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오프 시즌 (2)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
메켄 코퍼레이션과 계약한 선수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오프 시즌 동안 선수들에게 최적의 운동 환경을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와. 장난 아닌데?”
“괜히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 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러니까 수준 차이가 나지.”
“우리도 이런 시설 있으면 좋을 텐데.”
“태안 2군 훈련장도 나쁜 편은 아닌데, 진짜 이건 클래스 차이인 거 같아. 말이 안 나오네.”
유현과 강태영은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하자마자 그 규모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재규어스 2군 트레이닝 센터와 비슷한 규모의 트레이닝 센터를 에이전트 회사가 소유하고 있어서 놀랐다. 덕분에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개인 훈련하기 좋겠네.”
“음. 확실히 오프 시즌에 몸 만들기에 딱 좋을 것 같아. 이래서 메켄 코퍼레이션에서 최대한 빨리 미국으로 넘어오라 한 거구나.”
“알리사에게 듣기로는, 네가 훈련하는 것도 홍보 수단이 될 거라더라.”
“그래? 그건 좀 의외네.”
“네가 건강하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거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받아 낼 수 있으니까.”
“듣고 보니 일리 있네. 난 용가리 통뼈라 부상 따위 없지만, 메이저리그 구단들한테 그걸 보여 줄 필요가 있긴 하지.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데뷔 이후 수술 딱 한 번 했다고”
“말했지. 치질 수술.”
“항문만 튼튼하면 난 무적이야.”
강태영은 대전 펠컨스에서 8년 동안 프로 생활을 하며 부상으로 고생한 적이 없었다. 호언장담한 대로 치질 수술을 받은 걸 제외하면 항상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FA나 포스팅을 통해 선수들을 데려오면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인 부상 문제는 적어도 없다고 보면 된다.
남은 건 실력을 인정받는 것뿐이다.
4년 연속 50홈런을 기록했고, 출장하는 국제 대회마다 맹타를 휘둘렀다. 뚜렷한 약점이 없는 타격 실력을 지녔고, KBO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타자들이 가장 애를 먹는 150km 이상의 강속구도 곧잘 쳐냈다. 게다가 발도 빠르고 수비 실력 또한 발군이다.
KBO리그에서 메이저리그에 진출시킨 완성형 투수가 여환진이었다면, 완성형 타자는 강태영이라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시선이었다.
관건은 몸값이다.
포스팅 시스템이 개선되며 더 많은 선수들이 전성기에 메이저리그 문턱을 두드릴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많은 야구 관계자들은 강태영이 보다 좋은 조건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이후에 다른 선수들 또한 비교적 높은 몸값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려볼 수 있게 될 테니까.
물론 강태영은 후배들의 몸값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몸값이야 스스로 잘해서 받는 거지 자신의 도움을 받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렇게 해서 진출하더라도 결국에는 메이저리그에서 도태될 거라고 봤다.
강태영은 오프 시즌 동안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했다. 자신의 몸 상태가 몸값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미국에서 훈련하던 유현과 강태영은 골든글러브-MVP 시상식이 연속으로 열리는 시점에 맞춰서 행사 참여를 위해 잠시 귀국해야만 했다.
투수 부문과 좌익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당연하다는 듯이 유현과 강태영이 받았다. 거기에 우익수 부문에서 제라드 캠프가 수상을 하며서 대전 펠컨스는 총 3개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됐다.
MVP는 대전 펠컨스의 집안싸움이었다.
20승과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유현, 다승과 탈삼진 1위에 이름을 올린 세미 제이슨, 타율, 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에서 1위에 오르며 타격 5관왕을 차지한 강태영까지.
세 명이 나란히 후보에 오른 상황에서,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들이 예상했듯 유현이 제법 넉넉한 표차로 MVP를 수상했다.
MVP가 된 유현이 무덤덤하게 소감을 밝혔다.
“많은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제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안용석 감독님, 한 시즌 동안 고생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좋은 동료들, 항상 제 컨디션을 철저하게 관리해 주는 트레이닝 코치님, 이제는 트라우마 없이 제 경기를 마음 편하게 지켜보시는 부모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게 찾아온 경이로운 기적에 감사합니다. 사흘 전까지 전 뉴욕에 있는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강태영 선수와 함께 훈련했습니다. 그곳에서 다수의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만났습니다. 다음 시즌. 더 완벽해진 모습으로 절 상대하는 타자들에게 절망을 심어 주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습니다.”
* * *
메켄 코퍼레이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을 하며 유현은 다수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유현에 대해 모르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유현을 알아보고서 먼저 인사를 건네는 선수들도 더러 존재했다.
유현에게 있어 이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팀에서 방출당해 미래를 걱정했던 투수가, 이제는 몇몇 메이저리거들도 알아보는 선수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유현에게 땅의 정령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잊지 않은 목표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줬다.
-더블A나 트리플A에서 0점대 방어율이나 4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면 초특급 유망주라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 지금 네 입장이 딱 그래. KBO리그에서 통산 방어율 2.25를 기록한 여환진도 메이저리에서 순항 중인데,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는 얼마나 대단할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문제는 그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아직도 1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는 거지.’
-걱정하지 마. 1년 금방 가니까. 훈련 좀 하다가 귀국하니까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잖아.
