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오프 시즌 (1)
사실 유현은 전날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는 걸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우승 후에 언론 인터뷰하랴, 선수단과 함께 파티를 즐기랴, 술에 취한 선배들 챙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정확히는 보상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선수들보다 더 우승을 기뻐한 땅의 정령이 파티를 하는 내내 서럽게 울며 진상을 부렸으니까.
“흐음…….”
-뭘 그렇게 쳐다보냐. 잘생긴 땅의 정령님 얼굴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오늘은 안 우나 해서.”
-감동은 하루면 충분하다. 오늘부터 펠컨스는 강팀이 되기 위해 다시 부지런히 달릴 텐데, 이 몸이 정신줄을 놓고 있을 순 없지.
“그래, 어련하시겠어. 자. 그럼 보상 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번에는 안내 음성 같은 거 하지 마. 안 어울려.”
-……옛다, 보상.
잠시 후.
유현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커터를 배울 때처럼, 네 번째 구종을 투구하는 자신의 모습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됐다.
유현은 가방을 뒤졌다.
가방 속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 야구공을 꺼내 왼손에 쥐었다.
“그립이 이런 식인가?”
-맞아.
“흐음. 뭐, 어떤 느낌인지는 던져 보면 알겠지. 커터를 배울 때도 그랬으니까.”
-맞아 던져 보면 알 거야. 몇 개월 뒤에.
스플리터.
유현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네 번째 구종이자 마지막 구종을 배웠다.
다만 지금 당장 사용할 일이 없었다.
오프 시즌에 새 구종을 배워서 던질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 훈련을 가서 틈틈이 연마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한국시리즈가 막 끝난 상황에서 지금 당장은 개인 훈련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 시즌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일단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게다가…….
“곧 미국 갈 건데 그 전에 푹 쉬어야지.”
조만간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기도 했고 말이다.
* * *
유현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건강식품을 포함한 선물을 한 아름 싸든 채 내려가, 부모님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 매 끼니 어머니가 차려 준 맛있는 집밥을 먹었다.
물론 비시즌이라고 마냥 노는 건 아니었다.
아침마다 읍내로 나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걸 잊지 않았다.
11월 1일.
고향에서 몸도 마음도 힐링한 유현이 다시 대전으로 올라가기 위해 짐을 쌌다.
“뭐 빠트린 거 없지?”
“엄마가 싸준 반찬만 트렁크에 한가득인데 빠트린 게 있겠어요?”
“너무 많이 쌌나?”
“이 사람아. 그러니까 적당히 싸야지. 이걸 현이 혼자서 어떻게 다 먹어?”
“걱정 마요, 아버지. 저 다 먹을 수 있어요.”
어머니가 싸준 반찬이 혼자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많긴 했지만, 유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음식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돼지 햄스터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 돼지라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혼자서 불화산 치킨 다섯 마리를 다 먹는 햄스터지.’
-난 그저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면 안 되니까 먹은 것뿐이다. 자연을 파괴하면 안 되니까.
‘닭뼈도 다 먹지 그랬냐.’
-닭뼈는 음식물쓰레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요새는 순살만 먹어서 뼈도 안 나왔다.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래서 어머니가 챙겨준 음식 안 먹을 거야?’
-너희 어머니 음식 솜씨가 너무 마음에 든다. 계속 농장에 있으면 안 되냐?
‘혼자 남아 있던가.’
-패스. 너 없으면 재미없어.
‘알면 됐다.’
유현이 피식 웃었다.
함께 지낸 지 제법 시간이 됐기 때문일까?
어느새 유현도 땅의 정령도, 서로가 옆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대전으로 올라가는 동안 땅의 정령은 조수석에 드러누워 꿀잠을 잤다. 휴게소조차 안 들리고 대전에 도착한 유현은, 어머니가 싸준 음식을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고서 곧장 알리사 메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알리사. 지금 막 집에 도착했어요. 기자회견 끝나고 태영이랑 식사하면서 편하게 인터뷰하면 돼요. 네네. 가서 봐요.”
집에 들어온 지 채 20분도 되지 않아 유현은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대전의 한 호텔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오늘 완전 바쁘네. 집에 오자마자 나가서 저녁까지 있어야 하는 거야?
‘과연 저녁까지만 있을까?’
-널 위해 난 미리 집에 올게. 걱정하지 마. 난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즐겨.
‘응. 안 그래도 그럴 거야.’
* * *
11월 1일 오후 2시.
대전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전 펠컨스의 단장과 강태영이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포스팅 진출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였다.
2018시즌을 시작하기 전.
강태영은 대전 펠컨스가 우승한다면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팬들은 강태영이 미국에 진출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대전 펠컨스가 우승하는 것보다 강태영의 은퇴가 더 빠를 거라고 말하며 FA가 되어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를 바랐다.
그때는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불과 한 시즌 만에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거라고 말이다.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덕분에, 강태영은 미련을 남기지 않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할 수 있었다.
대전 펠컨스 프런트 또한 강태영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호의적이었다. 기회가 있다면 선수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게 프런트의 입장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배종한 단장이 강태영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거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강태영 선수. 미국은 언제 가시나요?”
