했다는 거 보면 유현 컨디션 엄청 좋은 거 같은데, 잘하겠지?]
[오늘은 실점할 듯. 세이부 재팬 시리즈 우승 당시 베스트 라인업이잖아.]
[그래도 유현 정도면 탈 크보급 투수인데 쉽게 무너지진 않을 듯?]
[일본 상대로는 연습 경기고 나발이고 무조건 이겨야 함. 작은 거 하나도 지면 안 됨. 오늘 유현이 완봉승해서 이길 거라고 본다.]
[투구 수 제한 60개랬어, 미친놈아.]
[님들 그거 암? 세이부가 베스트 라인업으로 연습 경기 치르는 게, 유현이 선발로 나와서 그러는 거라고 함.]
[ㄹㅇ임?]
[ㅇㅇ. 안용석 감독 인터뷰 기사 뜸]
[와씨ㅋㅋㅋㅋㅋㅋ 유현 클라스 보소]
대전 펠컨스를 상대하는 세이부 라이온스는 재팬 시리즈 당시의 베스트 라인업을 꾸렸다. 부상으로 경기를 뛰는 게 어려운 몇몇 선수를 제외하면 분명 베스트 라인업이었다.
1.5군이 아닌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하는 조건이 바로 유현의 선발 등판이었다.
팡! 팡! 팡!
유현은 포수 지석한이 미트를 가져다대는 곳으로 정확하게 투구했다. 만족스럽게 컨디션을 점검한 뒤, 지석한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선배님, 첫 타자부터 결정구로 그 공을 요구하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줘. 스카우팅 리포트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보여 주자고.”
세이부 라이온스가 자신의 선발 등판을 조건으로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유현은 지석한과 머리를 맞대고 볼 배합을 고민했다.
연습 경기이지만 자신의 몸값을 올릴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다.
메켄 코퍼레이션에서도 유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재팬시리즈 우승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제법 큰 이슈가 될 거라고, 이왕 맞붙게 된 거 호투하는 게 좋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유현은 1회부터 적극적으로 스카우팅 리포트에 존재하지 않는 공을 던져 세이부 라이온스의 타자들을 농락하기로 마음먹었다.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초구로 선택한 건 몸 쪽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몸을 움찔한 타자의 방망이가 크게 헛돌았다.
‘뭐야. 뭐가 이렇게 빨…….’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을 본 타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154km.
스프링캠프 막바지라 슬슬 컨디션이 올라올 시기라는 걸 감안해도, 벌써부터 154km는 세이부 라이온스 타자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구속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유현이 던진 초구가 몸 쪽 높은 코스에 꽉 차게 들어왔다는 거다.
154km의 강속구를 몸 쪽 높은 코스에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이는 곧 엄청난 무기가 된다. 게다가 초구부터 구사했다는 건 몸 쪽 높은 코스 제구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
타자는 유현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괴물이네. 좋아. 일단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전부 다 걷어 낸다는 느낌으로 덤벼 보자고.’
딱.
2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터였다. 어렵사리 배트에 맞추긴 했지만 파울이 됐고,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까지 몰리고 말았다.
“다음은 다시 포심.”
보통 구속에 자신감 있는 투수들은 경기 초반에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타자는 초구부터 154km를 기록한 유현이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할 거라고 예상했다.
3구째.
어떤 공이 들어오더라도 스트라이크 존 안에만 들어오면 다 쳐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타자가 공의 궤적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배트를 휘두르는 그 순간.
‘뭐야. 사라졌…….’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던 공이 순간적으로 타자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사라진 공은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며 존을 한참 벗어나는 원 바운드 볼이 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 상황.
원바운드 된 볼을 매끄럽게 블로킹한 지석한이 타자를 태그하면서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삼진으로 허무하게 물러난 타자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그 공은 스카우팅 리포트에 없던 구종인데…… 설마 시즌이 끝나고 새로 장착한 구종인가? 아니면 그 동안 꽁꽁 감춰 둔 건가? 어느 쪽이건 괴물인 건 분명하군.’
* * *
유현은 분명 뛰어난 투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거라고 예상한 메켄 코퍼레이션이 일찌감치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했고, 수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유현의 경기를 보기 위해 펠컨스타디움을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유현이 사이영 상에 도전할 정도로 맹활약 할 것 같냐는 질문에는 상당수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투수는 맞다. 하지만 떨어지는 공이 없는 게 유일한 약점이다. 떨어지는 공을 장착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금보다 제구를 더 가다듬는다면 사이영 상에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일관된 의견이었다.
물론 쉽지 않을 거라고 봤다.
이미 모두 구종을 결정구로 사용이 가능한 패스트볼 3종 세트를 던지는 유현이 떨어지는 공을 장착하려면 꽤나 애를 먹을 거라 봤고, 설사 구사하더라도 패스트볼 3종 세트처럼 위협적일지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붙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런 스카우터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세이부 라이온스를 상대로 오프 시즌과 스프링캠프 내내 준비한, 이날만을 위해 꽁꽁 감춰줬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스플리터.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까지는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궤적으로 들어오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이 공은 대부분 존을 벗어나 볼이 된다.
그럼에도 제대로 구사되는 스플리터는 수준급 결정구로 평가받는다.
타자들이 육안으로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까지는 포심 패스트볼과 궤적이 같다 보니 헛스윙을 유도하기에 최적화된 구종 중 하나다.
2018시즌.
KBO리그를 초토화시킨 그라운드 볼러에게 탈삼진을 잡을 새 구종이 생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더 이상 너에게는.
‘약점 따위 없다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