‘그리고 이제 곧 연봉 협상 때문에 다시 귀국했다가, 잠깐 쉬다 보면 스프링캠프에 참여하겠지.’
-거기서 정신없이 훈련하다 보면 시즌 개막할 거고, 20승 이상 거둘 즈음에는 시즌 끝나서 포스팅 생각하고 있을 거고.
땅의 정령이 말한 대로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개인 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알리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종종 강태영과 뉴욕의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됐다.
12월 중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
유현이 타석에 강태영을 세워놓고서 자신의 새 무기를 테스트했다. 그리고 알리사 메켄이 유현의 피칭을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 체크했다.
“알리사, 기계들 많이 다뤄 본 솜씨네요?”
“친분 있는 선수들 훈련을 도와주면서 익혔죠.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포심 패스트볼과 똑같은 궤적으로 오다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라니, 언제 이런 무기를 준비했어요?”
“한국시리즈 끝나고 틈틈이 연습했죠. 괜찮아요?”
“괜찮은 수준이 아니죠. 이 스플리터만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유현 선수를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타자는 많이 없을 거예요.”
확실히 유현의 스플리터는 매력적이었다.
떨어지는 공이나 오프 스피드 피치가 없는 게 유현이 단점으로 지적받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커브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긴 했지만, 타자의 허를 찌르는 정도로만 썼지 주요 승부처에서 결정구로 사용할 만한 구종은 아니었다.
스플리터를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의외로 단조로웠던 유현의 투구 패턴에 꽤나 많은 변화가 생길 걸로 보였다.
타석에 서서 유현의 스플리터를 몇 차례 지켜본 강태영 또한 혀를 내둘렀다.
“너,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더라도 내가 있는 지구로는 오지 마라. 아니면 그냥 내가 있는 팀으로 오던가. 너랑 적으로 만나기 싫다.”
“언제는 내 공도 칠 수 있을 거라더니.”
“그건 스플리터 없을 때 이야기고. 지금도 칠 수 있긴 하겠지. 10타수 1안타도 치긴 치는 거잖아?”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땅의 정령으로부터 배운 마지막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강태영을 타석에 세워 놓고 테스트한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마라. 스프링캠프 막바지에 테스트해 볼 기회가 있을 테니까.
‘스프링캠프?’
-펠컨스 프런트에서 일본 구단과의 연습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것도 2군이 아니라 1군으로.
‘미국에 있으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시상식 때문에 한국 들어갔을 때 수집해 온 정보다. 이 몸이 땅의 정령이라는 걸 잊지 마라. 대전 일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금 이 순간도 내 귀에 다 들어오니까.
스프링캠프에서 치러질 일본 구단과의 연습 경기는 유현에게 또 다른 동기 부여가 됐다.
메이저리그는 아니지만, 일본 구단과의 친선 경기를 치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공이 어느 수준까지 통할지 판단할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 * *
12월 20일.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유현이 강태영과 알리사 메켄을 뉴욕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봉 협상을 하고 스프링캠프에 참여하기 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온 유현은 허전함을 느꼈다.
훈련하는 내내 붙어 있던 강태영과 그 외의 시간을 늘 함께한 알리사 메켄이 없으니까 뭔가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그렇다고 할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전에는 헬스장에서 가볍게 운동을 한 뒤,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 와중에 연봉 협상에도 임했다.
유현이 아니라 메켄 코퍼레이션이 말이다.
2019시즌.
유현의 연봉은 4억 원으로 확정됐다. 거기에 다승과 탈삼진과 관련된 옵션이 추가되어 있었다. 옵션을 모두 충족할 경우, 2019시즌에 유현의 연봉 총액은 4억 5천만 원이 될 예정이었다.
유현은 연봉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최저 연봉보다 조금 높은 연봉을 받던 투수가, 한 해 만에 4억 원의 연봉을 받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유현의 목표는, 그리고 땅의 정령의 목표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사이영 상을 쟁취하는 거였다. 그전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발전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할 생각이었다.
사실 오프 시즌에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 해봐야 많지 않았다. 스프링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 최선의 몸상태를 만들며, 스플리터 그립을 계속해서 연습하는 게 유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12월 25일.
유현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 알리사 메켄이 한국에 온 그날.
강태영의 포스팅 계약 결과가 발표됐다.
포스팅 제도 개선으로 KBO리그 선수들 또한 일본 선수들처럼 최고 입찰 금액 2천만 달러를 적어낸 다수의 구단과 협상이 가능하게 됐다.
강태영에게 2천만 달러를 적어 낸 구단은 모두 8곳이나 됐다. 그리고 그중에는 빅마켓 구단인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뉴욕 양키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메켄 코퍼레이션은 다수의 구단들과 동시에 물밑 협상을 진행했고, 강태영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구단들이 제시한 연봉과 계약 규모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좌익수 주전 보장을 비롯해 강태영이 원하는 세부 조건들, 그리고 주전으로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넘볼 수 있는 팀과 계약을 하는 거였다.
다행히 메켄 코퍼레이션은 강태영이 원하는 조건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만족시켜 줬다.
간절하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원하는 빅마켓 구단이, 월드 시리즈 최다 우승을 기록한 구단과 라이벌인 팀이 강태영을 간절이 원했으니까.
[강태영, 5년 6천만 달러에 보스턴 레드삭스와 전격 계약!]
KBO리그 괴물 타자의 보스턴 레드삭스 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