“저기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유현 선수와 함께, 1주일 뒤에 미국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유현 선수와 함께 넘어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혹시 메켄 코퍼레이션 때문입니까?”
“네. 다들 아시다시피 저와 유현 선수는 메켄 코퍼레이션과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메켄 코퍼레이션에서 저와 유현 선수의 개인 훈련을 위해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겸사겸사 미국 현지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파악하기 위해서 가려는 것도 있습니다.”
“몸값은 얼마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그 부분은 에이전트에 일임할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제게 외야 한 자리를 주전으로 보장해 줄 팀입니다. 경쟁이 아니라 주전입니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연봉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죠.”
강태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수년 동안 KBO리그와 국제대회에서 입증한 자신의 실력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에게 주전을 보장하는 팀에서, 그리고 이왕이면 강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노려보고 싶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대전의 한 한식당에서 유현과 강태영, 그리고 알리사 메켄이 만났다. 유현 덕분에 알리사 메켄은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직후 강태영으로부터 가장 먼저 단독 인터뷰를 따낼 수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술도 몇 잔 곁들었다.
복분자주를 몇 잔 마시고 얼굴이 붉어진 강태영은, 알리사 메켄이 화장실에 간 사이 유현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둘이 무슨 사이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단독 인터뷰를 부탁할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아서 그래. 둘이 분위기도 묘하고. 혹시 저 여기자랑 사귀어?”
“응. 사귀어.”
유현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실 대전 펠컨스 팬들 사이에서는 유현이 알리사 메켄과 만나는 것을 아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당시 대전 일대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사진이 제법 많이 찍혔으니까.
그럼에도 대다수의 팬들이 모른척을 해줬다.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연애가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고, 유현은 연애 이후에도 꾸준히 호투를 했으니까.
선수들에게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펠릭스 곤잘레스 정도만 알고 있지 다른 선수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장거리 연애고 오프 시즌과 스프링캠프 때 정도가 아니면 얼굴을 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사이다 보니 조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데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데 숨길 이유가 뭐 있겠는가.
강태영이 미소를 지었다.
“장거리 연애하기 힘들겠네.”
“얼굴 자주 못 보는 거 말고는 괜찮아.”
“그래도 미국 가면 한동안 자주 얼굴 볼 수 있어서 괜찮겠다. 미국 가기 전까지 같이 있을 거야?”
“음.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좋은 시간 보내. 함께 있는 시간이 적을수록, 있을 때 잘해줘야 하더라고. 장거리 연애 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알리사 메켄과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었다. 헬스장에서 잠깐 운동을 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하루의 대부분을 알리사 메켄에게 할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나는?
‘암컷 햄스터 한 마리 입양하자니까 그러네. 말하는 햄스터 어디 없나.’
-……그냥 집에서 영화나 구매해서 보고 있을 테니까 실컷 놀다가 와라. 미국 갈 때 나 버리고 가면 안 된다.
* * *
일주일.
짧으면서도 긴 시간 동안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알리사 메켄은 한국시리즈 때부터 한국에 있었지만, 둘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유현은 한국시리즈를 치러야 했고, 시리즈가 끝난 이후에는 잠시 동안 고향에 내려가서 휴식을 취했으니까.
그 시간 동안 알리사 메켄은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을 하며 당연하다는 듯 유현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유현과 일주일 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자, 유현과 함께 가고 싶었던 곳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현과 알리사 메켄은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
주위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운동선수가 연애를 하는 게 잘못도 아닌데 눈치를 왜 보겠는가. 오히려 알리사 같은 사랑스러운 여성이 내 애인이라고 동네방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간에 잠깐의 소란이 있긴 했다.
한 기자가 유현이 외국인 여성과 열애한다는 기사를 올렸고, 그 기사를 본 부모님이 유현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너 진짜 외국인 여자하고 만나는 거야?]
“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즈음부터 만나고 있었어요.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이 엄마는 외국인 며느리도 괜찮다. 국적이 뭐가 중요해. 서로 사랑하면 그걸로 된 거지.]
[아빠는 손자보다 손녀가 좋다.]
“아하하…… 네. 참고할게요.”
다행히 유현의 부모님은 알리사 메켄과의 연애를 반대하지 않았다. 유현에게 싸우지 말고 잘 사귀라는 잔소리를 한 정도에서 그쳤다.
알리사 메켄은 유현과 자신이 사귄다는 게 알려졌음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애초에 그게 신경 쓰였다면 호텔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던가 하지, 먼저 공개 데이트를 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알리사 메켄과 일주일간의 달콤한 휴가를 만끽한 유현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현의 옆자리에는 알리사 메켄이 앉았다.
알리사 메켄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으며 유현이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 가는 건 좋지만,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간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정신 차리고 똑바로 몸 상태를 만들자고.’
미국을 가는 유현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메켄 코퍼레이션의 도움을 받아 스프링캠프를 치르기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것, 그리고 알리사 메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스플리터를 테스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